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스타 앵커
어제 슬럼가의 무서운 경험이 하나도 생각 안 날 정도로 오늘 일정에 기대가 큰 최하늘은 들뜬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호텔 VIP 라운지에 아침 일찍부터 나온 최하늘은 콧노래를 부르며 오늘 일정표를 정리하고 있었다.
‘CNN 인터뷰가 오후에 있고. 어머! 너무 기대돼.’
최하늘은 인터넷에서 오늘 인터뷰를 진행할 CNN 앵커 사진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최근 연예인급 인기를 누리고 있는 남성 앵커로 전 세계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샤프하고 지적인 인상에 단단한 체형까지.
최하늘은 사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너무나 완벽해. 드디어 오늘 만나게 되는구나.’
잠시 꿈을 꾸듯 공상에 젖어 있는데, 라운지 입구를 지나친 데이비드 오 교수가 최하늘에게 다가와 말했다.
“하늘 씨. 무슨 기분 좋은 일 있나요? 어깨를 들썩들썩하시네요.”
“아뇨……. 잠이 덜 깼는지 어깨가 뻐근하네요.”
“그래요? 저는 괜찮은데요. 이런, 너무 피곤하신가 보구나. 오늘은 좀 쉬면 어때요? CNN 출장은 제가 오한결 작가를 데리고 다녀올게요.”
“안 돼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말에 놀란 최하늘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소리쳤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리자 민망함을 느낀 최하늘이 변명을 이어갔다.
“그게…… 저는 완벽한 일 처리가 좋거든요. 제가 오한결 작가님을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역시 최하늘 씨는 일말의 사심도 없이 업무에 집중하는군요. 좋습니다. 완벽해요!”
최하늘은 모니터 화면에 보이는 CNN 앵커 사진을 슬쩍 내리며 대답했다.
“그럼요. 일할 땐 일만 생각해야죠. 호호.”
최하늘이 모든 일정을 더블 체크하고 CNN 인터뷰 준비를 끝내자, 오한결이 살짝 피곤한 얼굴로 라운지에 들어왔다.
서류를 검토하던 데이비드 오 교수가 돋보기 안경을 내리고 말했다.
“이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더니 잠을 잘못 잤나? 얼굴이 반쪽이 됐어.”
“어제 일 때문이 아니라 로건 때문에요. 어젯밤에도 연락이 와서는 술에 취해서 얼마나 수다를 떨던지, 기가 완전히 빨렸네요.”
최하늘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분 되게 젠틀한 이미지였는데, 술 먹으니까 완전 수다쟁이던 데요.”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어제 악몽 같던 술자리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오늘 CNN 인터뷰죠? 장소가 어디랬죠?”
“문화재단 뉴욕지부요. 거기에 방송 스튜디오가 있거든요.”
“앵커는 윌슨이랬죠?”
“네, 최고의 인기남. 전 세계 앵커 인기 순위 1등. 완벽한 발음과 전달력을 지닌 분입니다.”
최하늘이 속사포 같은 랩으로 설명하자, 오한결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하늘 씨가 진짜 팬이군요. 오늘 그래서 기분이 좋아보였네요.”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몰라요? 티가 팍팍 나는데.”
“…….”
* * *
문화재단 뉴욕지부에 도착하자, 강철 지부장이 2층 스튜디오에 인터뷰 준비를 완벽히 마쳐놓았다.
이제 막 최하늘과 함께 도착한 오한결을 보며 강철 지부장이 말했다.
“두 시간 후면 생방송 인터뷰인데, 안 떨리나요?”
“몇 번 해서 그런지. 사실 편안합니다. 하하.”
오한결의 여유가 마음에 든 강철 지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CNN 인터뷰는 원래 일정에 없던 건데, 덥석 섭외에 응할 줄 몰랐어요. 사실 CNN에서 요청이 왔을 때 거절할 생각이었거든요.”
오한결은 강철 지부장의 말에 히죽 웃었다. 지난번 교육방송에서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인 후 대중의 여론이 악화됐을 때 CNN을 이용해 그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왠지 CNN 부탁에는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CNN 인터뷰는 손해 볼 게 아니잖아요. 하하.”
잠시 뒤 수많은 방송 스태프와 함께 앵커가 문화재단에 도착했다. 그들은 프로답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더니 금세 완벽한 인터뷰 준비를 마쳤다.
메이크업을 받고 나온 윌슨이 오한결을 발견하고 악수를 청했다.
“영광입니다. 오한결 작가님.”
윌리의 손을 잡은 오한결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소문대로 엄청 잘 생기셨네요. 저도 영광입니다. 참, 여기 문화재단 직원 소개할게요. 최하늘 씨고요. 윌슨 씨 팬입니다.”
갑작스러운 오한결의 행동에 최하늘의 얼굴이 당근처럼 붉어졌다.
윌슨이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최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영광이네요. 부족한 게 많은 저를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각 같은 윌슨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자 최하늘이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급기야 말을 더듬어 버렸다.
“감… 사… 합… 니… 다….”
방송 준비를 알리는 스탭의 목소리가 들리자, 오한결과 윌슨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오늘만큼은 오한결의 얼굴보다 윌슨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최하늘은 은근히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상당한 짜릿함에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순간, 최하늘과 눈이 마주친 윌슨이 히죽 웃더니 살짝 윙크를 했다.
“!!”
[자, 방송 들어갑니다. 원, 투, 쓰리!]
생방송 사인이 뜨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오한결과 윌슨에게 쏠렸다. 그래서 다행인 걸까. 윌슨의 윙크를 받은 최하늘의 휘청거리는 하체는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윌슨: 여러분 안녕하십니다. CNN 앵커 윌슨입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분을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할까 합니다. 이분은 CNN과 인연이 매우 깊은데요, 몇 달 전에 세계적인 예술 평론가 ‘마이크 폴’과 인터뷰를 해서 아마 여러분들도 아주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윌슨이 오한결 쪽으로 몸을 틀고 말을 이었다.
[윌슨: 세계적인 스타 작가로 성장하고 계신 오한결 작가님을 모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이렇게 뉴욕에 직접 오시다니, 뉴욕 예술계가 지금 들썩들썩합니다.]
[오한결: 안녕하세요, 오한결입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윌슨: 저는 굉장히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쭙겠는데요. 지난 프랑스 방문 때 여러 훌륭한 작품들을 그리시고 그것을 프랑스에 기증까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상 미국은 그 점을 몹시 부러워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 오한결 작가님의 미국 방문을 몹시 기대했는데, 사실상 현재까지 특별한 작품 활동을 하지 않으셨더군요. 미국에겐 그런 선물은 없는 겁니까?]
윌슨의 노골적인 질문에 최하늘이 숨이 턱하고 막혔다.
‘잘생긴 건 잘생긴 거고, 질문이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오한결: 하하하. 뉴욕에서도 작품을 안 한 건 아닙니다. 황금빛 예술가와 공원 풍경을 작품으로 남겼으니까요. 하지만 모두 개인에게 선물로 줬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죠.]
[윌슨: 이런! 그 작품을 받은 분들은 정말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공식적인 활동 계획은 없으신가요?]
한껏 기대에 부푼 윌슨의 얼굴을 오한결이 쳐다보며 말했다.
[오한결: 있죠. 빅스퀘어 빌딩 전광판에 작품을 상영할 예정입니다.]
[윌슨: 세상에! 그거야말로 뉴욕의 최대 이벤트 아닙니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군요. 그렇다면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작품의 주제나 방향을 살짝 엿들어봐도 될까요?]
‘작품에 대한 주제나 방향이라…….’
오한결은 윌슨의 기대하는 눈빛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회귀 후 뉴욕에서 다시 만난 아내 진태희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아닌가. 오로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이번 작품은 그녀가 평소 몹시 사랑했던 작품을 보여줄 예정이다.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커다란 전광판에 그 작품이 나온다면 태희도 분명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CNN 인터뷰에 응한 것도 이 방송을 태희가 보고 자신이 만든 작품을 반드시 봤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오한결: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을 그릴 예정입니다. 물론 제가 재해석을 다시 해서요.]
[윌슨: 와우! 모네요? 전혀 예상 밖인데요. 너무 훌륭한 선택이긴 합니다만, 그 이유도 무척 궁금하군요. 뉴욕하고 모네는 사실상 어울리지 않아서요? 저는 솔직히 작가님께서 뉴욕을 대변하는 파격적인 현대 예술을 할 줄 알았거든요.]
[오한결: 사실 이번 작품은 제 사심이 들어갔어요. 누군가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라고 해두죠.]
[윌슨: 와우! 몹시 궁금하군요. 그게 누굴까요? 유명한 분입니까? 힌트를 주시죠.]
[오한결: 글쎄요. 굳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하하.]
[윌슨: 하하하. 좋습니다. 프라이버시는 지켜드려야죠. 멋진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오한결의 말을 들은 최하늘은 갑자기 우울함에 빠졌다. 분명 그 마지막 편지는 자신에게 보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굴까!
심란한 마음이 들자, 윌슨의 잘생긴 얼굴도 이제는 꼴 보기 싫어졌다.
‘윌슨 저 인간은 왜 이렇게 까부는 거야! 윙크는 개뿔!’
* * *
뉴욕 새벽.
자정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거센 바람에 빗물이 휘몰아치며 호텔 창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하지만 바쁜 일정은 소화한 오한결은 그런 요란한 소음 따위 무시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띠리리. 띠리리.
갑작스럽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잠이 깬 오한결은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 액정에 최하늘 이름이 보였다.
‘헉!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급하게 정신을 차린 오한결이 침대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하늘 씨. 무슨 일이 있어요?”
[작가님! 큰일 났어요. 지금 바로 경찰서로 가야 해요!]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오한결은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새벽에 왜 경찰서를 가요? 그것도 뉴욕에서!”
수화기 너머로 최하늘의 깊은 한숨이 들렸다.
[그게……. 타이론 기억나시죠? 슬럼가에서 봤던 그 10대 아이 말이에요. 낙서 하던 그 아이요.]
오한결의 머릿속에서 타이론의 얼굴과 그의 작품이 빠르게 스쳐갔다.
“물론이죠. 근데 갑자기 그 아이가 왜요?”
[에휴, 걔가 무슨 범죄에 휘말렸나 봐요. 지금 경찰서에 잡혀 왔는데, 보호자가 없어서 그 아이 주머니에 있던 명함으로 전화를 한 거래요. 기억나시죠. 작가님이 저보고 명함 주라고 했던 거요.]
약간 원망 섞인 최하늘의 목소리를 들은 오한결은 미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어머! 너무 그렇게 나오시면 제가 민망하잖아요. 호호. 그러지 말고 우리 빨리 경찰서에 가봐요.]
“아, 그래야겠네요. 근데, 무슨 죄명으로 잡힌 거래요?”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최하늘이 대답했다.
[기억이 안 나요. 경찰이 뭐라고 한 거 같은데. 제가 비몽사몽 중이었거든요.]
“아……. 큰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아, 이건 기억나요. 신원을 보증만 한다면 타이론을 바로 집으로 돌려 보낸다고 했어요. 미성년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죄명이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아, 그럼 다행이네요. 하늘 씨는 호텔에 계세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엥? 무슨 소리예요. 같이 가야죠. 제가 명함을 줬는데. 이건 제 일이기도 해요.]
최하늘의 말에 고마움을 느낀 오한결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로비에서 봬요.”
[네, 바로 내려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