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52화 (152/202)

제152화 든든한 후원자

며칠 전 노을이 옥탑 작업실에서 ‘야옹이 마을’ 관련 작품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글로벌애니멀 팀장 이재정입니다. 노을 작가님 맞으신가요?]

노을은 ‘글로벌애니멀’이라는 단체명을 듣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곳은 최근 몇 년 전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동물단체들이 힘을 합쳐 만든 동물보호단체다.

유럽 동물 선진국을 중심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동물단체들이 국제기구를 만들어서 전 인류에게 동물권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만든 최초이자 최고의 단체였다.

글로벌애니멀은 동물과 관련된 국제적 여론을 만들고 필요하다면 세계 여론을 움직여 동물보호가 약한 나라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전화가 오다니, 노을의 마음이 설렐 수밖에 없었다.

노을은 터질듯한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네. 제가 노을인데요. 정말 글로벌애니멀 맞나요?”

[네! 저희는 이번 ‘모던아트’ 인터뷰 기사를 보고 너무 감동해서 노을 작가님께 연락드리게 됐는데요. 혹시 시간 되면 저희 쪽에 방문해 주시겠어요?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렇게 노을은 글로벌애니멀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긴장해 얼굴이 잔뜩 굳어진 노을이 유리문 앞에서 서성이며 발을 머뭇거렸다.

‘정말 내가 자격이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을 수없이 되뇌며 고민에 빠진 노을의 어깨를 누가 뒤에서 툭 쳤다.

“혹시, 노을 작가님 맞으신가요?”

깜짝 놀란 노을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아! 네. 제가 노을이에요.”

“너무 반가워요. 저는 글로벌애니멀 팀장 이재정입니다. 호호. 근데 오셨으면 사무실로 들어가시지, 왜 이러고 계세요?”

“아, 저랑 통화했던 팀장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그게…….”

이재정 팀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문을 열고 노을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어서요. 모두 기다립니다.”

긴장해서 주춤했던 노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들이 노을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어주었다.

“와! 잡지에 나왔던 그 멋진 작가님이군요!”

“너무 반갑습니다. 환영해요!”

한눈에 봐도 대략 열 명 정도 돼 보이는 직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노을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노을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벅찬 감동을 느꼈다.

‘정말로 나를 기다린 거야? 팀장님 말이 맞는구나!’

무명작가에 불과한 노을에게 이런 환대는 실감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녀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국제적 영향력과 단체의 규모에 비해 사무실은 무척 소박하게 보였다.

깔끔하긴 했으나 사무공간은 몹시 좁아 보였고 딱 사무에 필요한 사무용품 외에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엄청난 기부금과 후원금이 모이는 거로 아는데. 의외네.’

노을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리번거리자 이재정 팀장이 그녀의 생각을 읽고 대답했다.

“글로벌애니멀은 오직 동물들을 위해 돈을 쓰는 곳이에요. 멋진 건물을 짓거나 화려한 홍보를 하기보다 정말 필요한 동물이 있는 곳에 달려가는 걸 택한 거죠.”

“아! 너무 멋져요. 정말 이상적인 장소 같아서 기분이 좋아지네요.”

회의실로 안내된 노을은 글로벌애니멀 활동 현황 관련 책자를 읽고 있는데, 이재정 팀장이 긴 수염을 기른 장발의 남성을 데리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는 미디어를 담당하고 있는 조원재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노을입니다.”

이재정 팀장이 조원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재 씨가 노을 작가님을 무조건 추천했어요. 꼭 만나서 우리 단체의 미래에 대해 논해야 한다고요. 전화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동물보호단체로서 일선에서 수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동물에 대한 인식을 확실하게 개선할 방법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해답으로 예술의 힘을 믿기로 했답니다.”

조원재가 뒤이어 말을 이었다.

“학대로 보통 받는 동물을 구조하고 법과 사회구조를 바꾸는 게 우리의 최종 목표지만 사실 예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캠페인을 벌이고 때로는 각국 정상들에게 강경한 어조로 동물의 존엄성을 외쳤지만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더라고요. 상당히 복잡한 국제 정세와 각국 내부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더 급했던 거죠.”

이재정 팀장이 노을을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시민들의 삶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동물은 하나의 생명이고 우리와 함께하는 친구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인식이 뿌리 깊게 내릴 때 진정한 동물보호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할을 예술이 해줬으면 해서요.”

너무나 거창한 두 사람의 말에 노을이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거창한 예술을 보일 능력이 없는걸요. 찾아보시면 굉장히 유명한 작가들도 많을 텐데요. 왜 하필 저를…….”

순간 이재정 팀장과 조원재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이재정 팀장이 대답했다.

“저희는 모던아트 기사를 보고 너무 감동해서 직접 ‘야옹이 마을’에 방문했습니다.”

“네? 정말요?”

“그럼요. 앞으로 저희와 함께 일할 작가님에 대해 알아보는 게 저의 일인데요. 그리고 노을 작가님의 작품들을 모두 검색해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그 말에 노을이 자신감을 잃은 듯 옅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무척 인상적이고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글로벌애니멀은 앞으로 노을 작가님을 우리 단체와 함께 일할 작가님으로 선정하게 됐어요. 부디 저희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님!”

믿기지 않는 소식에 노을이 입을 쩌억 벌렸다. 누군가가 이건 꿈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단체와 함께 일을 하다니 말이다.

노을이 뛸 듯이 기뻐하며 대답했다.

“저도 항상 동물보호와 관련된 예술활동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단순하게 약한 동물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는 주제로 작품을 만들 수는 없었어요. 그건 너무나 일차원적이고 그런 피상적인 작품으로는 감동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역시 그러셨군요.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서 저희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꼭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노을 작가님이 동물보호 관련 예술을 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지원을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모든 정보와 필요하다면 재정적 지원도 할 거고요.”

“너무 잘 됐네요! 사실 안 그래도 해산 군청에서 작품 의뢰를 받았거든요. 어떤 작품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이미 글로벌애니멀 직원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뭐든지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날아갈 것 같은 노을이 무심코 말을 던졌다.

“빨리 이 기쁜 소식을 뭉치에게 말해줘야겠어요. 호호.”

“뭉치도 좋아할 겁니다. 참, 뭉치가 가지고 놀만한 고양이 장난감을 준비했어요. 뭉치가 좋아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글로벌애니멀 직원들과 노을은 대략 한 시간 가량 동물보호 정책에 대한 얘기와 더 나아가 최무열, 서정익 작가에 대한 얘기까지 나누게 됐다. 물론 오한결도 꼭 빠지지 않는 대화 주제였다.

글로벌애니멀 사무실을 빠져나온 노을이 집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창밖을 내다보며 고층빌딩이 즐비한 서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무열이랑 서정익 작가님도 잘 알고 계시네. 하긴, 잡지에 함께 나왔으니까. 헤헤. 무엇보다 오한결 작가님 얘기할 때 팀장님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던데, 뭐 워낙 유명하시니까. 아, 나도 유명해지고 싶다!’

그렇게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파이팅을 외치던 노을은 부지런히 옥탑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 문을 열자 자고 있던 뭉치가 반가운 노을을 보자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가 안겼다.

“뭉치! 선물 갖고 왔어! 짜잔!”

귀여운 생선 모양의 장난감을 꺼내 휘두르자 뭉치가 소리를 질렀다.

이야옹!!

현란한 솜씨로 뭉치와 놀아주던 노을은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재정 팀장님이 뭉치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나는 어디에서도 이름을 말한 적이 없는데…….’

노을이 사료통에 얼굴을 박고 있는 뭉치를 보며 불안함을 느꼈다.

‘뭐야? 그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지?’

노을은 무심코 고개를 들고 자신을 지켜보는 카메라가 없는지 작업실 모퉁이를 이리저리 살폈다.

‘아, 내가 너무 오바하나…….’

* * *

문화재단 뉴욕지부 3층 스튜디오.

오한결이 붓을 들고 대형 캔버스 앞에 서 있다.

이번 빅스퀘어 빌딩 작품은 오한결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 그걸 녹화해 대형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한국 교육방송에서 최고 수준의 오한결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실시간으로 그려서 시청들에게 감동을 일으킨 점을 참조한 것이다.

사실 이런 방식을 먼저 제안한 건 로건이었다.

그는 오한결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뉴욕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그들에게 최고의 선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빅스퀘어 빌딩에서 보여주면 더욱 멋질 것이고!

오한결이 캔버스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지만 붓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무언가 잘못됐나 싶어 최하늘이 초조하게 물었다.

“작가님, 왜 그림을 안 그리세요?”

오한결의 눈이 빈 캔버스를 스치며 대답했다.

“일단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어요. 어디에 무슨 색으로 어떤 형태를 그러야 할지, 그걸 다 계산해야 하거든요. 사실 페인팅 작업은 그런 작품 작업을 끝낸 후 하는 후속처리에 불과하답니다.”

최하늘 옆에 서 있던 로건과 강철 지부장은 오한결의 말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게 비밀이었구나. 작품이 머릿속에서 완성되다니. 그러니까 붓을 든 오한결이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빠른 시간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구나.

그간 오한결이 그린 수많은 명작이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완성됐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로건은 긴장한 듯 두 손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오늘 그 천재적 능력을 눈앞에서 보게 되겠군요.”

잠시 뒤 오한결이 붓을 잡은 손을 움직이게 시작했다.

아주 느리게, 그리고 정교하게 커다란 흰색 캔버스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찍는 30대의 카메라들.

여기저기서 카메라 녹화를 알리는 붉은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최하늘이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근데 모든 카메라가 문화재단 건데요? CNN에서 단독 방송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이에요? 그러고 보니 촬영 장소도 문화재단 스튜디오네요.”

강철 지부장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최하늘 씨가 워낙 바빠서 아직 얘기를 안 했네요. 하늘 씨 말이 맞아요. 오늘은 CNN이 사전 녹화를 하는 날이고 그걸 퍼포먼스 행사 때 단독 영상으로 쓰기로 했거든요. 물론 행사 날 타임스퀘어 중계권도 CNN이 가져가고요. 근데 사정이 생겼습니다.”

최하늘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에 CNN이 어떤 사정이 생겼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그런 최하늘의 궁금증을 이해한 강철 지부장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물론 CNN도 최고 수준의 영상 장비와 편집 기술을 자랑하고 있지만 솔직히 장비로 따진다면 문화재단이 더 뛰어나고 고급 편집 기술자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오한결 작가 작품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요. 그래서 문화재단이 CNN에게 사전에 점검 사항을 보내고 부족한 부분은 문화재단이 보충해주겠다고 했더니 결국 이렇게 촬영 일에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로건이 오한결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CNN이 단단히 화가 난 거죠. 자존심이 상했다고 할까요?”

곰곰이 생각한 최하늘이 대답했다.

“간섭이라 여긴 걸까요? 근데 오한결 작가님의 작품을 최고 수준의 영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도움이 당연히 받아야 하지 않나요?”

최하늘의 말을 들은 로건이 잠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구나. 후훗.’

강철 지부장은 CNN이 행사 당일 중계권은 절대 포기할 리가 없기 때문에 일단 이 문제는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행사 당일에 빅스퀘어 빌딩 전광판도 문화재단 기술자들이 담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하늘은 로건을 슬쩍 보며 물었다.

“CNN이 꽤 고자세로 나오네요. 반면에 로건은 협조적이고요. 근데 자존심 상하지 않으세요?”

무심코 말을 뱉은 최하늘이 곧바로 자신이 심각한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입이 방정이야! 어쩌지…….’

하지만 로건은 그녀의 말을 못 들었는지, 표정 변화 없이 오한결이 그림 그리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옅은 하늘색을 칠한 바탕 위로 흰 물감이 섬세하게 툭툭 칠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로건이 입을 열었다.

“저 그림을 보세요. 저런 훌륭한 작품 앞에서 무슨 자존심 따위가 중요합니까? 저는 빅스퀘어 빌딩에서 오한결 작가의 작품이 최고 수준으로 보여지기를 원합니다. 그거면 됐어요.”

로건의 말에 노을과 강철 지부장은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만족한 가운데, 세 사람은 오한결의 그림 그리는 모습에 빠져 그렇게 6시간을 서서 그림을 관찰했다. 그리고 수십 대의 최고 사양의 카메라는 오한결의 모습을 360도 어디에서든 완벽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한참 후 그림의 윤곽이 어느 정도 나오자 로건이 중얼거렸다.

‘저 멋진 그림이 드디어 며칠 후면 빅스퀘어 빌딩에서 공개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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