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위험한 상상
푸른 하늘이 맑게 갠 싱그러운 아침 9시.
똑딱. 똑딱. 똑딱.
분노에 휩싸인 구두 발소리가 문화재단 로비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신수진 이사장은 로비를 지나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 재꼈다.
“비상사태!!”
이미 신수진 이사장의 이런 반응을 예상한 이나영 팀장이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신수진 이사장 근처로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이사장님!”
“보고 준비는 마쳤습니다. 지금 몹시 궁금하군요.”
“예! 이사장실로 가시지요. 자료를 갖고 가겠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책상에 덜컥 앉고는 이나영 팀장이 갖고 온 생수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다 마셨다.
그리고는 여전히 속이 타는지 몹시 거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문화재단의 소속 작가가 뉴욕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다니요! 그것도 오한결 작가가 말이죠!”
“뿐만 아니라 저희 직원인 최하늘 씨도 당했다는 점에서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세차게 내려쳤다.
퍽!
“생각할수록 분합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이게 현실입니까?”
흥분한 신수진 이사장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것 같아서 이나영 팀장이 재빨리 보고 서류를 책상에 올리고 말을 이었다.
“일단 상황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오한결 작가와 최하늘 씨가 뉴욕 지하철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는 영상이 SNS에 쫙 퍼진 상황입니다.”
“봤습니다. 봤어요!”
이나영 팀장은 신수진 이사장이 끼어들어도 꿋꿋이 보고를 이어갔다.
“뉴욕 타임즈도 이 사실을 메인 뉴스로 다루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내 주요 언론들도 이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고 있고요.”
뜨거운 콧바람을 내뱉고 있던 신수진 이사장이 물었다.
“그래서 그 언론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일반적으로 미국 내 인종차별의 심각성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러 몇몇 언론들은 오한결 작가가 그들을 자극한 게 아니냐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이런!”
욕이라도 한바탕 지껄이려던 신수진 이사장은 바로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던 이나영 팀장을 보고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신수진 이사장이 차분히 말했다.
“오한결 작가와 최하늘 씨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꽤 충격이 심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최하늘 씨와 통화를 했는데요. 그땐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많이 괜찮아진 상태라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우리 쪽에서 무슨 계획이 있는 거죠?”
“일단 뉴욕시에 공식적으로 항의서한을 보낼 예정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이나영 팀장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걸로 무슨 효과를 기대할 수 있나요?”
“……그들의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약속받는 겁니다. 뉴욕에서 인종차별이 없도록 말이죠.”
“그게 되겠어요? 미국은 다민족 이민 국가입니다. 사실 이번 사태만이 아니라도 인종차별 문제는 끊임없이 사회적 문제로 두각되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사실 우리 문화재단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이사장님.”
사실 그건 신수진 이사장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문화재단은 예술가를 지원하고 관련 사업을 주관하는 사립 기관일 뿐 한 나라의 문화와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방법은 찾아보면 있다고 신수진 이사장은 생각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겁니다. 촘촘한 미국 내 네트워크를 활용해보세요.”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예술단체와 예술가들을 움직여 미국에서 인종차별 금지를 주제로 한 예술 운동을 벌이는 겁니다.”
“오호라. 꽤 매력적인 제안이군요.”
“이사장님이 허락하시면 강철 지부장과 의논해 구체적인 계획안을 마련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문화재단은 언제나 오한결 편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세요!”
“네!”
이나영 팀장이 이사장실을 나가자 신수진 이사장은 답답한 마음을 다시금 표정으로 드러냈다. 자신이 책임지는 문화재단을 대표하는 예술가가 미국에서 그런 수모를 겪었는데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니, 이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다.
‘분명 찾아보면 미국이 오한결에게 머리를 숙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게 신수진 이사장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데, 갑작스럽게 휴대폰이 울렸다.
신태진 회장이었다.
아버지가 전화 건 목적을 잘 알 것 같아서 신수진 이사장이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받았다.
“네, 아버지.”
[들었다.]
살면서 몇 번 들어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자 신수진 이사장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부 회의를 마쳤습니다. 문화재단에서 오한결 작가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다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신태진 회장이 대답했다.
[아니다. 문화재단이 무슨 힘이 있겠니. 이번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마.]
“네? 어떻게 하시려고…….”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 넌 그 정도만 알고 있어라.]
그렇게 신태진 회장이 여운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야. 혹시, 설마?’
신수진 이사장은 신태진 회장의 계획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 *
허름한 동굴 같이 어두운 집에서 타이론이 홀로 CNN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앵커는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뉴욕이 초대한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지하철에서 입에도 담기 힘든 욕을 먹으며 인종차별을 당한 소식을 긴급뉴스로 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SNS에 영상에 잡힌 거구의 흑인과 백인의 모습을 화면 가득 채우면서 그들이 벌인 일에 대해 정부가 엄벌을 처할 것을 촉구했다.
타이론은 뉴스에 나온 두 남성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로 손을 떨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한 지 알기는 한 거야?’
타이론은 어린 나이지만 슬럼가 흑인 소년으로서 수많은 차별과 멸시를 견디며 살아왔다. 그렇게 분노가 쌓여감에 따라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 나타났고 그것을 자신이 극복하고자 낙서라는 형식으로 감정을 해소해 왔던 것이다.
타이론에게 차별이라는 말은 폭력과 같은 말이었다.
‘오한결 작가님처럼 나를 진심으로 예술가로 대해준 사람은 없었어. 내가 작가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CNN 방송에서는 다시금 오한결과 최하늘이 두 거구의 인종차별자들에게 욕을 먹는 SNS 영상을 내보내고 있었다.
끔찍하다는 생각에 급히 텔레비전 전원을 끈 타이론은 급히 여러 색의 락커를 가방에 챙기고 집 밖으로 나갔다.
슬럼가의 새벽은 무법천지였다.
허름한 가방을 둘러메고 슬럼가를 걷는 타이론에게 수많은 흑인 갱들이 말을 걸었다.
“어이, 리틀 바스키아. 또 낙서하러 가냐?”
“다 커서 낙서하면 엄마한테 혼난다. 킥킥킥.”
입에 담배를 물고 바닥에 침을 뱉던 한 흑인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타이론은 대답하지 않고 길을 계속 걸었다.
그렇게 어두운 슬럼가를 빠져나와 길을 걷던 타이론은 오한결에게 인종차별이 일어났던 뉴욕 지하철에 도착했다.
타이론은 주변을 살피며 혹시라도 순찰을 하고 있는 경찰이 있나 찾아봤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타이론은 거침없이 지하철로 내려갔다.
몇몇 노숙인들이 잠을 자고 있었지만 타이론은 신경 쓰지 않고 그림을 그릴 벽을 찾아 다녔다.
그는 심사숙고한 끝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목에 위치한 커다란 벽 앞에 멈춰 섰다.
‘여기가 좋겠어. 그래야 많은 사람이 보니까.’
낡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자, 그 안에 들은 락커통이 바닥에 부닥치면서 쨍그랑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소음에도 노숙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양손에 락커를 하나씩 들은 타이론이 벽을 쳐다보며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주제는 인종차별이다.
여러 인종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뉴욕.
하지만 무슨 일인지 다수의 인종이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에 주인의식을 품고 있다.
그게 맞는 것인가?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고 소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자격은 누가 부여한 걸까?
누가 그걸 정당하다고 말했던 걸까?
타이론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모두 착각하고 있다.’
이제 생각을 정리한 타이론이 손을 움직여 벽에 락커를 뿌리기 시작했다.
특유의 낙서 형식으로 오한결 작가에게 차별적 발언을 했던 두 인물을 그려나갔다.
거만하고 오만한 그 얼굴. 마치 뱀의 형상과 닮았고 혀 또한 그렇게 그려졌다.
그들은 위태한 모서리에 서서 오한결을 내려다 봤지만 오한결은 아주 단단한 바닥에 다리를 내디디고 위태로운 인종차별주의자들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차별에 따른 분노가 가득한 타이론은 작품 전체에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시작했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인물들의 관계를 그렸고 곳곳에 해석이 가능한 상징물들로 작품의 여백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림은 이제 갓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어린 아이와 같은 화풍이었다.
아이의 그림처럼 상상력의 제약이 없는 그림이었고 꽤 감정에 솔직한 작품으로 보였다.
마음이 가는 대로, 상상한 대로 그림을 그린 타이론은 동이 틀 무렵에서야 작품을 완성했다.
‘빨리 나가야겠어. 곧 사람들이 지하철로 들이닥칠 거야!’
그림을 완성한 타이론은 주변에 흩어진 락커를 바닥에 쑤셔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후드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천천히 뉴욕 지하철을 빠져나갔다.
밤새도록 타이론의 작품을 슬쩍슬쩍 시켜보던 한 노숙자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무슨 낙서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해놔. 내가 더 잘 그리겠다.”
잠시 뒤 새벽 출근을 하려는 시민들이 지하철로 내려오고 시작했다.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 대부분 사람이 타이론의 그림 앞에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 그림을 촬영했다.
하지만 타이론의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양분됐다.
감각적이고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낙서에 불과한 것이고 이건 당장 정부가 낙서한 범인을 잡아내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타이론의 작품은 뉴욕 지하철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타이론의 작품을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상에서도 작품의 수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급기야 거친 욕설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쨌든 타이론의 작품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그 시각 뒤늦게 집에 도착한 타이론은 냉장고에 먹다 남은 빵을 한 조각 먹고 동굴 같이 어둡고 지독한 외로움이 곳곳에 묻어 있는 집안 구석에 몸을 움츠린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타이론은 자신의 그림이 뉴욕 시민들에게 열렬한 예술 논쟁을 불러일으킬지는 꿈에도 모른 채 코를 골며 수면에 빠져들었다.
그 시각 뉴욕타임즈 기자 한 명이 뉴욕 지하철 벽에 그려진 타이론의 작품을 고화질 카메라로 찰칵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