제156화 한국식 치킨집
타이론은 뉴욕대의 고풍스러운 건물을 바라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지적인 일들이 꿈만 같게 느껴졌고 자신은 근처도 가지 못할 엄숙하고 신비스러운 공간처럼 생각됐다.
그런 뉴욕대에 타이론이 온 것은 어젯밤 윌리가 그를 자신의 사무실로 초대했기 때문이다.
윌리는 타인을 칭찬하는 게 서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10대에 불과한 타이론에게 최대한 긍정적인 단어를 써가며 작품을 평가했다.
그리고는 직접 자신의 사무실로 와서 추후 계획을 논의해보자고 의견을 전했다.
타이론은 윌리가 있는 사무실 앞에서 잠시 심호흡하고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윌리의 목소리가 들리자 타이론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지난번 오한결과 함께 왔을 때는 비교적 깔끔한 책상이었는데 이번에는 먹다 남은 간식들이 어수선하게 놓여있고 며칠은 된 듯한 음료수 병들이 창가에 일렬로 놓여있었다.
타이론의 당황스러운 모습 따위에 안중에도 없듯이 윌리가 말했다.
“왔구나. 이쪽으로 앉아라.”
“네…….”
의자에 앉은 타이론은 엉덩이를 뾰족하게 찌르는 뭔가가 느껴졌는데, 손으로 집어 보니 과자 부스러기였다.
윌리가 과자 때문에 기름진 손을 셔츠에 대충 닦고 말했다.
“오한결 작가님의 말대로 너는 굉장한 재능이 있는 아이야. 너 자신도 그렇게 느끼지?”
타이론이 쑥스러운지 목소리가 작았다.
“그림이 좋아요. 그리고…… 남들과 다르게 그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그게 좋거든요.”
거구의 윌리가 힘겹게 몸을 숙인 뒤 두꺼운 잡지책 하나를 타이론에게 건넸다.
“한 번 볼래? 뉴욕대 영재센터에 입학한 아이들 작품이야.”
책을 받아든 타이론이 무척 긴장한 얼굴로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
상당히 정교하고 개성 넘치며 훌륭한 테크닉이 보이는 그림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보였다. 타이론이 풀이 죽은 얼굴로 작품을 보면서 물었다.
“이게 제 나이 또래 아이들이 그린 거예요?”
“응. 어때?”
“진짜 잘 그렸는데요. 저는 상대가 안 될 만큼.”
그 사이 윌리가 과자 하나를 입에 넣고 와자작 씹었다.
“당연히 그렇지. 그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 영재 교육을 받았어. 적어도 십년 이상은 그림만 그린 아이들이야. 비교할 수가 없지.”
“아…….”
이제 자신의 위치와 현실을 알게 됐다고 생각한 타이론이 잡지를 내려놓고 말했다.
“이렇게 훌륭한 학생들도 많은데 왜 저를 부르셨어요?”
“내가 말했잖아. 재능이 있다고.”
“하지만…….”
타이론이 작품집을 다시 손에 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걸 보세요. 이렇게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들이 있는데, 왜 저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놀리시는 거죠?”
“아니. 난 그 작품집에 있는 작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거기엔 타이론 학생같은 예술 작품은 없어.”
“!!”
“거기에 실린 그림들은 수년을 장인처럼 그림에 매달린 학생들의 그림이야. 이미 자신이 생각한 어떤 아이디어를 완벽한 이미지로 표현할 줄 아는 거야. 어떻게 보면 너무나 멋지고 화려하지만 문제는 그 아이디어야. 타이론 같은 강렬함은 없어.”
윌리의 말에 기분이 풀린 타이론이 다시금 기대를 잔뜩 품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저도 제대로 그림을 배우면 이렇게 멋지게 그릴 수 있는 거예요?”
“아마도. 하지만 그러고 싶니?”
“네?”
윌리의 아리송한 말에 타이론이 당황했다.
“이 아이들처럼 그리고 싶냐고 묻는 거야. 오한결 작가님과 나는 타이론의 순수한 그림체에 반해버렸거든. 타이론은 자신의 그림체를 미술 교육으로 다듬어서 멋지게 그리는 테크닉을 배우고 싶은 거야?”
윌리의 말은 타이론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넘친 타이론은 언제 어디서든 낙서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표현해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재능은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자신의 그림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그리는 그림 정도로 취급했었다.
하지만 한 편으론 어떤 형식적 제안 없이 그리는 자신의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기도 했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락커를 잡은 손을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이면 그뿐이니까.
그 작업은 타이론을 기쁘게 했고 누구보다 작품에 애정을 쏟게 만들었다.
타이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미술 교육을 받으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윌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여기 작품집에 실린 아이들처럼 그리겠지. 멋지고 화려하게. 정말 그러고 싶니?”
그 말은 곧 타이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체를 잃어버린다는 뜻으로 읽혔다. 타이론이 그제야 현실을 깨닫고 대답했다.
“아뇨.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지금 작업 방식은 저를 항상 행복하게 하거든요.”
대화를 시작하면서 먹기 시작한 과자를 윌리가 모두 먹어 치우고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나는 타이론이 정형화된 미술교육으로 그 재능을 잃어버리는 게 싫거든. 그래서 말인데, 솔직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너를 가르칠 게 없다는 거야.”
윌리의 말에 타이론이 멍한 눈으로 쳐다보자, 윌리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미술 교육이 아니라, 네가 그 순수함을 지켜가면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뒤를 봐주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개인전을 열어보면 어떨까?”
개인전이라는 꿈 같은 말에 타이론이 기겁하듯 소리쳤다.
“네? 뭐라고요?!”
“타이론의 작품들을 모아서 자그만하게 전시를 해 보는 거야.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너의 작품 스타일을 알리는 거지. 너는 뉴욕대에서 교육을 받는 게 아니라 전시를 할 거야. 여기 조그만 전시장 하나는 내가 빌릴 수 있거든!”
타이론이 무척 흥분하며 행복해하다가, 현실적인 문제가 떠오르자 다시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저는 작품이 몇 개 없어요. 전시는 많아야 하잖아요.”
“물론 당장은 힘들지. 차근차근 작품을 준비해 봐. 전시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하는 거지 뭐. 안 그래? 그때까지 나는 기다려 줄 수 있어. 근데 너무 늦지는 마. 하하.”
윌리의 제안에 벅찬 감동을 느낀 타이론은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제가 작품을 그릴 때마다 봐주실 수 있나요?”
“물론. 그 정도야 내가 해주지.”
너무 감동을 받은 타이론이 어린 아이처럼 훌쩍이더니 윌리가 가볍게 위로하자, 급기야 참았던 감정이 터지고 말았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대성통곡을 하는 타이론을 두고 윌리가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법이 서툰 윌리는 잠시 머리를 굴리며 해결책을 찾아냈다.
“새로 생긴 한국식 치킨집이 있는 데 가볼래? 거기 튀김이 얼마나 바삭한데. 너 혹시 매콤한 거 좋아해? 거기에 매운 닭도 있어.”
평소 음식을 좋아하던 윌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자고 하면 상대방도 기분이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효과가 있었다.
“좋아요!”
타이론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자신이 슬쩍 민망한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치킨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타이론이 뭔가를 속삭였다.
“근데, 제가 엊그제 작품 하나를 완성했거든요. 혹시 그거는 언제 봐줄 수 있어요?”
윌리는 호기심을 보였다.
“그래? 내일 당장 가지고 와봐. 봐줄게.”
“그게……. ‘뉴원 애비뉴’ 벽면에 그렸는데요.”
윌리를 공포로 몰아넣은 슬럼가 이름이 나오자, 그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제발 거기에 그림 좀 그리지 마!”
그리고는 말없이 치킨집을 향해 무작정 뛰어갔다.
‘아, 스트레스! 치킨을 빨리 먹어야 해!!’
* * *
문화재단이 마련한 뉴욕 원로 예술가들과 저녁 만찬을 끝내고 오한결과 최하늘은 하루를 기분 좋게 마감하기 위해 친구들이 있는 재즈클럽을 찾았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오한결은 한쪽 구석에서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려 쳐다봤다.
로건과 리나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웃고 떠드는 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했다.
“아, 로건은 자주 오네요. 안 바쁜가?”
곁에 있던 최하늘도 히죽 웃었다.
“그러게요. 행사가 다가오니까, 로건도 조급한가 봐요. 작가님 보러 자주 오네요.”
하지만 오한결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분명 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로건의 눈빛에서 묘한 긴장감과 설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 자주 오는 이유는 저 때문이 아닐 거예요. 누군가를 마음에 뒀겠죠.”
순간 최하늘은 로건이 자신을 보러 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머,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이미……. 호호.’
그 사이 오한결은 로건에게 다가갔고 최하늘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오한결을 뒤따랐다.
로건이 오한결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내심 섭섭한 분위기를 풍겼다.
“작가님, 어서 오세요. 리나와 함께 작가님을 기다렸습니다.”
“아, 그래요?”
오한결이 로건의 눈을 바로 쳐다보며 묻자, 로건이 눈을 못 맞추고 시선을 최하늘에게 돌렸다.
“하늘 씨도 어서 오세요.”
로건의 질문에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진 최하늘이 대답했다.
“로건, 반가워요…….”
오한결이 물었다.
“요즘 자주 오시네요.”
“오한결 작가님 보러 오는 거죠. 그리고 리나도요. 두 분께서 빅스퀘어 빌딩 이벤트 주인공 아닙니까. 자주 얼굴 뵙고 행사 얘기도 하고 좋잖아요?”
“아, 그래요?”
은근히 긴장한 로건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음 오한결이 근처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근데 산다라는 어딨나요? 맥주 주문을 해야 하는데.”
“오늘 출근 안 했어요.”
리나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왜요? 어디 아프대요?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그게 몸이 좀 아픈가 봐요. 제가 이웃이라 찾아가 봤는데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병원에 가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요.”
최하늘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지난번 손님하고 싸운 거와 연관돼 있는 걸까요? 그때도 사실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였거든요.”
조용히 대화를 듣던 로건이 끼어들었다.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산다라를 설득해 뉴욕 최고 의료 시설에 입원하시죠. 비용은 물론 제가 부담합니다.”
리나가 그런 로건의 제안을 싹뚝 잘랐다.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마음의 병을 얻은 것 같아요.”
그리고는 오한결의 손을 덥석 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작가님이 한 번 산다라를 봐주세요. 산다라가 너무 힘들어하는데 친구로서 아무런 도움이 못 돼서 너무 슬퍼요. 지금까지 시시콜콜 제게 모든 걸 얘기하던 친구였는데 최근에 비밀이 너무 많아졌어요. 그 비밀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게 분명 산다라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리나의 간절함에 오한결도 감동했는지 그녀의 두 손을 오한결도 꼭 잡고 말했다.
“네, 내일 같이 가봐요. 사실 제가 짐작하는 문제가 하나 있거든요. 산다라는 만나서 확인해 봐야겠어요.”
“감사해요. 작가님!”
오한결과 리나가 두 손을 맞잡은 채 간절한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자, 그 옆에 앉은 최하늘과 로건은 심기가 아주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둘은 동시에 외쳤다.
“여기 술! 독한 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