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원칙주의자
명일그룹 회장실.
신태진 회장의 부름을 받은 박영운 실장이 회장 앞에서 목이 타는지 차를 연신 들이켜고 있다.
박영운 실장이 담당하는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 건설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자, 신태진 회장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명일그룹 본사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신태진 회장이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지난번 신태진 회장이 글로벌 무역센터를 오한결에게 맡기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하자, 박영운 실장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신태진 회장은 여전히 박영운 실장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지 알고 싶었다.
“박 실장도 최근에 오한결 작가가 뉴욕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들어 알고 있으시죠?”
“네, 언론에서 접했습니다.”
건조한 말투로 박영운 실장이 대답하자, 오히려 신태진 회장이 더 안절부절못했다.
“음……. 박 실장은 오한결 작가의 행보에 대해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군요.”
박영운 실장은 고개를 들고 신태진 회장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왜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로건의 빅스퀘어 빌딩의 전광판 이벤트는 전 세계 손에 꼽히는 최신 기술의 축제였다. 수많은 아티스트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도 근처도 못 가는 실정이 아닌가? 심지어 유명 아티스트조차 로건에게 아무리 로비를 해대도 씨알도 안 먹힌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그 큰 이벤트를 오한결 작가가 맡게 됐다고?
박영운 실장은 원칙주의자였고 철저히 자신의 경험을 믿었다.
‘건축 디자인은 그렇게 갑자기 천재가 나올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물론 기발한 아이디어로 잠깐 주목을 받을 수 있겠지만 철저히 바닥부터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경험하고 정상을 찍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갑자기 등장한 오한결에 대한 신뢰를 할 수 없었으며, 그가 신태진 회장의 눈에 든 건 그저 운이 좋아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건의 빅스퀘어 빌딩의 대형 광고판이라면 박영운 실장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빅스퀘어 빌딩은 일류 디자이너들에게도 꿈의 무대 아닌가. 거길 어떻게 오한결이…….’
명일그룹에서 원칙주의자로 살았던 박영운 실장은 선뜻 자신의 경험이 틀렸으니 오한결이 무역센터 로비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 아무리 회장 앞이라 해도 박영운 실장은 자신의 자존심을 굽힐 수 없었다. 설령 명일그룹을 퇴사하더라도 말이다.
생각을 굳힌 박영운 실장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저는 결과를 보고 판단할 뿐입니다. 아직까지 오한결 작가가 빅스퀘어 빌딩의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끝낸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미디어의 설레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박영운 실장의 속내를 신태진 회장이 정확히 간파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나 보군.’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댄 신태진 회장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살짝 미소지었다.
“내가 그래서 박 실장을 좋아합니다. 우직해요.”
“…….”
“나는 오한결 작가가 완벽히 성공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줄 거로 생각하지만, 박 실장에게 그 생각을 강요할 수 없겠죠. 박 실장은 증거가 필요한 사람이니까. 검증된 인물이 박 실장을 만족시킨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오한결 작가에 대해 신뢰를 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는 명일 그룹의 미래 운명을 결정지을 프로젝트입니다. 수많은 검증된 전문가를 제치고 오한결 작가가 할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요, 두고 봅시다. 하지만 오한결 작가가 이번에도 성공적인 퍼포먼스로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준다면 그때는 반대하지 않기로 해요. 알겠습니까?”
“네.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후 여러 사담을 나눈 뒤 박영운 실장은 회장실로 나가자, 양승호 비서가 눈치를 살피며 회장실에 들어와 회장에게 물었다.
“박 실장님이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아니. 하지만 곧 바뀌겠지.”
“아……. 아쉽네요. 박영운 실장은 이렇게 보면 좀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하지만 그게 꼭 나쁘다고 말할 수 없어. 회사를 운영하려면 안개 속에서 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에 항상 긴장하고 미래를 예측해야 하지. 그런 의미로 박영운 실장은 회사 경영과 맞지 않는 인물이야.”
처음으로 회장 입에서 박영운 실장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자 양 비서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신태진 회장은 그런 양 비서의 얼굴을 보며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박 실장은 경영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그는 건축에선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전문가야. 전문적 지식을 믿고 그것을 근거로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지. 그래서 나와 대척점에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내게 무척 도움이 되는 걸세.”
신태진 회장을 이해한 양 비서가 대답했다.
“그래서 박영운 실장님을 위해서 뉴욕에 급히 갔다 온 거군요. 로건을 설득해 오한결과 프로젝트를 하게 하려고요.”
“맞아. 앞으로 수많은 기회가 있을 오한결에게 로건의 빅스퀘어 빌딩 이벤트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걸 하지 않으면 박영운 실장에게 오한결 작가의 실력을 증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선 거지.”
“역시 제 짐작이 맞았군요.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회장님은 박 실장님을 무척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양 비서 말에 신태진 회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양 비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양 비서를 설득해야 한다면, 기꺼이 다시 한번 뉴욕에 갔다 올 걸세. 아니 전 세계 어디라도 상관없지.”
“!!”
신태진 회장의 말에 양승호 비서는 무척 감동 받았다. 그만큼 양 비서를 무척 아끼고 신뢰한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걸 어서 풀잎 씨에게 말해줘야 하는데……. 아, 감동이야……!’
감동을 받아 눈시울이 붉어진 양 비서는 얼른 이 기쁜 사실을 여자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외쳤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 * *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가 최근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야옹이 마을’을 찾았다.
최근 편집회의에서 편집장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곳이라며 박수호 기자를 닦달해 특집 기사를 쓸 것을 강요했다.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박수호 기자는 내키지 않았지만 갈수록 SNS에 인기를 끌고 있어서 기자로서 더는 외면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아, 정말 멀긴 머네. 아직도 도착 안 한 거야?”
이동하는 내내 투덜대던 박수호 기자는 뱃멀미를 호되게 견디며 6시간 만에 남해 섬마을에 도착했다.
‘그래도 경치는 기가 막히는구나. 와, 바다 색깔도 죽이고.’
섬마을 특유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풍겼고 여기저기서 고양이들이 배를 깔고 드러누워 있는 모습이 무척 생소하면서도 행복감을 주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고 마을 이곳을 촬영하던 박수호 기자는 유난히 화려한 집 앞에 문득 서게 됐다.
‘이곳이 최근 청년 작가들이 새로 꾸몄다는 할머니 집이구나.’
때마침 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나오자, 몸이 불편한 고양이 한 마리가 휠체어를 몸에 지닌 채 할머니를 따라 천천히 기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라고 합니다.”
할머니는 담벼락에 다소곳하게 앉은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며 쳐다봤다.
“기자 양반이구먼. 자네도 사진 찍으러 왔수?”
“아, 네. 그리고 이곳에 워낙 유명해서 뭐 좀 여쭤보려고요.”
최근 그려진 듯한 귀여운 캐릭터들이 담벼락을 꾸몄고 그 아래 놓인 여러 개의 고양이 집도 꽤 정교하면서도 개성 있는 모습이었다.
‘전문가의 솜씨가 분명해 보이는데?’
할머니가 허리를 펴며 끙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박수를 기자를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 청년들의 작품이에요. 참 착하고 예의 발랐지.”
“아, 역시 청년 작가들의 작품이군요. 혹시 그들의 소속이나 단체를 알 수 있을까요?”
“엥? 난 그런 거 몰라.”
“아……. 그럼 명함이라도? 아니면 인상착의를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머리가 불그스름한 예쁜 아가씨하고 그냥 착해 보이는 총각 둘이 왔더라고.”
“머리가 붉다고요?”
박수호 기자의 머릿속에 얼핏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오한결 작가를 볼 때마다 그의 곁에 항상 붙어 다니는 세 사람의 얼굴이었다.
‘붉은 머리 거리 예술가 노을.’
‘H대 조소과 재학 중인 최무열.’
‘유명한 청년 예술가 서정익.’
머릿속에서 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던 박수호 기자는 더 확고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한 가지 더 질문을 했다.
“혹시, 한 명이 무척 낯을 가리거나 하지 않았나요?”
할머니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긴 했지. 조금만 고양이가 안기려고 달려들면 줄행랑을 쳤으니까. 이름이 뭐였더라. 서 뭐라고 했던데.”
“서정익이요?”
“아! 맞아. 우리 아기 휠체어 만들어 준 청년이야.”
휠체어라는 말에 박수호 기자가 고개를 숙여 몸에 휠체어를 단 아기 고양이를 쳐다봤다. 이제는 완전히 적응했는지 이곳저곳을 마음껏 돌아다니고 있었다.
박수호 기자는 카메라를 꺼내 몸이 불편한 아기 고양이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으며 생각했다.
‘특집 기사가 정해졌네.’
* * *
밤 12시가 넘어가는 시각.
학교에서 조별 과제를 겨우 끝낸 최무열이 뒤늦게 집에 들어와 침대에 철퍼덕 드러누웠다.
잠깐만 눈을 감고 쉰다는 게 그만 한 시간이나 단잠에 빠져버렸다.
퍼뜩 정신이 든 최무열이 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최무열: 밤늦게 미안해. 급히 알려야 할 소식이 있어서.」
「노을: 어머! 밤늦게라니. 작가에겐 지금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시간인데. 호호.」
「서정익: 저는 이제 아침 먹습니다.」
「최무열: 네? 새벽 1시에 아침 먹는다고요?」
「서정익: 네. 저는 저녁 9시에 일어나거든요. 완전한 올빼미입니다.」
「노을: 아, 그건 좀 너무 갔다. 호호.」
「최무열: 부럽다. 나는 아침 9시까지 학교 가야 해서. 밤샘해도 맨날 새벽에 기상해야 하는데. 으악!!」
「노을: 어머! 부럽다. 아침형 인간.」
다시금 슬슬 잠이 오는 최무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런 잡다한 수다를 떨 때가 아니야!’
「최무열: 전할 소식이 있어. 오늘 모던아트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어. 지난번 우리가 고양이 마을 꾸민 거에 대해 물어볼 게 있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노을이 대답했다.
「노을: 예전에도 무열이가 혼자 인터뷰했잖아요. 이번에도…….」
「최무열: 누나! 이건 기회라고. 왜 자꾸 인터뷰를 피하는 거야?」
「서정익: 맞아요. 작가는 작품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PR할 줄 알아야 해요. 인터뷰가 나가면 노을 씨의 인지도도 많이 올라갈 거예요.」
「노을: 부끄러워서 그러지. 나 혼자 한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인터뷰하겠지만, 솔직히 내가 뭘 했다고. 두 사람 보조한 것밖에 더 있나?」
「최무열: 에이, 그건 좀 아니다. 고양이 마을을 처음에 가자고 한 것도 누나고, 그 할머니 집을 꾸미자고 한 것도 누나인데, 왜 그런 말을 해요. 누나가 없었으면 애초에 이런 인터뷰할 일도 안 생겼어요.」
「서정익: 맞아요. 보조를 했다면 무열 씨와 제가 한 거겠죠.」
두 사람의 열화와 같은 응원에 노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을: 뭐지, 이 감동은……. 알았어. 그럼 이번에는 다 같이 인터뷰해보자. 모던아트라면 엄청 유명한 곳이잖아.」
「서정익: 잘 결정하셨어요. 하하. 그럼 무열 씨, 언제 인터뷰에요?」
한참을 답이 없자, 노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
「노을: 무열아? 언제 인터뷰냐고?」
「서정익: 설마, 지금 잠든 건 아니겠죠?」
두 사람의 짐작대로 노을의 수락을 듣기도 전에 최무열은 갑자기 몰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손에 휴대폰을 꼭 쥔 채 침대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핸드폰이 붕붕 울려댔지만, 깊은 잠에 빠진 최무열을 깨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 뒤, 해가 떠오르자 최무열이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뭐야! 깜빡 잠이 들었잖아.’
급히 휴대폰을 확인한 최무열은 깜빡 잠들기 전 노을이 보냈던 문자를 재빨리 확인했다. 다행히 노을이 수락한다는 말이 적혀 있자, 그 뒤 메시지 따위는 확인하지도 않고 편한 마음으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또 몇 시간 뒤, 띠링 문자 소리에 최무열이 다시 눈을 떴다.
「한소리: 오빠, 오늘 조별 발표인데 왜 안 와요? 우리 조원들하고 교수님이 오빠 오면 그냥 안 넘어간다고 지금 난리에요.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서 오세요…….」
‘으악!!! 늦잠 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