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NYPD
뉴욕 경찰서 근처에 도착한 오한결과 최하늘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순찰차와 곳곳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상당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사건이 터졌는지, 덩치가 큰 경찰관들이 총을 소지한 채 재빨리 차를 타고 도로를 빠져나갔다.
저 멀리서 취객이 경찰관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최하늘이 말했다.
“세상에, 살면서 이런 곳에 올 줄은 몰랐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긴 안전한 곳이니까요.”
오한결은 최하늘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지만 최하늘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너무 멋져서요! 이것이 바로 NYPD인 거죠? 세상에, 무슨 영화 같아요.”
다부진 체격의 여자 경찰들이 그룹지어 움직이자 최하늘이 더 흥분했다.
“저기 보세요! 와, 범인은 정말 꼼짝 못하겠네요.”
그런 최하늘을 모습이 웃긴지 오한결이 피식 웃고는 그녀를 데리고 뉴욕 경찰서 내부로 들어갔다.
로봇 같은 무표정의 경찰이 오한결과 최하늘이 방문한 목적을 묻더니, 잠시 신원 조회 후 중년의 경찰관에게 데리고 갔다.
아마도 집에 들어간 지 오래된 듯 꼬질꼬질하고 거친 피부의 중년 경찰관이 한숨을 푹푹 쉬며 오한결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보호자가 아니군요.”
“네, 전화로 말씀드렸듯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학생입니다.”
오한결의 설명에 더욱 한숨을 푹푹 쉬던 경찰관이 최하늘을 힐끗 바라봤다.
“그럼 그쪽도 마찬가지겠네요.”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와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경찰들을 호기심으로 구경하던 최하늘이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아, 네……. 타이론 학생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몰라요. 근데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설마 그거?”
“그거?”
“왜 있잖아요. 영화에서 나오는 갱들의 세력 다툼? 아니면 설마 마약? 어머! 어떡해! 그게 엄청 심각한 거잖아요.”
최하늘의 말에 답답함을 느낀 경찰관이 마른 세수를 하고 대답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거 같은데요. 물론 그런 사건이 적지 않지만 타이론은 그렇게 거친 아이가 아니에요. 그 아이는 지하철에 낙서를 하다가 잡혀 왔어요. 글쎄 누가 신고를 했지 뭡니까. 하, 다른 일도 바쁜데…….”
생각보다 중범죄가 아니라는 생각에 오한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곧 풀려나겠군요.”
“네, 그럴 겁니다. 하지만 타이론은 현재 혼자 살고 있더라고요. 할머니가 있다고 하는데 일 때문에 다른 지역에 살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타이론의 신원을 보증할 사람이 없어요.”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오한결의 말에 경찰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관계도 아니라면서요? 그리고 당신들 같은 관광객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한결의 진심을 이해한 최하늘이 경찰관을 설득해 보려고 애썼다.
“아, 사실은 저희는 관광객은 아니고요. 출장을 왔어요. 그리고 명일문화재단 소속이라 신원도 확실하고요. 그러니까 좀 봐주면 안 될까요?”
예술에 관심도 없고 사실상 빠듯한 경찰 생활에 치여 사는 중년의 경찰관은 문화재단이나 기타 예술 단체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은근히 자신감을 내비치며 소속을 밝히는 최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네? 어디라고요? 뉴욕에 예술 단체가 한 둘인가?”
“명일문화재단이요. 한인타운 근처에 뉴욕지부도 있는데 몰라요?”
중년 경찰관이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을 하자, 그 옆에 앉은 동료 경찰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봐, 거기 있잖아. 유일하게 건물을 통째로 사무실로 쓰는 곳. 붉은 벽돌 건물.”
“아! 거기 알지! 한국인들이 만든 유명한 단체라던데.”
최하늘이 어깨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맞아요. 그 정도는 안 되나요? 지하철에 낙서 좀 했다고 이런 험한 곳에 10대 아이를 잡아두면 어떡해요? 문화재단에서 보증할 테니까 풀어주세요.”
내부적으로 알아보겠다고 말한 중년 경찰관은 오한결과 최하늘을 자리에 앉혀 놓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30분이 흘렀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최하늘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유리 벽 너머로 중년 경찰관이 동료들과 커피를 들고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자는 걸까요? 이런 식으로 업무 처리하는 게 어딨어요. 빨리빨리 처리해 줘야 하잖아요.”
“빨리 빨리는 한국에서나 통하지 여긴 어림도 없죠.”
오한결이 체념한 듯 말하자, 최하늘이 팔을 걷어붙이고 대답했다.
“사실 제가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제 도저히 못 참겠어요. 문화재단이 얼마나 막강한 네트워크가 있는지 뉴욕 경찰들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강철 지부장님께 연락 드릴게요. 그러면 한 번에 해결해 주실 거예요.”
오한결은 처음에 그녀를 말렸지만 10대인 타이론이 혼자 이곳에 잡혀 와 떨고 있을 거를 생각하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요. 해결해 주세요, 하늘 씨!”
흥분한 최하늘은 강철 지부장에 전화를 해 전후 사정을 모두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곳 사무실에 있는 경찰관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이 떠들었지만 모두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을 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여전히 담당 경찰관은 저 멀리서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삼십 분이 흐르자, 경찰서 내부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경찰관들이 분주하게 주변을 정리를 했고 담당 중년 경찰관도 헐레벌떡 뛰어와 옷을 단정히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오한결과 최하늘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책상에 앉아 머리를 빗고 면도까지 끝마쳤다.
잠시 뒤, 상당한 카리스마를 가진 남성이 당당한 걸음으로 경찰서로 들어왔다. 그러자 일동 기립한 채 그에게 경례를 하는 게 아닌가.
경찰서 최고참이 그에게 달려가 경례를 했다.
“청장님! 오셨습니까!”
토마스 청장은 매의 눈으로 사무실 곳곳을 훑으며 대답했다.
“수고가 많습니다. 뉴욕 시민들이 여러분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 순간, 토마스 청장이 오한결을 발견하고는 몹시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오한결 작가님!”
중년의 담당 경찰관은 토마스 청장이 오한결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무엇보다 토마스 청장의 눈빛에서 감동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자 그는 그제야 뭔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분위기가 흘러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이, 설마…….’
하지만 애써 부정하려고 해도 중년의 경찰관은 자신의 몸이 덜덜덜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토마스 청장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한결 작가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물론 우리의 만남은 처음이 아닌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지난번 시장님이 주최하신 만찬에서 오한결 작가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만, 수많은 유명 인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아마도 저를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슬쩍 최하늘과 눈이 마주친 오한결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토마스 청장님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예술에 관심이 많으시다고요.”
“그럼요! 제가 경찰 생활하면서 나름 돈이 생길 때마다 작품을 모아왔습니다. 제 꿈이 뭔지 아십니까? 언젠가 오한결 작가님의 작품을 구입하는 거예요. 뭐, 사실상 엄청난 부자가 돼야겠지만 꿈이란 꿔야 제맛 아닙니까. 하하.”
수다스러운 청장이 더 말을 시작하기 전에 오한결이 본론을 말했다.
“이곳에 타이론이라는 재능있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아직 10대라서 빨리 집으로 돌려보냈으면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신원을 보증할 수 없는 입장이라서요. 방법이 없을까요?”
청장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제가 보증하죠!”
그렇게 말한 청장이 고개를 돌려 담당 경찰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학생을 풀어주세요. 보증인을 저로 하시고요. 그리고! 오한결 작가님과 잠시 담소를 나눌 시간이 되나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담당 경찰관이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 오한결을 무시하고 그에게 무례를 범한 사실을 눈치챈 걸까?
하지만 청장에게서 나온 말은 그의 걱정과 정반대의 말이었다.
“듣자 하니, 오한결 작가님과 여기 계신 문화재단 직원분께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셨다고요. 문화와 예술의 도시 뉴욕 경찰답게 아주 처신을 잘 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담소를 나누며 앞으로 경찰 생활의 미래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오! 물론입니다.”
담당 경찰관은 고맙다는 눈빛을 최하늘에게 보내며 대답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청장과 얘기를 나눈 오한결은 타이론을 데리고 경찰서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태워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두 사람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호텔 VIP 라운지에 오한결과 최하늘, 데이비드 오 교수가 모여서 지난 밤 있었던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타이론이란 학생이 그렇게 재능이 뛰어나단 말이지?”
“네. 아직 그림을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어서 미숙한 실력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아이의 예술가로서 성장 가능성을 믿습니다.”
오한결의 확고한 말에 최하늘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어린아이 같은 낙서일 뿐인데 왜 저렇게 오한결 작가는 확신을 하는 걸까?
‘예술은 정말 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아예 모르겠단 말이지.’
오한결의 열정에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뉴욕에 출장으로 온 걸세. 그 아이를 책임질 수 없어. 아마도 작가로서 성장하는 건 그 아이의 몫이겠지. 이곳은 뉴욕 아닌가? 재능이 있다면 어떻게든 기회를 잡을 걸세.”
“아마도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새벽 풀이 죽은 채로 택시에 올라타던 타이론의 얼굴이 생각난 최하늘이 조심스럽게 오한결 편을 들었다.
“맞아요. 자그만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요.”
최하늘의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깊은 침묵을 유지하며 각자 생각에 빠져들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여전히 오한결이 무리한 일을 벌인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최하늘은 강철 지부장에게 부탁을 해볼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하늘은 타이론이 그린 그림이 정말 예술인지 확신할 수 없어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가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오한결이 자신 있게 의견을 말했다.
“앤드류에게 부탁해보면 어떨까요?”
“아! 그렇지. 앤드류는 뉴욕대에서 예술 영재 센터 원장도 겸하고 있으니까.”
오한결의 말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최하늘의 생각은 달랐다.
“뉴욕대 영재 센터는 정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만 입학하는 곳이에요. 그 말은 체계적인 예술 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근처에도 못 간다는 말이죠. 그게 현실이에요.”
오한결이 고개를 갸웃했다.
“꼭 영재 센터를 들어가야 하나요?”
이렇게 질문하자 최하늘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아마, 모두 모르실 거예요. 저도 최근에 자료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요. 워낙 개인적인 청탁이 많아서 앤드류가 이렇게 공언했어요. 절대로 학생을 개별적으로 만나지도 관리하지도 않겠다고요. 오직 영재 센터에 입학하는 학생만 앤드류를 만날 수 있어요.”
이제야 그 사실이 생각난 데이비드 오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랬어.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면 우리로선 존중해주는 게 맞겠지.”
잠시 생각을 하던 오한결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윌리에게 부탁해보죠. 윌리는 뉴욕대 조교로 활동하면서 강연도 하잖아요. 그리고 누구보다 예술계에 발이 넓고요. 윌리라면 그 아이를 잘 지도해 줄 거예요.”
윌리가 거론되자 최하늘이 펄쩍 뛰었다. 더는 그 삐돌이와 업무를 진행하고 싶지 않았던 최하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더 강하게 거부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절대 안 돼요!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윌리가 분명 타이론을 괴롭힐 거라고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윌리가 그렇게 못됐나요?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아무튼, 안 돼요.”
“이번 뉴욕 출장을 준비하면서 윌리와 가장 친분을 쌓은 사람은 하늘 씨잖아요. 지금 타이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윌리 밖에 없어요. 적어도 부탁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 안 되는데…….”
하지만 오한결과 데이비드 오 교수가 간절하게 바라보자, 최하늘은 결국 고집을 꺾고 이렇게 말했다.
“얘기는 해볼게요. 기대는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