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비열한 미소
윌리가 상당히 집중하는 표정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무슨 일이야. 뉴욕 타임즈가 엄청 관심을 갖네.’
윌리의 시선은 뉴욕 타임즈에 실린 사진에 머물렀는데, 그 사진은 뉴욕 지하철의 벽면에 어린아이 낙서 같은 그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 설마 이 작품은…….’
어린 아이같은 시선에서 그린 두 명의 인물.
흥미로운 시선과 악마 같은 짓궂음이 드러나는 두 사람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당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뉴욕 타임즈는 순수한 작가의 시선이 인종차별이라는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문제를 과감하게 사회적 이슈로 쟁점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윌리는 스크롤을 내려 수만 개 이상이 달린 댓글을 확인했다.
「저 그림 실제로 보면 완전 빨려들어감. 압도적이란 말도 아깝지 않음.」
「말도 안 돼. 저게 예술품이면 내가 어릴 적 그림 팔면 나는 부자 됐을 듯.」
「예술의 세계란 오묘한 것이여.」
「그지 같은 그림. 뉴욕시는 빨리 낙서를 지우고 시민의 눈을 정화시켜라.」
「오한결 작가가 그린 듯. 엊그제 인종차별 당해서 정신이 나간 듯. 큭큭.」
「위대한 예술이네요. 바스키아가 생각납니다. 누가 그렸을까요?」
역시 예상한 대로 뉴욕 지하철에 그려진 낙서 그림에 대해 양분된 의견이 올라왔다.
윌리는 손으로 턱을 괴고 혼자 중얼거렸다.
‘타이론 이 자식, 결국 대형사고를 쳤네. 그때도 지하철에서 낙서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갔다고 하지 않았나?’
윌리는 타이론의 작품에 몰입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아이가 걱정되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타이론은 10대니까, 최소한 윌리는 어른으로서 그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더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기엔 너무 훌륭한 작품 같잖아. 내가 함부로 그의 예술적 행위를 제지할 수 있을까?’
윌리는 타이론을 아직 보호받아야 할 학생으로 대해야 할지, 아니면 그를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활동을 응원하고 지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깊은 고민에 빠진 윌리는 이럴 게 아니라 화제의 그 그림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진지해진 윌리는 겉옷을 챙겨 자연스럽게 뉴욕의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겼다.
뉴욕 지하철 입구에 도착한 윌리는 이미 입구로 향하는 계단에 빼곡히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론이 그렇게 떠들어대니까, 다들 구경하러 왔나 보군.’
거구의 윌리는 수많은 사람 사이를 유연하게 파고들며 점점 작품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30분을 고군분투한 끝에 드디어 작품을 마주볼 수 있게 됐다.
‘와! 이게 도대체 뭐야!’
윌리는 자연스럽게 입을 벌리고 작품을 쳐다봤다.
모니터 화면에서 사진으로 봤을 때와 완전히 다른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낙서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이 핑 돌게 만들 정도로 작가의 진심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현장의 아우라는 디지털 이미지로 담기에 한계가 뚜렷하구나.’
주변의 웅성거림과 번잡함에도 불구하고 윌리는 그렇게 나무처럼 꼿꼿이 서서 작품에 한참을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타이론은 타고난 예술가가 맞네. 그는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 대로 활동해야 영혼을 그릴 수 있는 아이였어.’
슬쩍 휴대폰을 꺼내 오한결이 예전에 소개한 ‘뉴원 애비뉴’ 벽화 낙서 그림을 살펴봤다. 그리고는 마음을 굳혔다.
‘내가 타이론을 제대로 지도하려면 그의 예전 작품을 직접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겠어. 뉴원 애비뉴에 가자. 그리고 직접 보고 그 실물의 아우라는 다시 한번 느껴보자.’
하지만 그 결심이 서자마자, 예전 학창 시절 뉴원 애비뉴에서 갱들에게 돈을 뜯겼던 과거가 생각나 윌리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갈 수 있을까?’
* * *
재즈클럽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오한결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오한결이 최근 겪은 뉴욕 지하철 인종차별이 연일 주요 뉴스로 보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종차별 금지를 외치는 독특한 낙서 작품이 등장해 연일 화제를 몰고 있다. 덕분에 오한결은 전 세계 주요 언론이 가장 관심 있는 인물로 다시금 주목받게 됐다.
‘타이론이 제대로 사고를 쳤구나. 하하.’
물론 오한결은 그 작품이 타이론의 작품인 것을 보자마자 알아챘다.
특유의 아이 같은 순순한 이미지가 사용된 그림에서 어찌 타이론을 유추할 수 없겠는가?
흐뭇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가 유난히 인종차별 문제에 크게 반응하는 점에 무척이나 마음이 쓰였다.
슬럼가에 거주하는 흑인 10대 아이가 성장하면서 겪는 차별의 정도를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오한결이 겪은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생각해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오한결은 아직 무한한 성장 가능성이 높은 타이론에게 어떠한 충고도 조언도 하지 않았다. 윌리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타이론 자신의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형성하길 바랄 뿐이다.
‘타이론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오한결의 눈이 슬슬 감겨왔다. 시간을 보니 벌써 잘 시간이 훌쩍 넘었다.
띠리리. 띠리리.
달콤한 잠의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 오한결을 깨우는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렸다.
‘신태진 회장님?’
휴대폰 액정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오한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고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어이구, 오한결 작가. 오랜만입니다. 뉴욕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괜찮은 거지요?]
“물론이죠. 며칠 정신없긴 했지만 처음도 아닌걸요?”
[뭐요?!]
오한결은 자신의 말실수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회귀 전 뉴욕 생활이 갑자기 떠올라서 그만…….
“하하……. 오해하지 마세요.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을 겪게 되지 않습니까. 난처한 상황도 마찬가지고요.”
[아하. 그런 얘기군요. 가만히 들어보면 오한결 작가는 꼭 나이든 어르신 같다니까요. 하하. 그만큼 삶에 뛰어난 통찰력과 철학이 있다는 말이겠죠?]
신태진 회장이 좋게 포장해주는 것 같아 오한결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제가 왜 전화했는지 짐작이 가시나요?]
오한결은 그가 자신이 겪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괜찮으니까요.”
오한결의 말에 신태진 회장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모든 미국 내 인맥을 동원해 미국이라는 나라가 오한결 작가에게 사과하도록 만들 겁니다.]
“인종차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뿌리 깊은 사람의 인식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절대로 즉흥적으로 대응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부작용이 클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제안을 해도 될까요? 회장님.”
[뭔가요? 뭐든 말해보세요.]
“저는 예술가로서 예술의 힘을 믿는 사람이에요. 그런 점에서 인종차별 문제도 예술로서 풀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힘이라……. 하지만 그건 너무 느리지 않습니까? 제도를 정비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게 먼저겠지요.]
“그 모든 시작점은 훌륭한 예술품에서 시작한다고 믿고 있어요. 인종차별 문제에 공감한 시민들이 그것을 차갑고 신랄하게 꼬집는 작품을 만났을 때 인식의 변화가 찾아오거든요. 그 이후 과정들은 언론과 정치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식의 변화가 선행해야 한다면 그게 예술 작품의 고유 권한이라는 말이군요.]
“맞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오한결 작가가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킬 매우 중요한 예술 작품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좋아요! 저는 얼마든지 후원할 생각이 있습니다. 원하는 걸 모든 말해주세요.]
“아니요. 저는 작품 활동을 할 계획이 없습니다.”
[뭐라고요? 그럼 왜 예술 작품 얘기를 하신 건가요?]
“이미 한 소년이 제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그렸거든요. 혹시 뉴욕 지하철에 그려진 낙서를 아시나요?”
잠시 고민하던 신태진 회장이 탄성을 질렀다.
[아! 그거 말이군요. 뉴욕 타임즈에 실린. 근데 그게 예술인가요? 낙서로 보이던데.]
“하하하. 낙서이자 예술이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건 옳은 방향입니다. 하지만 제게 묻는다면 그건 분명 예술 작품이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타이론 같은 인종차별을 주제로 하는 작가들을 후원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타이론이요? 그 낙서를 그린 작가 이름이군요. 좋습니다! 오한결 작가님의 뜻이 그러하면 당장이라도 그 작가가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작품 활동만 할 수 있도록 거금의 기부금을 조성해 보겠습니다.]
“아니요. 지금은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그 아이는 아직 10대예요. 이제 앞으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할 일이 남은 거죠. 그 아이가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그가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확고히 하고 작품에만 몰입할 때 그 아이에게 접근해서 후원을 약속해주시면 됩니다.”
오한결의 말을 들은 회장이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역시 오한결 작가님은 훌륭하시군요. 결국 작가의 성장은 본인의 의지와 노력에 달렸다는 거군요. 하지만 돈 때문에 작품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타이론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령 포기한다 해도 그건 그 아이의 한계인 거겠죠.”
[무척 현실적인 말이네요. 알겠습니다. 그 아이를 꾸준히 지켜보다가 작가로 정식 데뷔하면 그때부터 후원자로 나서겠습니다. 물론 그 전에 인종차별을 주제로 작품 활동하는 작가들을 탐색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을 거고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 * *
“뭐라고? 다시 말해봐!”
CNN 사무실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모두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명일문화재단이 도대체 뭔데? 오한결 작가 촬영 일정하고 우리쪽 장비 수준을 점검한다는 거야?”
크리스 본부장이 명일문화재단 뉴욕지부에서 보내온 공문을 손에 쥐고 보란 듯이 흔들고 있었다.
다니엘 PD가 눈치를 살피다가 크리스 본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그게……. 오한결 작가를 관리하는 곳이라, 이번 빅스퀘어 빌딩 이벤트 단독 방송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CNN이 부족해서 민간 단체에 조언이라도 구하라는 말이야?”
“사실 우리 CNN도 훌륭한 장비가 많지만, 알아보니까 문화재단이 더 최신 장비를 갖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얼마든지 한도 없이 예산을 지원해 준다고 하니까, 아주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 자꾸 이런 식으로 간섭한다 이거지. 그럼 오늘부터 오한결 작가와 관련된 모든 일정은 비밀에 부치고 추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문화재단과 협력은 없다. 알겠지?”
다니엘 PD가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만약 오한결 작가의 퍼포먼스 단독 중계가 취소되면 어떡합니까? 너무 위험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크리스 본부장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오한결 작가가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하나, 그는 아직 신인 작가에 불과하다. 작가들은 두 분류로 나뉜다.
첫째, 작품을 흥행시킬 수 있더라면 거대 자본과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
둘째, 돈, 명예 따위 필요 없고 오직 예술만 생각하는 외고집.
오한결 작가가 첫 번째라면 페이스 픽처스 CEO 로건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다. 애초에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인물이기도 하고 크리스 본부장과 아주 가까운 친분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건이라면 오한결에게 더 화려하고 미래가 보장된 작가 활동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두 번째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로건이라면 오한결 작가가 평생 뉴욕에서 예술활동 기회를 보장해줄 테니까. 물론 CNN이 오한결을 최고의 예술가로 매년 선정해준다고 하면 그것도 상당한 기회가 될 것이다.
감히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 명일문화재단은 톡톡히 값을 치를 것이다.
그들에게서 오한결을 뺏어야겠다!
크리스 본부장의 얼굴에서 비열한 미소가 번지자 그 모습을 본 사무실 직원들이 인상을 구기기 시작했다.
“어서 뭐해! 로건에게 연락해! 내가 직접 찾아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