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축하 파티
신수진 이사장이 회의실에서 이나영 팀장의 업무 보고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
긴장한 이나영 팀장이 보고를 마치자 신수진 이사장이 만족한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한결 작가가 작품을 잘 완성했다니 다행이군요. 뭐, 그건 당연한 결과였겠죠. 호호.”
“강철 지부장의 말로는 그렇게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작품은 생전 처음 봤다고 합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고요.”
이나영 팀장의 말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신수진 이사장이 대답했다.
“솔직히 우리도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습니까? 그리고 강철 지부장은 실물론 본 적이 없으니까 더 놀랐겠죠.”
“맞습니다. 뛰어난 작품은 실물로 봤을 때 더 위대해 보이기 마련이죠.”
두 사람이 오한결 작가 작품에 관해 칭찬을 이어가던 중 신수진 이사장이 불쑥 물었다.
“근데 왜 CNN은 오한결 작가의 작품 녹화에 참여하지 않은 거죠? 우리가 고급 장비를 대여해 주고 최고의 촬영 편집 전문가도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그게 싫다는 건가요?”
“그게…… 갑자기 CNN에서 녹화 불참 의사를 밝혔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신수진 이사장이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왜요?”
“우리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기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자체 장비로 녹화를 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물론 CNN에서 녹화를 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다만, 문화재단은 오한결 작가의 작품이 최상의 조건에서 녹화될 수 있도록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해주겠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나요?”
이나영 팀장은 조금은 현실 감각이 없어 보이는 신수진 이사장을 슬쩍 쳐다봤다.
우리 쪽이야 의도가 좋았다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쪽 입장에서는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한결 작가를 후원하는 문화재단의 제안에 CNN이 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거 벌집을 쑤신 건지 불안하네…….’
이나영 팀장은 여전히 화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린 신수진 이사장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보였다.
“CNN의 미진한 협조가 많이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오한결 작가의 작품이 최상의 조건에서 제작되고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계획은 아주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나름 만족스러운 회의를 마친 신수진 이사장은 이사장실로 돌아와 쉬지 않고 문화재단 사업 계획 보고서를 읽으며 다시금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보고서와 씨름하고 있는 와중에 CNN 매튜 편집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친분이 있는 그였기에 신수진 이사장이 밝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매튜 편집장. 오랜만입니다. 호호.”
[신수진 이사장, 항상 저를 반겨주시니 기분이 좋군요.]
“당연하죠. 제가 매튜 편집장님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으니까요.”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매튜 편집장이 분위기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 CNN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오한결 작가를 담당하던 크리스 본부장이 문화재단에 악감정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마도 문화재단의 과도한 간섭이 그의 심기를 건든 것 같아요.]
신수진 이사장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과도한 간섭이요? 음…… 저희의 선의를 그렇게 해석한다면 좀 서운한데요.”
[뭐…… 만약 제가 담당자였다면 기쁘게 받아들였겠지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니까요. 암튼, 크리스 본부장은 CNN 내부에서 꽤 영향력이 큰 사람입니다. 지금 그를 중심으로 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어요. 아마도 문화재단에 영향력을 가할 계획을 꾸미고 있는 듯 합니다.]
매튜 편집장의 말을 곱씹어본 신수진 이사장이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네요. 혹시 오한결을 볼모로 무슨 짓을 벌인다면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그래서 옛정을 생각해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조심하시라고.]
“오호호호.”
갑작스럽게 신수진 이사장이 박장대소를 하자, 매튜 편집장이 놀라 물었다.
[신수진 이사장님? 괜찮으신 건가요?]
“물론이죠.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오늘 회의 때도 저희 담당 팀장의 표정에서 당혹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내린 결정에 불안감을 느낀 거겠죠. 그리고 연이어서 매튜 편집장이 이렇게 전화로 자세한 내막을 알려주시니 이제 확신이 생겼어요.”
[……뭘 말입니까?]
“좋습니다. 인정하지요. 저의 적극적인 지원이 CNN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오한결 작가를 위한 행동인 만큼 후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크리스 본부장에게 알려주세요.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없지만 오한결 작가와 문화재단에 조금이라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면 그 즉시 혹독한 결과를 맛볼 거라는 사실을요!”
강력한 신수진 이사장의 경고에 매튜 편집장이 생각에 빠졌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신수진 이사장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자신감 하나는 엄청나구나.’
* * *
크리스티 아시아 지부장실.
소피아 지부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방금 한국으로 출장 다녀온 천재 신입 에밀리를 바라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에밀리는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애를 태우던 소피아 지부장이 그녀를 재촉했다.
“그래, 한국은 어땠나? 빨리 얘기해 봐, 에밀리.”
며칠 전 에밀리는 두꺼운 오한결 작가 보고서를 작성해서 소피아 지부장에게 보고를 했다. 현재 오한결 작가의 배후로 문체부 이상민 장관이 유력하며 그를 만나 설득한다면 교육방송 그림 3점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적혀 있었다.
소피아 지부장은 보고서를 읽자마자 그 자리에서 에밀리를 한국에 보내 이상민 문체부 장관을 만날 것을 지시했다.
에밀리가 뜸을 들이자 소피아가 더 조급해졌다.
“어서! 에밀리. 빨리 말해봐. 이상민 장관을 잘 설득했나?”
“모든 건 계획대로 이뤄졌습니다.”
소피아가 기쁨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래? 역시 에밀리는 대단해. 그렇다면 오한결의 3점의 작품을 크리스티에게 넘기겠다는 약속도 받았겠지?”
에밀리는 대답 대신 선글라스를 벗었다. 의외로 그녀의 눈은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게……. 워낙 완고해서 약속까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상민 장관이 말하길 본인은 오한결과 둘도 없는 예술적 동지이며, 교육방송 그림의 절대적 영향력을 끼쳤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그를 모델로 그린 절규의 작품을 그의 집에서 직접 봤습니다.”
소피아 지부장이 흥분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직접 봤다고? 그럼 이상민 장관이 그 작품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구나!”
소피아 지부장을 따라 에밀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맞습니다. 오한결 작가와 각별한 사이가 아니라면 절대로 그 그림을 주지 않았을 테지요. 상상해 보십시오. 이상민 장관 본인 집에 세계적인 작품이 걸려있는 모습을요.”
소피아 지부장은 자신의 집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생각했다. 물론 좋고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오한결 작품과 비교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자신의 집에 오한결의 작품이 걸린다면, 그거야말로, 인생 최고의 순간이지 않을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웃음을 흘리고 있는 소피아 지부장을 에밀리가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더 좋은 소식은 아직 소더비가 이상민 장관에게 접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화재단인가, 거기에 집중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판단 착오로 보입니다.”
“우하하하. 소더비. 그럴 줄 알았지. 미술 시장은 정보전이야. 얼마나 정확한 정보로 빠르게 움직이느냐가 성공의 핵심이지. 그런 면에서 소더비는 이상민 장관의 존재를 모르는 게 분명해. 우하하하.”
에밀리는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한결 작가가 한국에 돌아오면 이상민 장관이 크리스티에 작품을 넘길 수 있도록 잘 말해주기로 했습니다. 일단 뉴욕 출장을 끝내야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피아가 은근히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이상민 장관의 말을 신뢰할 수 있겠지?”
“저는 그렇게 전문적이고 신뢰할 만한 사람을 처음 만나봤습니다. 이상민 장관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것입니다.”
“좋았어! 당장 이사회에 보고 드리고, 우리 회원들에게도 곧 크리스티가 오한결 작가 그림을 단독으로 경매에 부친다고 통보해!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지!”
두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있을 커다란 성공을 상상하며 즐겁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며칠 후 있을 오한결 작가의 빅스퀘어 퍼포먼스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그제야 소피아 지부장은 CNN의 크리스 본부장이 연락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크리스 본부장이 무슨 일일까?”
모든 것을 꿰뚫고 정확히 판단하는 에밀리를 바라보며 소피아가 물었다.
소피아는 잠시 눈을 감고 최근 오한결 주변으로 일어나는 각종 정보를 종합한 뒤 자신 있게 대답했다.
“크리스 본부장은 분명 오한결 때문에 전화를 줬을 것입니다.”
“그래, 그럴 거야! CNN이 단독으로 그의 퍼포먼스를 방송한다고 들었거든.”
“그겁니다! 오한결 작가의 퍼포먼스 작품을 크리스티에게 넘기려고 하는 거죠!”
“근거는?”
“……크리스 본부장은 크리스티의 단골 고객이니까요?”
“아! 그렇구나! 내가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어. 역시 에밀리는 천재야!”
자신감을 되찾은 에밀리는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끼고 말했다.
“제가 크리스 본부장과 미팅 날짜를 잡아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몹시 즐거운 상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우하하하.”
* * *
재즈클럽은 오한결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고 촬영까지 마쳤다는 소식에 축제 분위기였다.
오한결은 여기저기서 주는 술을 받아먹으며 그들과 함께 기쁨을 만끽했다.
그의 작품을 실물로 처음 본 강철 지부장은 평소에 과묵했던 모습과 다르게 수다쟁이가 되어 이러쿵저러쿵 그림에 대해 떠들기 바빴다.
상사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최하늘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려고 했다.
그런 광란의 파티도 저녁 12시가 넘어가자 조금씩 차분해졌다. 모두들 기분 좋은 얼굴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각자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강철 지부장은 오늘따라 오한결을 물고 늘어지며 그의 작품 이야기에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최하늘이 옆에 앉은 리나에게 말했다.
“작품이 완성되니까 그래도 한시름 놓았어요. 오늘 참 기분 좋은 날이네요.”
하지만 리나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말을 하지 않고 술만 마시고 있었다. 최하늘은 그런 리나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왜요? 무슨 걱정 있나요?”
“사실은 좀 이상해서요. 오한결 작가님 작품이 나올 때 배경으로 제가 노래를 부르기로 돼 있지 않나요?”
“네, 그렇죠.”
리나가 답답했는지 아예 몸을 돌려 최하늘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왜 저한테는 작품을 보여주지도 않는 거죠? 저보고 그날 기계처럼 노래만 부르라는 건 아니겠죠? 저도 예술가예요. 그림에 맞는 노래를 부르려면 그림을 이해하고 온전히 느껴야 한다고요.”
리나의 말을 듣던 최하늘이 그녀를 안심시킬 만큼 환하게 웃었다.
“오해에요. 리나의 노래는 5분이잖아요. 오한결 작가님이 그림을 오늘 몇 시간 그린 줄 알아요? 무려 12시간을 그렸어요. 우리는 그 12시간을 잘 편집해 5분으로 줄이고 있어요. 완성되면 당연히 리나에게 보여줄 거고요. 그럼 그걸 보고 노래를 불러주시면 돼요. 노래는 오로지 리나 취향으로요. 그게 오한결 작가님의 뜻입니다.”
“아……. 제가 오해를 한 것 같네요.”
민망해진 리나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좀 별로였죠. 오늘 같은 날 분위기 깨는 소리나 하고.”
“아니에요. 설명을 미리 안 드린 제 잘못이 커요. 호호.”
잠시 고민하던 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 말했다.
“좀 늦었지만 오늘은 오한결 작가님의 작품 완성을 축하하는 자리잖아요. 그럼 저도 오한결 작가님을 위해 선물 하나 드릴게요. 제가 아끼는 제 자작곡이랍니다.”
리나가 미끄러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재즈클럽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오한결에게 무척 깊고 진득한 눈빛을 보내며 노래를 시작했다.
“바람에 일렁이는 푸른 마음이랴…….”
모두 그녀의 노래에 빠져가고 있을 때쯤, 최하늘만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오한결 작가님을 바라보는 리나의 저 아련한 눈빛. 문제가 많아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