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비 오는 날
황량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슬럼가 ‘뉴원 애비뉴’거리에 수십 대의 경찰차가 위협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평소에 거리에서 시시덕거리며 수다를 떨던 갱들도 오늘따라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들이 뉴원 애비뉴 거리를 곳곳을 살피고 있을 때 거대한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거리로 들어와 정차했다.
차량 문이 열리자 토마스 청장과 오한결, 최하늘, 그리고 윌리가 차례로 내렸다.
한껏 들뜬 표정의 토마스 청장이 오한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작가님과 예술 투어를 하다니요. 꿈만 같습니다.”
뉴욕에서 가장 위험한 동네였지만, 토마스 청장이 방문한 지금은 뉴욕에서 가장 안전한 동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록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오한결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저 역시 청장님과 함께해서 기쁩니다.”
그 말을 들은 토마스 청장은 뛸 듯이 기뻐했다. 항상 명성이 자자한 예술가들이 초대된 행사에 가면 멀찌감치 그들을 보거나 가끔 악수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는데,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가와 이렇게 단둘이 있다니.
토마스 청장은 벅찬 감동을 잠시 누그러뜨리고 최대한 위엄 있게 말했다.
“지난번 뉴욕 지하철 사건은 뉴욕을 대표해 사과드립니다. 제가 책임지고 그 무책임한 두 사람을 꼭 잡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건 청장님께서 알아서 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이, 여전히 겁을 잔뜩 먹은 윌리가 최하늘 옆에 바짝 붙어서 뉴원 애비뉴를 관찰하고 있었다.
일단 경찰이 많은 점은 합격이지만 갱들이 언제 어디서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쉽게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윌리를 보며 최하늘이 물었다.
“왜 자꾸 옆으로 붙어요?”
이제 완전히 최하늘과 어깨가 닿았다는 것을 깨달은 윌리가 재빨리 거리를 두며 대답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그쪽에 관심 없으니까.”
“뭐에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뭐, 제가 방귀를 뀌었다고요?!”
“아니, 됐어요. 한국 속담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두 사람은 평소처럼 투닥거렸을 뿐인데 윌리는 한결 자신의 긴장감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윌리가 편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타이론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는 거예요? 빨리 안내해 주세요.”
“기다리세요. 청장님이 움직여야 가지 않겠어요?”
토마스 청장은 오한결에게 자신이 이곳 슬럼가를 위해 어떤 일을 해왔는지 장대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오한결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여기 뉴원 애비뉴는 외부적으로 뉴욕의 대표적 슬럼가이지만, 제가 재임하면서 치안이 좋아지면서 마약과 범죄가 확인이 줄어들었습니다. 하하. 보세요, 이렇게 거리에 있어도 어떠한 위협도 느껴지지 않잖아요.”
그거야 당연히 청장이 경찰들을 동원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지만 오한결은 최대한 청장의 말에 동조해줬다.
“그렇군요. 역시 치안을 중시하시는 청장님답습니다. 멋져요.”
더 기분이 좋아진 토마스 청장은 오한결과 함께 타이론의 그림이 그려진 벽쪽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은 본 최하늘과 윌리도 재빨리 그들 뒤를 쫓았다.
토마스 청장의 경호를 맡은 경찰들도 무전기로 연신 상황을 주고받으면서 경찰 인력들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오한결은 지난번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만났던 흑인 할머니가 길가 의자에 차분하게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 기억나나요?”
“그럼, 똘똘하게 생긴 청년을 어찌 잊어버릴까. 근데 우리 마을에 큰일이라도 난 거야?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많은 경찰은 처음 봤어.”
할머니가 걱정과 불안감을 보이며 말하자 오한결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니요. 오늘은 좋은 일로 왔어요. 타이론의 작품을 청장님과 구경하러 왔거든요.”
“아하! 우리 리틀 바스키아 말이군. 그 아이가 어려서부터 워낙 그림을 좋아하더니 결국 이렇게 성공했구먼.”
조용히 얘기를 듣던 토마스 청장이 끼어들었다.
“말로만 듣던 타이론 학생의 할머니 되시는군요. 참 기특한 손자를 두셨어요.”
할머니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엄연히 내 손자는 따로 있으니까.”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군요. 손자분께도 죄송하네요.”
“그럼 당연히 미안해해야지! 누구 때문에 우리 손자가 그 고생인데!”
할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던 토마스 청장이 그 이유를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 손자를 잡아갔잖아! 그 아이는 아무 죄가 없어!”
토마스 청장이 당황스러워하자, 뉴원 애비뉴 사정을 잘 아는 경찰이 급히 다가와 상황 설명을 했다.
“할머니 손자는 최근 마약과 절도로 교도소에 수감 중에 있습니다.”
“뭐야! 근데 억울하다고?”
그 말을 옆들은 오한결은 재빨리 토마스 청장을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오한결이 할머니를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할머니, 그럼 저희는 가볼게요.”
“타이론에게 좋은 기회를 줘서 고마워, 청년.”
그렇게 오한결은 일행을 데리고 낡은 건물을 돌아 음습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지저분한 벽 앞에 서더니 토마스 청장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여깁니다.”
찝찝한 기분으로 표정이 굳어진 토마스 청장은 작품 앞에서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래된 회색 벽에 그려진 어린아이 같은 낙서라니?
‘지금 장난하나?’
토마스 청장은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꽤 오묘하군요. 오한결 작가님이 보시기에 어떠십니까?”
“훌륭한 예술 작품입니다. 풍부한 색감과 무엇보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찾을 수 없는 자유로움이 묻어나요. 솔직히 이건 재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토마스 청장 옆에 선 최하늘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작품을 바라봤다.
‘도저히 나는 이해할 수 없네. 이건 그냥 낙서잖아.’
반면, 윌리는 갑자기 나타날 갱들이 무서워 최하늘 뒤에 바짝 붙고는 고개만 빼꼼 내밀고 타이론의 낙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타이론의 작품에 감동을 받은 윌리는 두려움 따위는 잊고 예술적 아우라에 심취해 버렸다.
‘짜식, 맞네. 천재.’
오한결은 윌리의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윌리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타이론의 재능이 언젠가 꽃피울 수 있도록 윌리가 그의 뒤를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윌리는 그림에 푹 짜져 있어서 오한결을 바라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야죠. 타이론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두 사람의 훈훈한 대화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청장과 최하늘은 작품을 바라보며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저게 낙서지 왜 예술이야?’
잠시 뒤 토마스 청장이 오후 일정 때문에 뉴원 애비뉴를 빠져나가려고 하자, 오한결과 최하늘, 윌리도 급히 청장을 따라 길을 나섰다.
“아니, 왜 더 구경하고 가시죠. 저는 급한 회의가 있어서 가는 겁니다.”
토마스 청장이 이렇게 말하자, 오한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우리도 급히 갈 데가 있어서요. 하하. 그렇죠?”
공포에 질린 최하늘과 윌리는 오한결의 말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급한 일이 생겼네요. 하하. 빨리 여길 나가야겠어요.”
경찰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뉴원 애비뉴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다시 돌아왔다. 윌리가 벌벌벌 떨며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저 멀리 건물 3층 창문에서 윌리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햇빛에 반짝였다.
“!!”
윌리가 용기를 내서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빼들자, 창문 속 남자는 손가락으로 윌리를 가리켜 악랄한 미소를 지었다.
“으악! 총이다! 다들 피해!”
윌리가 소리치자 토마스 청장과 오한결, 최무열은 급히 방탄 차량으로 뛰어 들었고 윌리도 허겁지겁 들어온 후 차 문을 닫았다.
“윌리, 무슨 일이에요!”
너무 겁에 질린 윌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계속 벌벌 떨기만 했다.
잠시 뒤 주변 경계를 마친 경찰이 다가와 청장에게 보고했다.
“주변은 안전합니다. 아마 이분이 뭔가를 잘 못 보지 않았을까요?”
모두 윌리를 쳐다봤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떨고 있었다.
‘아이고, 이 쫄보!’
그날만큼은 최하늘도 윌리를 무척 애처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먹구름이 잔뜩 낀 서울의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양승호 비서와 이풀잎은 자주 가는 파전집에 들어가 평소 먹던 동동주와 파전을 시켰다.
비는 점점 굵어지더니 기어이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창밖을 바라보던 이풀잎은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첫 데이트 때도 비가 오지 않았나요? 그때 사진전도 보고 재밌었는데.”
“맞아요. 비가 많이 왔었죠. 근데 저는 그게 싫지 않아요. 이렇게 풀잎 씨랑 파전 먹으러 오는 게 행복하거든요.”
창밖을 쳐다보던 이풀잎이 고개를 돌려 양승호 비서를 바라봤다.
“고마워요. 저도 사실 그래요. 호호.”
잠시 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전이 나오자, 양승호 비서와 이풀잎이 배가 고픈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맛깔나는 동동주까지 들이키자 배도 부르고 나른한 게 기분이 좋아졌다.
술 때문에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이풀잎이 양승호 비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때 그건 어떻게 됐어요? 문화재단하고 CNN이 서로 으르렁댄다면서요. 원래는 협력 관계 아닌가요?”
“협력관계죠. 근데 이번만큼은 문화재단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여요.”
“CNN이면 굉장히 유명 방송국인데 문화재단이 뭘 할 수 있어요? 그것도 사실 이해 안 가요.”
양승호 비서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자, 이풀잎이 살짝 언짢은 말투로 물었다.
“뭐에요. 나만 모르는 또 뭔가가 있어요?”
“하하. 오해에요. 그런 질문이 무척 귀여워서요.”
“어머…….”
“명일그룹과 문화재단은 사실상 하나라고 보면 돼요. 신수진 이사장님이 명일그룹 회장 딸인 점도 사실상 그 증거구요.”
“그건 알고 있어요. 근데 문화재단은 단순하게 문화 사업과 복지 그런 업무를 하는 곳 아닌가요?”
“그렇죠. 표면적으로는.”
“네? 그게 무슨……?”
“명일문화재단은 10년 전부터 막대한 자금력으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왔어요. 아주 조금씩 그러나 단단하게 입지를 굳힌 거죠. 지금은 세계 유수의 예술대를 포함해 전 세계 예술 단체와 아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답니다.”
“네트워크가 있다는 얘기네요. 근데 그건 결국 친분 정도에 지나지 않나요?”
양승호 비서가 남은 파전 한 조각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삼킨 후 말했다.
“아니요, 단순한 친목 모임을 위한 친분이 아니에요. 제가 말했잖아요. 막대한 자금력!”
“아……. 돈으로 맺어진 관계?”
살짝 혼란스러운 표정의 이풀잎을 보며 양승호 비서가 씨익 웃었다.
“사실 금전적 지원으로 엮인 건 맞아요. 하지만 그 목적은 진정한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한 순수한 마음이거든요. 예술가를 위해 절대 돈을 아끼지 않죠.”
양승호의 말에 이풀잎이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신인 작가인 오한결을 후원하기 위해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의 적극적인 구애가 있지 않았던가. 명일그룹 회장이 이럴 정도인데 실제로 문화산업을 지원하는 문화재단이면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긴, 생각해 보니까, 맞는 말인 것 같네요.”
“하하.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명일그룹과 재단은 전 세계 유명한 예술단체와 학교에 많은 장학사업과 예술인 지원 사업을 꾸준히 해왔어요. 실질적으로 단체의 운영과 작가의 생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죠.”
그 말에 이풀잎이 깊이 감명 받았다. 사실 많은 기업들이 예술인 지원 사업 명목으로 투자를 하지만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턱없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명일그룹은 그 한계를 넘어 그들의 생계를 책임질 정도라 했다.
양승호는 이풀잎의 다양한 표정을 흥미롭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전 세계 예술계에 주요 요직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어요. 그들은 또 다시 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신진 예술가 발굴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고요. 이런 선순환을 통해 맺어진 명일문화재단과 전 세계 예술인의 친분은 아주 끈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풀잎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그렇겠네요.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있어요. 그 친분으로 CNN을 상대할 수 있나요?”
“예술인들은 문화재단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그런 문화재단에 CNN이 악의적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많은 예술단체와 예술인들이 CNN에 등을 돌리게 되겠죠.”
“아…… 소름. 그럼 CNN은 무슨 타격을 받죠?”
잠시 머뭇거리던 양승호 비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CNN은 문화예술 관련 독점 뉴스를 할 기회가 없어지는 거죠. CNN 명성에 엄청난 타격이 갈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이풀잎이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기분 좋게 웃으며 동동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잘됐네요. 문화재단이 CNN을 좀 혼내줘도 좋을 것 같아요.”
“CNN이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신수진 이사장님을 화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분은요,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분이거든요.”
이풀잎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포스가 장난 아니신 분. 어우, 생각만 해도……. 춥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