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47화 (147/202)

제147화 인종 차별

최하늘이 앞장서며 호텔을 빠져나오다가, 오한결이 뒤처진 것 같아 뒤돌아 소리 질렀다.

“작가님! 서둘러야 해요. 행사에 늦겠어요.”

“데이비드 오 교수님은요? 같이 안 가나요?”

최하늘이 급히 시계를 확인하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교수님은 행사장으로 바로 오신다고 했어요. 오늘 뉴욕 주지사님도 오는 큰 만찬 행사라고요. 주인공이 작가님인데 늦으면 큰일 나요.”

발을 동동 구르던 최하늘은 빠듯한 일정을 잡은 행사 주최측을 원망했다. 불과 1시간 전에 갑자기 행사 주최측에서 행사 시간을 앞당겨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통보를 해온 것이다. 불안해 보이는 최하늘에게 오한결이 다정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모르겠어요. 이렇게 교통체증이 심할 줄 전혀 몰랐잖아요…….”

오한결의 모든 일정을 책임지고 있던 최하늘은 혹시나 행사에 늦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완연한 어둠이 찾아오자 뉴욕 시내는 체증이라도 걸린 듯 엄청난 교통정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둘러 택시를 알아봤지만 잘못했다가는 길에서 몇 시간이고 멈춰있을 게 뻔해 보였다.

“작가님, 지하철 타고 가요!”

“아……. 그냥 택시 타고 가시죠. 하늘 씨.”

오한결이 주춤하자 최하늘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지하철 타면 30분이면 도착해요. 지금 이 시각에 택시를 타면 아마도 한 시간 이상 걸리고요.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는 것 같은데요…….”

회귀 전 오한결은 뉴욕에서 당했던 수많은 인종차별이 생각났다. 알 수 없는 말로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과 마약에 취해 괜히 어떤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

특히, 뉴욕 지하철을 탈 때마다 그는 긴장했고 어김없이 한 달에 한 번은 인종차별을 겪곤 했다.

불현듯 생각난 그때의 기억 때문에 오한결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가 듣기론 인종차별 문제도 있고 해서, 뉴욕 지하철은 피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에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요. 괜찮을 거예요.”

최하늘이 몹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이번엔 오한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뉴욕에서 지하철을 타본 적이 있어요?”

“아뇨.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그 전에 우리 행사 놓치면 더 큰 일이 생겨요.”

찜찜하지만 최하늘의 적극적인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오한결은 그녀를 따라 뉴욕 지하철로 향했다.

한국 지하철에 비해 무척 낙후된 뉴욕 지하철은 수많은 인종이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과 더불어 관광객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보다.’

오한결의 염려와 다르게 위협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고 최하늘은 급히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오늘 행사 일정을 확인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렇게 대략 몇 정거장이 지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더니 결국 오한결과 최하늘 곁에 몇몇 사람들만 조용히 앉아 휴대폰과 책을 보는 등 각자 자기 일에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은 한국 지하철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오한결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덩치 큰 두 사람이 보였다.

흑인과 백인으로 온몸에 문신을 한 그들은 비열한 미소로 서로를 주고받더니 오한결과 최하늘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오한결이 몹시 긴장한 상태로 경계를 하자, 그 모습을 눈치챈 최하늘이 놀라 물었다.

“왜요? 어디 아프세요?”

“하늘 씨, 잘 들어요. 1시 방향에 우리를 노려보는 두 사람이 있어요.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요.”

놀란 최하늘이 자신도 모르게 그쪽 방향을 쳐다보자, 정말로 두 사람이 킥킥대며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 정말이네요. 근데 걱정마세요. 우리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리니까. 그때까지 저러다가 말겠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자리에 일어서더니, 오한결과 최하늘 근처로 냉큼 다가왔다.

“어이, 어디서 왔어? 중국? 일본?”

가까이에서 보니 백인 남성은 눈이 상당히 붉게 출혈 돼 있었다. 오한결은 붉은 눈의 남자에게 대답했다.

“한국이요. 죄송하지만 저희가 좀 바빠서요.”

“킥킥킥.”

흑인 남성이 흥미롭다는 듯이 오한결과 최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며 웃었다.

“나도 바쁜 사람이야. 왜 그래? 그래도 우린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 킥킥.”

“그만 가시죠!”

긴장했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던 오한결과 다르게, 최하늘은 불같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오, 성격이 보통이 아니네. 나랑 싸우자는 건가? 킥킥.”

오한결이 최하늘을 말릴 틈도 없이 최하늘이 대뜸 다시 소리를 질렀다.

“자꾸 이러시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오호, 진정하라고. 우리는 말이지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것뿐이야. 그게 죄는 아니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오한결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붉은 눈의 남성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더럽고 치사한 동양인들은 어서 뉴욕에서 꺼지라는 내용과 오한결과 최하늘의 생김새에 대해 동물에 비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술에 취한 듯 오한결과 최하늘에 대한 모욕을 멈추지 않았다.

오한결과 최하늘이 동시에 외쳤다.

“그만!!”

화가 난 오한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뒤 말했다.

“한 번 더 경고하는데, 더이상 입을 잘못 놀렸다간 당신 인생을 끝장내 주겠어! 알겠어?”

오한결이 무척 흥분하며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하자, 그 모습을 처음 본 최하늘이 더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어머……. 오한결 작가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두 거구의 흑인과 백인은 오한결의 말에 뭐라고 대꾸하려던 순간, 지하철 문이 열리면서 수많은 사람이 탑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재빨리 지하철을 빠져나갔다.

흥분한 오한결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최하늘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이런 거 처음 당하면 많이 당황스럽거든요.”

“아……. 저는 괜찮아요. 작가님은요? 아까 많이 흥분하셔서 걱정돼요.”

“사실 많이 당해봐서 이제는 면역이 생겼나 봐요. 역시 단호하게 대처하니까 효과가 있네요.”

“네? 많이 당하셨다고요??”

“아니, 말실수를 했네요. 하하.”

“……네. 그렇죠?”

최하늘은 오한결의 말실수에 찜찜함을 느꼈지만, 그보다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정말 괜찮으시죠? 이제 슬슬 이동해야 하는데, 정말 괜찮으시죠?”

“물론이죠. 어서 가시죠. 늦겠어요.”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안정을 되찾고 지하철에서 내려 행사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들이 빠져나간 지하철 뒤편에 한 남성이 몹시 흥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휴대폰 속에 저장된 동영상을 재생하며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대박, 오한결 작가잖아. 이걸 SNS에 올려야겠다.”

* * *

그날 저녁, 모든 일정을 마치고 오한결과 최하늘이 재즈클럽을 찾았다.

익숙하게 재즈클럽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와 다르게 무척 긴장감이 서린 분위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재즈클럽 손님들은 오한결과 최하늘이 지나갈 때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런, 이런! 어서 오세요!”

강철 지부장이 급하게 달려와 오한결과 최하늘의 와락 껴안았다.

“많이 놀라셨죠. 너무 걱정돼서 지금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오한결과 최하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강철 지부장이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진작 알고 있어야 했는데, 방금 SNS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알게 됐어요. 최하늘 씨,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나요?”

그 말에 놀란 최하늘이 휴대폰을 켜고 SNS를 뒤지기 시작했다.

‘헉! 이게 뭐야!’

몇 시간 전 뉴욕 지하철에서 거구의 두 미국인에게 인종차별을 당하는 오한결과 최하늘의 모습이 고스란히 영상으로 올라가 있었다.

오한결도 고개를 빼들고 해당 영상을 보더니 말했다.

“이런, 누군가가 촬영을 해서 올렸군요.”

최하늘도 소리쳤다.

“어머! 이 못된 놈들! 딱 걸렸어!”

분노에 찬 강철 지부장이 굵직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감히 오한결 작가님과 문화재단 직원에게 그런 짓을 한 놈들을 모두 잡아서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제가 문화재단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그놈들에게 마땅한 처벌을 내리겠어요!”

직장 상사가 자신이 당한 아픔에 공감해 주자, 최하늘이 감동해 눈물을 왈칵 쏟아버렸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에 빠졌다. 강철 지부장이 너무 흥분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저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한결은 강철 지부장을 두둔했다.

“네, 지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이 되네요.”

“네!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강철 지부장이 불같이 눈을 이글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오한결과 최하늘은 데이비드 오 교수와 앤드류, 윌리가 있는 자리로 옮겼고 그들은 모두 오한결과 최하늘이 당한 인종차별에 대한 위로와 함께 그 문제에 대한 깊은 토론을 이어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모두의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 최하늘이 조심스럽게 오한결에게 말을 걸었다.

“지하철 사건 이후 문제를 키우지 않으려고 하신 거 같은데, 지금은 적극적으로 인종차별자들이 처벌받기를 원하시네요.”

“증거가 나왔으니까요?”

오한결이 살짝 취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CCTV도 없기 때문에 그들을 특정할 수 없어요. 괜히 모호한 정보를 주게 되면 흑인과 백인이 동양인을 차별했다는 프레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언론이 딱 좋아할 만한 이슈죠.”

“그런데, 영상이 나오면서 그들을 특정할 수 있게 된 거군요. 그렇다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두 사람이 처벌받는 선에서 끝날 수 있군요.”

“맞아요. 편 가르기 같은 불필요한 논쟁이 사라진 거죠. 백인과 흑인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인종주의자들의 문제라는 프레임이 생길 겁니다.”

오한결의 말을 이해한 최하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네요. 그 못된 놈들은 벌을 좀 받아야 해요.”

“그럼요. 문화재단이 나선다면 그들도 꼼짝 못 하겠죠.”

“물론이죠. 문화재단이 뉴욕에서 어떤 영향력이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시간이 됐군요.”

오한결과 최하늘이 기분 좋게 대화를 이어가자, 서빙 일을 마친 산다라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와우! 두 사람 모두 의외의 얼굴을 하고 있네요. 울면서 뉴욕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아닌가? 호호.”

최하늘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그땐 그랬어요. 뉴욕이 너무 싫고 두렵고. 솔직히 지금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아요. 하지만 오한결 작가님이 뉴욕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설명해줘서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고요.”

산다라가 테이블에 걸터앉고는 오한결을 은근히 쳐다봤다.

“오한결 작가님을 보면 뉴욕에 아주 오래 산 사람처럼 보여요.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이죠. 무엇보다 인종차별을 당한 사람치고는 상당히 의연한데요. 저는 처음에 그런 모욕적인 언행을 당했을 때 일주일을 울었거든요.”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사람인데 기분이 매우 나빴어요. 사실 어떻게 하면 갚아 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 두 사람의 얼굴을 그려서 빅스퀘어 빌딩 전광판에 전시할까도 생각했는걸요. 하하.”

산다라가 박장대소를 했다.

“그거야말로 최고의 복수 같네요.”

“하지만 그 소중한 기회를 그들을 위해서 쓰고 싶지 않았어요. 빅스퀘어 빌딩에 선보일 그림은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이 좋아했던 그림이니까요. 그 사람을 위해서 쓰고 싶어요.”

말을 하던 오한결이 아득한 표정을 짓자, 산다라가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최하늘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최하늘은 순간 이런 상상을 했다.

‘설마, 나를 위해서 그림을 그려준다고? 정말 그런 거야?’

오늘 하루 받은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기분이 드는 최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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