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이유 있는 분노
금빛 반짝임이 환상적으로 보이는 뉴욕의 야경을 배경으로 진태희가 남자친구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식사 도중 주기적으로 휴대폰을 보는 진태희에게 남자친구가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진태희가 대답했다.
“아, 그때 햄버거 가게에서 만났던 예술가 있잖아. 오한결이라고. 그분 작품이 빅스퀘어 빌딩에서 볼 수 있다고 하던데. 그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호호. 꼭 가보고 싶어. 자기도 갈 거지?”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던 남자친구가 대답했다.
“솔직히 모르겠어. 최근에 항상 일이 늦게 끝나서 그날 여유가 생길지도 미지수고, 자기도 바쁘다며 거기 갈 시간이 있어?”
남자친구 말에 실망한 진태희가 휴대폰을 끄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하루 시간 내는 게 그렇게 힘든가? 꼭 가보고 싶은데.”
남자친구가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갑자기 왜 그래? 평소 예술에 관심도 없었잖아. 그리고 빅스퀘어 빌딩 행사는 분기마다 하잖아. 이번에 못 가면 다음에 가면 되고.”
“오한결 작가님 작품을 꼭 보고 싶단 말이야. 자기는 궁금하지도 않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님이 오셔서 작품을 발표하는데.”
남자친구가 한숨을 푹푹 쉬며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내가 아까 설명했잖아. 바쁘다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어! 중요해.”
“……왜 그래? 갑자기.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낯설다, 이런 모습.”
남자친구가 빤히 바라보자 진태희는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남자친구 말대로 그녀는 예술 작품을 보기 위해 고집을 부리거나 남자친구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야만 하는 생각이 드는 걸까?
호기심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렬했다.
그건 꼭 그래야만 한다는 삶의 의무감처럼 느껴졌다.
생각을 정리한 진태희가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나 혼자라도 가겠어. 자기는 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솔직히 상관없으니까.”
“태희야!”
“몰라. 나는 꼭 가야겠어. 그래야만 한다고.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단 말이야.”
처음이었다. 진태희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게. 하지만 진태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의 이런 행동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고 말이다.
* * *
문화재단 사무실 분위기가 긴박하게 돌아가더니, 이나영 팀장이 신수진 이사장에게 달려갔다.
“이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관련 내용이 적힌 페이퍼를 신수진 이사장이 훑더니 한쪽 눈썹을 급격히 올리며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어서, 회의를 소집하세요. 아, 강철 지부장도 꼭 참석하라고 하세요!”
잠시 뒤, 문화재단 회의실 정면에 대형 스크린이 켜지고 강철 지부장의 단호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신수진 이사장에게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보고에 들어갔다.
“이나영 팀장을 통해 들으셨겠지만, 현재 미국 내 몇몇 단체와 MOU가 취소가 되고 있고 거물 작가 몇몇이 문화재단과 계약한 행사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습니다. 수년 동안 뉴욕 지부가 만든 미국 내 예술가 네트워크가 위기에 처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심각한 내용을 들은 신수진 이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겨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철 지부장과 이나영 팀장은 긴장한 나머지 마이크 앞에서 마른 침을 계속 삼키고 있었다.
신수진 이사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런 겁니까? 악의적인 방해인가요?”
“앞으로 더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 원인을 파악해야겠지만 지금으로선 짐작되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어서 말해보세요.”
“정보통에 의하면 CNN의 크리스 본부장과 크리스티가 영향력을 행사한 것 같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은 다소 의외의 인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네? 그 사람들이 왜요? 문화재단에 섭섭한 게 있답니까?”
“그게……. 크리스 본부장 같은 경우 대외적으로 문화재단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번에 CNN의 오한결 독점 방송에 문화재단이 제동을 걸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크리스티는 왜 그럽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짐작하기로는 CNN 크리스 본부장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크리스티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않았을까요?”
“결국 오한결 작가와 관련된 얘기로 넘어가는군요. 그나저나 그 제안이란 게 뭘까요?”
“결국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단독으로 입수해 경매에 부치고 싶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음, 그거야 추후 논의하면 될 것을 이렇게 소란피울 문제인가요?”
“근데 더 큰 문제가 있어서요…….”
강철 지부장이 머뭇거리자 신수진 이사장이 답답한 마음으로 말했다.
“어서 말해주세요!”
“그게…… 소문에 의하면 강철 지부장이 오한결 작가에 대한 칼럼을 하나 썼다고 합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제목만 봐도 좀…….”
“뭔데 그런가요?”
“오한결 작가가 뉴욕커일 수밖에 없는 이유, 라는 제목입니다. 아마도 뉴욕 출신 작가로서 오한결을 소개하고 크리스티가 그의 작품을 미국인의 작품으로 공개 입찰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우리 정보원들의 추측입니다.”
강철 지부장의 말을 들은 신수진 이사장은 당혹스러워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오한결이 뉴욕 출신 작가로 소개되고 그의 작품이 미국 대표 작품으로 거래된다고?
‘살다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도 처음 듣는구나.’
하지만 신수진 이사장은 내심 불안감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데이비드 오 교수만 해도 뉴욕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미국 대표 작가로서 소개되는 일이 간혹 있지 않은가?
데이비드 오 교수가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도 그들이 그를 뉴욕 대표 작가로 소개한다면 그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작품이 미국 휘트니 미술관에 전시돼 있고 그들은 은근슬쩍 뉴욕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를 소개하고 있으니까.
오한결 작가가 곧 빅스퀘어 빌딩에서 작품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들의 악행을 막지 못하면 오한결은 뉴욕 대표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신수진 이사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뉴욕으로 가겠어요.”
이나영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이사장님.”
“아니요. 저 혼자 갈 거예요. 이나영 팀장은 문화재단에 남아서 추후 상황들을 지켜보고 계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요.”
“하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에 힘드실 텐데요.”
신수진 이사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오히려 기쁘군요. 제가 누군지 똑똑히 알려주고 오겠습니다.”
이나영 팀장은 그런 이사장의 모습을 보며 더욱 불안감을 느꼈다. 이거 대형 사고라도 쳐서 일이 더 커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순간 신수진 이사장이 CNN 본사에 들어가서 날카로운 소리로 크리스 본부장을 혼내는 상상을 했다. 묘한 쾌감도 느꼈지만 그거야말로 최악의 사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우, 어쩌시려고.’
* * *
자정이 넘길 무렵 재즈클럽은 몰려드는 손님들로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공연을 마친 리나는 고개를 빼들고 오한결을 찾았다. 최하늘과 단둘이 앉아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한결 작가님 작품을 영상을 봤어요. 오늘 문화재단에서 보여줬거든요. 근데, 정말 노래는 제가 선택해도 되는 거예요? 작가님과 상의 안 해도 돼요?”
리나가 오한결을 향해 존경을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물론이죠. 리나의 예술적 취향을 저는 믿거든요.”
리나는 너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작품 명성에 흠이 가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하하.”
“하지만…….”
오히려 오한결의 대답에 리나가 더 불안감을 느끼자, 답답함을 느낀 최하늘이 끼어들었다.
“그러면 제가 좀 선곡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리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기회인데 느낌 가는 대로 선곡할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 제가 예전에 공연 쪽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서 나름 노하우가 있어요.”
“어머! 너무 잘됐네요. 사실 제가 자작곡이 몇 개 있는데, 어느 노래가 어울리는지 솔직히 감을 잠을 수 없네요.”
“언제 날 잡아요.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 봅시다.”
“좋아요! 호호.”
최하늘이 자신의 노래 취향을 밝히며 리나의 보컬 스타일을 평가하자, 리나는 긴장한 듯 쥐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최하늘의 평가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대화가 깊어져 갈 때쯤, 재즈클럽 바테이블 쪽에서 산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뭘 알아! 그런 말 할 거면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
놀란 오한결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산다라가 어떤 커플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주변 사람들이 산다라를 말렸지만 그녀의 고함은 그칠 줄 몰랐다.
“내가 왜 한국을 자랑스러워해야 하지? 그들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앤드류가 급히 커플에게 달려가 사과를 한 뒤, 흥분한 산다라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잠시 뒤, 마음이 누그러진 산다라가 커플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오한결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리나가 말했다.
“요즘 부쩍 저래요. 한국 얘기만 나오면 산다라가 무척 흥분하더라고요. 아마도 최근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최하늘이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대답했다.
“몰랐어요. 산다라가 저런 모습이 있는지. 꼭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오한결이 리나에게 물었다.
“최근에 산다라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며칠 전 갑자기 재즈클럽에 안 나온 적이 있어요. 한 번도 무단으로 결근한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출근해서는 하루종일 말도 안 했고요. 그 이후부터 저렇게 예민해지더니, 한국 얘기만 나오면 저렇게 화를 내고 있어요.”
얘기를 조용히 듣던 최하늘이 중얼거렸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군요.”
잠시 뒤 산다라가 맥주를 들고 오한결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여기 다들 모여 있었군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었어요?”
좀 전까지 불같이 화를 내던 산다라가 살갑게 다가오자 최하늘이 어색해서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냥 리나 노래 관련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아하! 리나에게 참 중요한 일이죠. 잘 좀 도와주세요!”
맥주를 내려놓고 사라지는 산다라를 보면서 리나가 소곤댔다.
“저는 저런 산다라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요. 항상 괜찮은 척하거든요. 지금 누구보다 마음이 아플 텐데. 하지만 무슨 이유로 저렇게 힘들어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어요.”
오한결이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며 생각했다.
한국을 증오하는 한국계 미국인 산다라.
그녀는 한국 출신 입양아였다.
오한결은 산다라 마음 안에 가득한 분노와 슬픈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꽉 찬 감정이 곧 주체할 수 없어 폭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곧 내가 나서야 하는 상황이 생기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