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45화 (145/202)

제145화 가슴 아픈 기억

명일문화재단 회의실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굳은 표정의 신수진 이사장이 보고서를 살피며 이나영 팀장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CNN에서 미리 선수를 쳤다는 거군요.”

긴장감이 서린 얼굴의 이나영 팀장이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이번 CNN 인터뷰 때 오한결 작가에게 빅스퀘어 빌딩의 퍼포먼스를 단독으로 방송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은 지난날 CNN의 오한결 인터뷰 장면을 회상했다. 스타 앵커를 내세워 기획한 그 인터뷰는 현재 전 세계 예술계를 뒤흔들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순수 예술로 유명해진 오한결이 선보일 파격적인 작품에 어떻게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CNN이 단독으로 그 해당 퍼포먼스를 방송하게 됐다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규칙적으로 두드리던 신수진 이사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된 것일 수도 있겠어요.”

“네? 그게 무슨…….”

방금까지도 CNN 단독 방송에 불쾌함을 내비치던 신수진 이사장이 정반대의 얘기를 하자 이나영 팀장이 허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나영 팀장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신수진 이사장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건 CNN에서 완벽한 방송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퍼포먼스와 관련된 모든 일에 문화재단이 간섭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방송의 기술적인 문제라든지, 빅스퀘어 빌딩의 스크린의 기술적인 문제도 우리가 직접 점검합니다.”

“빅스퀘어와 CNN에서 수용할까요? 불쾌해할 것 같은데요.”

“이번 뉴욕 이벤트는 오한결의 개인 작품을 넘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벤트가 될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가 나서야지요.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해서요.”

신수진 이사장의 의중을 파악한 이나영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있을 때, 회의실 정면에 화상 회의용으로 설치된 커다란 모니터에서 강철 지부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선명한 화질의 영상 속 강철 지부장은 새벽이라 그런지 무척 피곤한 얼굴이었다.

[이사장님, 그리고 이 팀장님 안녕하세요. 강철 지부장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나영 팀장이 방금 신수진 이사장과 나눈 얘기를 일목요연하게 전달했다.

집중해서 듣던 강철 지부장이 한마디 했다.

[좋습니다. 뉴욕지부는 현재 미국 내 모든 언론사와 견고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움직이기만 한다면 빅스퀘어 빌딩와 CNN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철 지부장의 말에 만족한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좋습니다. 당장 움직여 주세요. 우리는 오직 오한결 작가의 성공만 바라봅시다.”

이나영 팀장과 강철 지부장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이사장님!”

* * *

오한결과 최하늘이 타이론을 데리고 뉴욕대 윌리의 조교 사무실을 찾았다.

조교 세 명이 함께 쓰는 사무실은 생각보다 컸다. 모두 깔끔한 성격인지 미술 관련 자료와 책이 많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무척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다른 조교들은 자리를 비웠는지 사무실에는 윌리 혼자 앉아서 오한결 일행을 맞이했다.

“모두 어서 오세요. 누추한 곳이라 민망하군요.”

최하늘이 사무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깔끔하네요.”

“아…… 생각보다?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윌리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최하늘이 이를 악물고 성격을 죽이며 대답했다.

“오호호. 무슨 뜻인지 아시면서.”

윌리가 은근히 째려보면서 입은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두 사람의 유치한 대화를 차단하고 오한결이 쭈뼛쭈뼛 서 있는 타이론의 어깨를 잡으며 윌리에게 소개했다.

“이 아이가 그 타이론이에요.”

거구의 윌리가 타이론 앞에 서자, 무척 마른 타이론은 더욱 위축돼 보였다. 평소에도 말이 없던 타이론이 윌리 앞에서 더 입을 다물어 버릴까 걱정이었다.

타이론이 10대 특유의 퉁명스러움으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첫 인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윌리 역시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 네가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군. 작품 좀 볼 수 있을까?”

“여기 없어요. 집 근처에 있어요.”

타이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윌리가 고개를 기웃하자, 최하늘이 보충 설명을 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이 아이는 낙서로 작품 활동을 해요. 타이론 작품은 집 근처 담벼락에 있거든요. 동네에서 별명도 ‘리틀 바스키아’랍니다. 호호.”

바스키아라는 말에 윌리가 타이론을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 그 정도란 말이지?’

평소에도 바스키아 작품을 무척 좋아했던 윌리가 호기심을 보이며 타이론에게 물었다.

“어디에 사니? 내가 바쁘긴 한데, 그래도 오한결 작가님 부탁이니까 작품을 직접 보긴해야 하지 않겠니?”

“저요? 저는 ‘뉴원 애비뉴’에 사는데요.”

“뭐라고!!”

뉴욕의 대표적인 슬럼가 이름이 나오자 윌리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사실, 윌리에게는 20대 대학생 시절 우연히 ‘뉴원 애비뉴’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때 거리 갱들에게 온갖 물품을 털렸던 가슴 아픔 기억이 있었다.

‘뉴원 애비뉴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데, 그 지역을 가봐야 한다고?’

급하게 책상을 정리하는 척하던 윌리가 슬쩍 말했다.

“어이구, 내가 이걸 안 했구나. 이런이런, 중요한 스케줄을 홀딱 까먹고 있었지 뭐예요. 우하하하.”

무척 어설픈 윌리의 연기력에 모두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사진을 찍은 게 있는데, 우선 그거라도 보시겠어요?”

윌리의 불안한 마음을 느낀 오한결이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

슬쩍 민망한 표정으로 윌리가 오한결의 휴대폰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그래요? 어디 봐요.”

좀 전까지 온갖 핑계를 대며 귀찮은 표정을 짓던 윌리가 타이론의 작품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참을 말없이 집중하던 윌리의 눈빛에서는 순수한 예술을 접했을 때 발산하는 묘한 긴장감이 묻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오한결은 윌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최하늘은 평소 잘 삐지는 윌리의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에 몹시 놀랐다.

‘그래, 잊고 있었어. 윌리도 예술가인데 말이지.’

비록 행정업무에 재능이 없고 조금만 일이 복잡하면 투덜대기 일쑤였지만 그의 전공은 사실상 순수 예술이지 않은가?

뉴욕의 대표 명문대에서 학위를 소지할 만큼 예술 이론도 정통한 인재였던 것이다.

앤드류 같은 예술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작가들의 그늘에 가려져서 그렇지 분명 윌리 정도면 자라나는 새싹인 타이론을 이끌어줄 능력이 충분할 것이다.

‘역시 오한결 작가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예상했구나.’

모두 숨을 죽이고 윌리가 작품을 감사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 윌리가 고개를 들고 기대에 부푼 사람들에게 한마디 했다.

“너무 엉망이에요. 기본적인 그림에 대한 이해도 없고.”

그 말을 들은 타이론이 무척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자 최하늘이 당황하며 윌리를 째려봤다.

“아니…….”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윌리의 말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임이 틀림없습니다.”

민망해진 최하늘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고 타이론도 그제야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윌리가 여전히 감동 받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3년 전부터 대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틈틈이 영재 교육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이 정도의 재능을 보인 학생은 굉장히 보기 드물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처음 봤습니다. 왜 오한결 작가님이 이 아이를 추천했는지 알 것 같군요.”

오한결과 윌리가 타이론의 낙서를 극찬하자, 솔직히 여전히 그게 무슨 예술인지 잘 모르겠던 최하늘도 작품을 억지로 칭찬하기 시작했다.

“역시 윌리랑 저랑 같은 생각이군요. 저도 타이론의 낙서를 보자마자, 자유로운 영혼의 일탈이 느껴지더라고요. 뭐랄까, 색감에서 느껴지는 희로애락이랄까? 그런 거 있잖아요. 규칙도 없이 무작정 그어진 선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짜릿함?”

윌리가 특유의 째려보는 눈빛으로 최하늘을 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혀 공감하기 힘들군요.”

“!!”

자신의 거짓말을 노골적으로 지적당한 최하늘은 몹시 붉어진 얼굴로 윌리를 노려봤다. 그도 최하늘의 변화를 눈치채고 고소해 죽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오한결은 타이론의 여러 작품을 휴대폰으로 보여준 뒤 윌리에게 부탁을 했다.

“타이론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분명 윌리라면 이 아이를 언젠가 예술계의 거장으로 키울 수 있을 겁니다.”

오한결의 이 한 마디에 윌리가 상당한 용기를 얻었다. 그간 작가로서 뚜렷한 재능을 보이지 않았지만 재능이 뛰어난 원석을 발견해 그들을 훌륭한 작가로 키우는 일에는 혹시 자신이 적성이 있지 않을까 최근에 생각해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뉴원 애비뉴.’

생각조차 하기 힘든 공포스러운 곳에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윌리는 원작을 정말로 보고 타이론을 자신이 맡을지는 그때 결정하고 싶었다.

윌리가 타이론에게 물었다.

“뉴원 애비뉴는 아직도 무섭니? 내가 무섭다는 게 아니라, 소문이 그런 거라서 오해는 하지 말아줘. 어쨌든 내가 직접 원작을 봐야겠으니까. 실물에서 느껴지는 디테일과 아우라를 직접 와야 너를 맡을지 확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주 짧게 고민하던 타이론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좀 무서울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가끔 총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그것도 매일 그런 건 아니니까.”

“!!”

재빨리 윌리가 체념한 표정을 짓자 불안해진 최하늘이 불쑥 끼어들었다.

“괜찮을 거예요, 윌리. 저도 며칠 전에 갔다 왔는데, 이렇게 살아왔잖아요.”

윌리가 팔짱을 끼고 최하늘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근데 최하늘 씨. 만약 내가 원작을 보러 간다면 혼자 갈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네? 아……. 당연히 앤드류 교수님과 같이 가시겠죠. 두 분은 항상 붙어 다니니까요.”

“아닌데요.”

“그럼……?”

“오한결 작가님과 최하늘 씨랑 같이 갈 겁니다.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윌리의 말을 들은 최하늘은 정신이 어찔해지는 것 같았다. ‘뉴원 애비뉴’에서 마치 총성이 들려오는 것 같고 그때 오한결과 최하늘을 둘러싼 덩치 큰 갱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는 것 같았다.

‘절대 거기를 다시 갈 수는 없어!’

하지만 오한결은 최하늘의 마음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좋아요. 윌리가 타이론을 맡아 준다면 기꺼이 ‘뉴원 애비뉴’에 같이 가겠어요.”

사실 이 말에 가장 놀란 건 최하늘이 아니라 윌리였다. 그는 절대로 거길 갈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뉴욕 최대 슬럼가에 같이 가자고 하면 오한결이 거절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대화를 조용히 듣던 타이론이 겁에 질린 거구의 윌리를 보며 킥킥 웃음을 흘렸다.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최하늘은 처음으로 오한결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작가님!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요. 그때도 엄청 위험했었는데, 또 그 슬럼가를 가자고요? 저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어요.”

“안전하게 갔다 오면 되잖아요.”

“아, 너무 답답하네요. 거긴 안전한 곳이 아니에요.”

상상만 해도 공포심이 느껴진 최하늘이 급기야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그런 최하늘에 당황하던 오한결이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제가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요?”

“뭔데요……?”

“토마스 청장 알죠? 그때 뉴욕 경찰서에서 봤던? 그 사람에게 우리 경호를 부탁해볼게요.”

방금까지 우울했던 최하늘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 방법이 있었군요. 그렇게 된다면야 너무 좋죠.”

오한결이 휴대폰에서 토마스 청장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한결은 청장에게 슬럼가에 거주하는 재능있는 10대 예술가와 그의 미래에 대한 깊은 얘기를 나눴다.

“청장님, ‘뉴원 애비뉴’ 경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청장을 대답을 들은 오한결이 전화를 끊고 최하늘을 쳐다봤다.

“직접 동행해 주신대요. 토마스 청장도 타이론의 작품을 보고 싶다네요.”

“끼약! 너무 좋아요!”

오한결이 전해준 기쁜 소식을 윌리에게 전하려고 최하늘이 휴대폰을 드는 순간, 그녀가 멈칫했다.

‘아니지, 굳이 빨리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 더 긴장하고 있으라고. 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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