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낙서
전날 재즈클럽에서 로건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신 오한결과 최하늘은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다행히 공식 일정이 없었던 관계로 두 사람은 뉴욕을 좀 더 구경해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뉴욕 주민들의 삶을 보고 싶었던 오한결과 최하늘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방향을 잃고 지저분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곳은 뉴욕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허름한 건물들로 가득했다.
오래된 건물은 철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페인트가 벗겨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쓰레기통에서는 오래된 쓰레기가 썩어 악취가 진동했다.
“길을 잘못 들어 슬럼가로 왔네요.”
주변의 음침한 기운에 잔뜩 몸을 움츠린 최하늘이 작게 속삭였다
“그런 것 같네요. 그래도 꽤 이색적인 도시 풍경이군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오한결을 쳐다보며 최하늘이 눈을 크게 떴다.
“작가님! 여긴 뉴욕의 대표적인 우범지역이라고요. 우리 같은 동양인들에게 이 마을 사람들은 절대 우호적이지 않아요.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요!”
냉랭한 동네 분위기에 조금은 압도된 오한결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죠.”
두 사람이 서둘러 방향을 틀고 동네 어귀로 나가려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히히히.”
오한결과 최하늘이 동시에 고개를 들자, 붉은 벽돌 건물 2층 창문에서 흑인 할머니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무서워? 으흐흐흐. 그럼 어여 도망가야지!”
매섭게 노려보는 할머니의 눈빛에 압도된 최하늘이 얼음처럼 굳어 버리자, 오한결이 그녀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긴장 풀어요. 지금은 낮이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겠죠? 근데 여긴 집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삭막한 거죠? 그래서 더 무서워요.”
할머니는 창틀에 몸을 편히 기댄 채 오한결과 최하늘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너무 무서워하지 말게나. 아가씨가 겁이 많구먼.”
민망해진 최하늘이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할머니께 실례를 범했네요.”
“에이, 그건 아니지. 자네들 같이 귀엽게 생긴 청년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잘 아는걸.”
“네?! 그게 무슨…….”
“몸조심 하라는 얘기야. 목숨이 하나 더 있다면 뭐 상관 없겠지만. 빵야! 으흐흐.”
“끼약!!”
할머니가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자, 최하늘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오한결이 가까스로 그녀를 진정시킨 후 말했다.
“할머니가 장난치신 거예요. 그러니까 진정 좀 하세요.”
할머니는 장난이 아닐 수 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최하늘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최하늘이 너무 오돌오돌 떨자, 할머니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내가 너무 했나? 오랜만에 사람들과 대화해서 농담이 심했구먼. 미안해요.”
할머니의 사과가 효과가 있었는지, 최하늘은 최대한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겁이 많아서 그래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머니.”
여전히 파랗게 질린 최하늘의 어깨를 감싼 오한결이 그녀를 데리고 슬럼가를 벗어나려는데, 저 멀리 회색 담벼락 앞에 한 흑인 청년이 무언가 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 씨, 저기 보이시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빼꼼히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던 할머니가 오한결의 말을 듣고 잽싸게 대답했다.
“저 아이는 타이론이네. 가여운 아이지. 하긴 이곳에 사연 없는 아이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 하지만 저 아이는 좀 특별하다고 할까?”
“어떤 점에서요?”
최하늘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할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낙서를 기가 막히게 하거든. 난 그렇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낙서는 처음 봐. 분명 저 아이가 건너편 돈 많은 마을에 태어났으면 크게 됐을 아이라고 생각해.”
그러고 보니 건물 곳곳에 그래피티 흔적이 돋보이는 이곳은 낙서가 일상화된 듯 보였다. 할머니의 말에 최하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 동네 곳곳에 낙서 천지인데요. 근데 저 아이 낙서가 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으허허허. 난 그런 거 잘 몰라. 근데 우리 동네 사람들이 저 아이 별명을 지어줬다우. ‘리틀 바스키아’라고.”
‘바스키아’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운 오한결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저 멀리서 벽에 그림을 그리는 청년을 바라봤다.
바스키아는 장난스러운 ‘낙서’ 그림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재 흑인 아티스트였다. 10대 때부터 지하철에 그래피티를 그리며 작품 활동을 했는데, 그의 작품은 흑인의 소울 뮤직과 닮아 오묘하고 심금을 울리는 분위기를 풍겨서 유명해졌다.
흑인 영웅, 죽음 등 충격적인 소재를 다뤘고 본인의 비극적인 삶 속에서 생존본능에 이끌린 충동적인 작품을 남겼다.
오한결은 그의 작품이 밝은 색채를 쓰면서도 고독감이 느껴져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
멍하니 생각에 잠긴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할머니가 소리쳤다.
“궁금하면! 직접 가서 만나봐!!”
할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은 오한결과 최하늘은 슬금슬금 그림을 그리고 있는 타이론에게 다가갔다.
붉은 모자를 눌러쓴 그는 무척 왜소했고 딱 봐도 10대 후반으로 보였다.
손에 락카를 쥐고 대충 선을 찍찍 긋고 있던 타이론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오한결과 최하늘을 경계하며 말했다.
“뭐죠? 이 동네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지나가다가. 어머, 동네 참 예쁘네요. 호호.”
이 상황이 어색한 최하늘이 쭈뼛쭈뼛 대며 대답했다.
“이 동네가 예쁘다고요? 진심이에요?”
너무 삭막해서 지금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동네 분위기에 최하늘이 더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오한결의 관심은 타이론의 그림에 있었다.
정말 아무렇게나 찍찍 그어놓은 선이며, 미숙한 어린아이가 딱 그렸을 법한 사람 얼굴이 눈에 띄었다.
오한결이 자신의 그림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이 유쾌하지 않은 타이론이 말했다.
“뭐하시는 분이시죠? 왜 제 작품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요?”
“그림이 꽤 독특하네요. 주로 낙서로 예술 활동을 하나 보죠?”
타이론은 외지인이 자신의 작품에 흥미를 보이고 있는 모습에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껏 그 누구도 자신을 예술가로 취급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리틀 바스키아’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건 사실상 벽에 낙서를 좋아하는 자신을 놀리는 동네 주민들이 붙여준 별명에 지나지 않았다.
“무슨 예술이에요? 그냥 낙서인데.”
10대 특유의 반항심이 생겼던 걸까? 타이론의 오한결의 질문에 호감을 느꼈음에도 마치 자신을 놀리지 말라는 투로 대답했다.
“보면 볼수록 정말 ‘리틀 바스키아’라고 불릴만 하네요. 낙서에서 나타나는 자유분방함은 말할 것도 없고 원색의 강렬한 색채와 유머러스한 그림체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생존 욕구가 보입니다.”
“!!”
처음으로 작품을 제대로 평가받은 타이론은 벅찬 감동에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해석이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했고 오한결은 그걸 해결해준 것뿐이다.
“난 예술 같은 건…….”
억제할 수 없는 본능으로 그림을 그려온 타이론은 자신이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의 꾸준한 놀림에도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건 그냥 그림이 좋아서였다.
최근 들어 혹시 자신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본 게 전부였다.
“누구시죠? 예술을 잘 아시나요?”
“이런, 소개가 늦었군요. 안녕하세요. 오한결이라고 합니다.”
“!!”
오한결이라면 타이론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뉴스에서 연일 떠들고 있는 한국에서 온 천재 예술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본 그의 얼굴이 지금에서야 생각났다.
그리고 뉴스에 짤막하게 나온 그가 뉴욕대에서 강연하는 영상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짜…… 오한결 작가잖아요!”
이제 경계를 완전히 푼 타이론은 오한결과 반갑게 악수하며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솔직히 처음이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과 이렇게 가까이 마주한 것이.
그는 마치 연예인을 만난 듯 몹시 들떠 있었다.
“대단한 재능이에요. 그 재능이 꼭 빛을 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아, 너무 감사합니다. 근데 낙서일 뿐이에요. 사실 부끄러워요.”
얌전해진 타이론은 이제야 10대 어린 학생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한결은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최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 씨, 이 학생에게 명함 하나 주시겠어요?”
“네?”
진심으로 놀란 최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오한결이 대답했다.
“재능있는 학생에게 우리가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요?”
“호…… 호호……. 그, 그럼요.”
최하늘이 억지로 웃으며 명함을 꺼내 타이론에게 건넸다. 솔직히 최하늘의 눈에는 타이론의 낙서는 정말 낙서였다. 오한결이 아무리 예술 이론을 대입해 그림을 설명해도 자세히 보면 그냥 어린아이 장난 같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명함을 받은 타이론이 매우 기쁜 표정을 짓자마자, 바로 표정이 어두워지며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어서 가세요! 여기 위험해요!”
타이론의 날카로운 말에 오한결과 최하늘이 바짝 긴장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건너편 폐허 같은 건물에서 대여섯 명의 덩치 좋은 흑인들이 건들거리며 입구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의 동네에 침입한 오한결과 최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질적 위협을 느낀 최하늘은 몸을 벌벌벌 떨며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번만큼은 강심장인 오한결조차 두려움을 잠재울 수 없었다.
“어이, 브라더!”
무리 중 리더로 보이는 덩치 좋은 흑인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오한결과 최하늘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타이론이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형님. 오셨어요? 여기 제 친구들이에요.”
눈을 가늘게 뜬 근육질 흑인 리더는 오한결을 노려보며 말했다.
“친구라고? 난 처음 보는데. 근데 꽤 돈 좀 있게 생겼네. 안 그러냐 얘들아?”
리더 뒤에 나란히 서 있던 흑인 일행들이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야, 옷도 명품이네. 어찌 알았을까? 우리가 명품을 좋아하는걸. 우하하하.”
덩달아 긴장한 타이론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에이, 형님들. 이 두 분은 그냥 가던 길 가라고 합시다. 제가 이번에 그린 그림 보여드릴게요. 자랑하고 싶네요. 형님들에게.”
흑인 무리들이 타이론의 말에 미친 듯이 웃었다.
“타이론, 우리가 네 낙서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돈과 명품이 좀 땡기네. 우하하.”
두려움이 몸을 덜덜덜 떠는 최하늘의 손을 오한결이 잡으며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이성의 끈을 놓은 최하늘이 이를 악물고 오한결에게 말했다.
“아뇨. 슬럼가는 이래서 오는 게 아니라고요. 아까 그냥 갔어야 했는데, 우리 진짜 곤란에 처한 거라고요. 안 되겠어요. 지갑에서 있는 현금을 모두 꺼내서 저들에게 주고 여기서 빨리 벗어나요.”
최하늘이 당황해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흑인 일행들은 그녀의 행동에 야유를 보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히히히히.”
이제 더는 그들의 행동을 참을 수 없던 오한결이 앞으로 나서서 소리를 지르려는데, 저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야, 이놈들아!”
놀란 오한결과 최하늘이 고개를 돌리자, 아까 건물 2층 창문에서 오한결과 최하늘에게 말을 걸던 흑인 할머니였다.
리더로 보이는 흑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여긴 왜 나왔어요?”
오한결과 최하늘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빛을 주고 받았다.
‘엄마?’
할머니는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와 흑인 갱들에게 소리쳤다.
“내가 니들 뭉쳐 다니면서 사고치지 말라고 했지! 이 두 사람은 내 손님들이니까 시비걸지 말고 저리들 가라.”
이 상황이 어안이 벙벙한 최하늘이 흑인 할머니를 쳐다보자, 그녀가 윙크하며 말했다.
“어여, 가던 길을 가요. 아니면 우리랑 더 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