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은밀한 제안
크리스 CNN 본부장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세 명의 비서가 그에게 정중한 예의를 표한 뒤 로건 CEO에게 안내했다.
“로건! 잘 지냈지요?”
전 세계 10대 기업 대표지만 20대 청년답게 로건은 청바지를 입은 자유로운 복장으로 손님을 맞았다.
“와우! 크리스 본부장님. 이렇게 찾아주시니 영광입니다.”
크리스 본부장은 로건의 학교 선배로 일명 전설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특히 뛰어난 지능과 언변으로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력을 발산해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찾기 드물었다.
그가 미국 주요 언론사인 CNN에 입사해 결국 본부장 자리까지 올라간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로건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크리스 본부장은 로건의 책상에 놓인 문서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혹시 로건도 문화재단에 공문을 받은 것이오?”
“네, 꽤 흥미로운 제안을 하더군요.”
크리스 본부장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오한결 작가에게 최상의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빅스퀘어 빌딩의 스크린 또한 문화재단에서 보증하는 기술자들이 모두 다시 점검하겠다고 하더군요.”
“이런! 어찌 이렇게 무례할 수가.”
하지만 로건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요. 저는 꽤 재밌게 들렸습니다. 오한결 작가가 최고 수준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최고 수준의 스크린에서 그의 작품이 나오게끔 지원해주는 단체라니. 상상이 갑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의 재정 능력을 갖고 있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요?”
“그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페이스픽쳐스라면 이미 최고 수준의 작업 공간과 기술력을 자랑하는 곳 아닙니까? 문화재단 따위가 끼어들 곳이 아니에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로건은 크리스 본부장의 매서운 눈빛을 이겨내며 말을 이었다.
“페이스픽쳐스는 제 개인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행사에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없습니다. 빅스퀘어 빌딩 이벤트는 엄연히 저의 개인적 욕심 때문에 하고 있는 거거든요. 저는 오한결 작가의 예술 작품을 꼭 이 건물에서 보고 싶을 뿐이에요.”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로건을 바라보며 크리스는 그가 참 철이 없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로건이 덜컥 문화재단과 손을 잡게 된다면, 자신도 문화재단의 지휘 아래 방송을 해야하는 끔찍한 결과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제안을 하나 할게요. 로건.”
“네, 말씀해주세요.”
“우리가 오한결 작가를 가집시다.”
크리스의 말에 로건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오한결 작가를 소유하는 겁니다. 이제 오한결은 대한민국, 특히 문화재단을 대표하는 작가가 아니라 뉴욕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는 거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엄연히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인데요.”
크리스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로건은 아직 멀었군요. 작가란 누구나 가슴에 품은 열망 하나쯤은 갖고 있는 법이죠. 그게 경제적 성공이든 순수한 예술적 성공이든.”
“뭐, 그렇겠죠…….”
시큰둥한 로건의 표정을 보며 크리스가 불만을 쏟아 냈다.
“로건은 내 말에 흥미가 없나 보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좀 황당해서요. 뉴욕에서 활동할지는 전적으로 오한결 작가의 선택에 달린 건데, 우리가 뭘 어찌할 수 있나요?”
“제가 말했잖아요. 모든 작가는 경제적 성공이든, 순수한 예술적 성공이든 하나를 바란다고. 그걸 뉴욕시에서 제공하면 됩니다. 오한결 작가가 한국이 아닌 뉴욕에서 활동하는 게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야죠.”
“아……. 그럼 뭐가 좋은데요?”
크리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로건을 째려봤다.
‘이런 멍청이!’
“로건은 오한결 작가의 예술활동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지 않은가요?”
“당연히 보고 싶죠. 이번 뉴욕 출장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텐데, 그럼 언론에서 그의 작품을 보는 게 전부겠죠. 그 점은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한결 작가를 잡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한결 작가가 빅스퀘어 빌딩 한 층을 쓰면서 평생 이곳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모습을요.”
“!!”
“하하하. 이제 좀 이해되시나요?”
“생각만 해도 짜릿하군요. 너무 영광이라 상상만 해도 즐겁네요.”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것 같아 크리스 본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로건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귓속말을 하듯 작은 목소리로 그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로건의 설명을 모두 들은 로건은 기겁할 정도로 눈이 커져 버렸다.
“그건 안 됩니다. 오한결 작가님께 실례를 범할 수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재단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훗.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우리가 문화재단을 가만두지 않을 건데요.”
“이런!! 그런 끔찍한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본부장님도 그만 관두세요.”
완벽한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크리스 본부장이 차오르는 화를 힘겹게 참고 있었다. 더는 로건을 자극해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크리스 본부장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이런, 오한결 작가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 농담을 좀 했더니 오해를 하셨군요. 제 말은 그만큼 너무나 오한결 작가가 탐난다는 얘깁니다. 로건도 그렇지요?”
“……물론 탐이 나는 건 당연하죠. 그는 천재니까요.”
“맞아요. 천재는 언제나 탐나는 법이죠. 하하.”
로건의 사무실을 빠져나온 크리스 본부장은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크리스티에 연락해서 좀 보자고 해. 내가 매력적인 제안을 하나 한다고 전하고.”
* * *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가 붉은 벽돌 건물이 즐비한 주택가를 가로질러 드디어 한 건물 앞에 멈춰섰다.
‘아, 여기가 그 옥탑 작업실이 있다는 곳인가.’
고개를 들고 건물 옥탑을 쳐다보자, 다른 집 옥상과 다르게 확연히 꾸민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특히 해가 서서히 지고 있어서 옥탑 작업실에 설치된 형형색색의 전구들이 기분좋게 반짝이고 있었다.
박수호 기자가 옥탑에 오르자, 평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여기가 노을 작가님 작업실인가요?”
급히 쭈쭈바를 입에서 빼고 노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호호. 카페에서 봐도 되는데…….”
“아니에요. 작가의 작업실은 그 작가의 작품 세계를 말해준다고 하잖아요. 여기와 보니 노을 작가님이 어떤 작품 세계가 있는지 짐작이 가네요.”
박수호 기자는 옥 작업실 한쪽 구석에 쌓인 폐타이어와 거칠고 단단한 작업 재료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노을이 다가와 말했다.
“인터뷰는 안에서 해요. 밖은 좀 춥거든요.”
노을의 안내로 작업실로 들어가자, 한쪽 구석에서 혼자 공을 갖고 놀던 새끼 고양이가 낯선 사람의 모습에 놀라 꼬리를 세우고 울어댔다.
이야옹!
“뭉치야 조용히 해. 손님이야.”
이야옹!
“쉿!”
박수호 기자가 뭉치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자 뭉치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경계를 한 번에 풀어버렸다. 그리고는 박수호 기자 발밑을 빙글빙글 돌며 자신의 호감을 표시했다.
노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쟤는 주인이 누군지는 알까?”
갑자기 서정익 작가가 노을 옆에 다가와 대답했다.
“고양이에겐 주인이 없죠. 자신을 돌봐줄 집사라고 하더라고요.”
“아, 네……. 좋은 정보 감사해요.”
잠시 후, 작업실 중앙에 마련된 원형 테이블에 앉은 서정익 작가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후 인터뷰 준비를 마쳤다.
“자, 사전 질문을 보내드렸는데, 모두 보셨나요?”
노트북에 손을 올리고 박수호 기자가 질문하자 모두 히죽 웃기만 했다.
노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저하고 무열이는 정식 작가는 아니고, 여기 서정익 작가님만 예술계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어서요. 많이 부끄럽습니다.”
“예술계에서 인정한 작가라는 말이 뭐죠?”
“자기 이름을 내걸고 작품 활동하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개인전도 열고 평론가가 평론을 쓰는 작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수호 기자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저는 동의하기 힘든데요. 물론 서정익 작가님은 꽤 유명하신 분이세요. 그걸 부정할 수 없죠. 하지만 노을 작가님과 최무열 작가님도 충분히 작가로 불릴만한 분들입니다. 특히, 화랑거리 파도 작품과 고양이 마을 벽화는 꽤 수준이 높았거든요. 제가 한참을 서서 봤습니다.”
“어머! 고양이 마을에 가셨어요? 거기 엄청 먼데.”
“당연히 가야죠. 기자가 인터뷰하는 작가의 대표 작품을 보지도 않고 인터뷰를 진행할 수는 없죠. 당연한 겁니다.”
최무열이 중얼거렸다.
“오한결 작가님이 함께였다면 아마도 더 멋졌을 거예요. 그건 좀 아쉬워요.”
“아니요. 오한결 작가님과 상관없이 세 분은 완벽한 작품을 만드셨어요. 사실 두 분의 존재를 예전부터 알고 있긴 했어요. 하지만 그땐 오한결 작가님을 보조하는 학생으로만 알고 있었죠. 어느덧 이렇게 성장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네요. 오한결 작가님도 기쁘겠어요.”
박수호 기자의 진심 어린 칭찬에 노을과 최무열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본 서정익 작가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간 뒤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어떤 목적으로 고양이 마을을 찾았고 거기서 보여준 작품은 무슨 의미인가요?”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노을이 대표로 대답했다.
“사실 제가 먼저 가자고 했거든요. 오래전부터 동물 보호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작품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해서 자료 조사 겸 고양이 마을을 찾은 거예요. 처음부터 거기 사시는 할머니 집을 꾸며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요.”
“동물 보호라. 좋네요. 그럼 새끼 고양이 휠체어는 누가 만들었나요?”
“제가 만들었어요.”
서정익 작가가 수줍어하면서 대답했다.
“할머니 말로는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서 새끼 고양이가 마음껏 뛰어놀고 있다고 하네요.”
“아, 그래요? 잘됐네요. 헤헤.”
좀처럼 보기 힘든 서정익 작가의 쑥스러운 표정에 노을과 최무열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박수호 기자가 노트북에 타이핑하면서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노을 작가님이 동물 보호를 주제로 작품 소재를 찾던 중 우연히 고양이 마을을 발견하고 최무열, 서정익 작가와 동행한 거군요. 거기서 고양이를 돌보는 할머니 사정을 듣고 자발적으로 집과 담벼락을 꾸며준 거고요. 그리고 할머니가 보살피는 장애를 가진 고양이에게 휠체어도 만들어 줬고요.”
모니터를 바라보던 박수호 기자가 고개를 들고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를 번갈아 쳐다봤다.
“여기서 중요한 게 뭔지 아나요? 바로 오한결 작가 없이도 여러분은 최고의 작품 활동을 했다는 거예요. 특히 서정익 작가님이 주축이 되어 움직였다면 모를까, 노을 작가님이 주축이 되어 이런 성과를 냈다는 건 이미 작가로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칭찬을 들은 노을은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뭉치가 번쩍 뛰어올라 노을 품에 안겼다.
야옹!
서서히 인터뷰를 마무리해갈쯤 박수호 기자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배우 기분 좋은 인터뷰였습니다. 근데, 조금 아쉬운 데요. 뭐랄까, 이렇게 작품이 SNS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그 이후 작품은 여전히 미정인가요?”
최무열이 노을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말했다.
“누가 그거 말해줘. 군청 그거.”
“아!”
노을이 눈을 크게 뜨며 말을 이었다.
“고양이 마을 작품을 보고 해산 군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군청에서 충분히 지원을 할 테니 고양이 마을을 상징하는 작품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요.”
“오호라! 해산 군청이면 잘 알죠. 남해 쪽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지역을 알리는 예술 작품을 많이 만들거든요. 그래서 해산 군청은 작가를 고를 때 꽤 까다로운데, 제안을 받다니 정말 실력을 인정받았군요.”
“어머, 그래요? 거기까진 몰랐어요.”
“그래서 무슨 작품을 만들 거예요? 고양이 마을 홍보용 작품이라면 뭐가 좋으려나.”
노을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우린 홍보용 작품을 만들 생각이 없어요. 처음부터 동물 보호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려고 했으니, 고양이 마을에 동물 보호를 상징하는 작품을 만들 거예요.”
“정말 좋네요. 하지만 걱정되는 점은 과연 해산 군청도 동의를 할까요?”
노을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설득해야죠. 저는 자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