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천사의 목소리
명일문화재단 이사장실.
신수진 이사장이 문화재단 사업 계획서를 검토하고 있는데, 강철 지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안녕하십니까, 이사장님. 강철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철 지부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오한결 작가 뉴욕 출장은 지부장님이 신경써 주셔서 아주 잘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너무 과찬의 말씀입니다. 뉴욕에서 만난 오한결 작가는 스스로 빛나는 사람 같더군요.]
“오호, 그래요? 정확히 무슨 뜻이죠?”
[오한결 작가는 인간적인 매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견고하고 단단한 뉴욕의 예술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고 봐야겠죠. 사실상 제가 할 일은 없었습니다.]
강철 지부장의 말에 공감하며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현듯 공모전에 당선된 오한결 작가는 누구의 도움 없이, 언제 어디서든 주인공이 되었고 그의 예술적 행보는 항상 성공적이었으니까.
어쩌면 신수진 이사장은 자신이 그를 돕는 게 아니라 그가 어떤 위대한 일을 성취할까 기대하는 관객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수진 이사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아주 무난하게 뉴욕 일정이 진행돼서 매우 기쁘네요.”
강철 지부장이 갑자기 잠깐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사실은 무척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신수진 이사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죠? 말씀해보세요.”
[페이스픽쳐스 CEO 로건이 오한결 작가에게 작품을 하나 의뢰했습니다. 그는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큰 건물인 ‘빅스퀘어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데요, 그곳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띄우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신수진 이사장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빅스퀘어 빌딩 이벤트는 신수진 이사장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행사였기 때문이다. 매년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을 스크린 영상으로 공개하는데, 그 행사의 여파는 전 세계 예술계를 매년 뒤흔들고 있었다.
“매우 놀랍군요. 문화재단에 공식적으로 요청이 온 건가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한결 작가에게 직접 의뢰한 듯 합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 두 사람이 친분이 있었나요?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그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로건의 제안에 오한결 작가가 수락한 듯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최하늘 씨에게 들었고 제가 직접 이사장님께 보고 드리는 게 맞을 듯하여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로건 쪽에 연락해서 최대한 오한결 작가에게 편의를 제공해줄 것을 약속받으세요. 그리고 행사 진행과 관련해 모든 제반 사항은 문화재단과 협의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요. 오한결 작가는 오직 작품에만 신경쓸 수 있도록 만들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사장님.]
전화를 끊은 신수진 이사장은 두 손을 고이 모으고 생각에 빠졌다.
역시 오한결 작가가 가는 곳은 그 어디든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구나.
‘한데, 이 찜찜한 기분은 뭘까?’
아무리 세계적인 기업가가 제안한 퍼포먼스지만, 어디까지나 상업적인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오한결을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기업을 대표하는 이벤트를 선뜻 수락할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는 뒷이야기가 있는 걸까?
잠깐!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최근 양 비서와 함께 뉴욕에 가지 않았나? 워낙 해외 출장이 잦아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왜 하필 이 시기에 뉴욕에 간 걸까. 이게 우연인가?
‘설마 아버지가 로건과 오한결 사이에 다리를 놓은 걸까? 정말 그랬다면 왜?’
* * *
늦은 밤이 다 돼서야 일을 마친 로건이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기지개를 켰다.
하루가 다르게 회사는 성장하고 있고 더불어 로건이 챙겨야 하고 결정할 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뛰어난 인재들이 회사에서 그를 돕고 있지만, 워낙 세계 경제가 유동적으로 변해 자신이 책임을 지고 결정할 일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업무적 압박 속에서 그를 해방시켜주는 건 언제나 예술이었다.
자신이 만든 세계 최초, 최고의 대형 스크린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스러운 예술 작품이 나오는 것 만큼 짜릿한 게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한결 작가의 작품은 로건을 엄청나게 흥분시키고도 남았다.
어쩌면 오한결 같은 작가를 평생에 걸쳐서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게 착각이라도 좋다. 오한결 작가라면 모든 게 좋으니까.’
하지만 살짝 찜찜한 일이 있다.
오한결이 요청한 음향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마이크와 초대형 스피커를 주문했는데, 그것만 봐도 가수와 협업을 하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오한결은 분명 자신의 작품을 빛내줄 초대형 가수를 섭외했을 것이다.
뉴욕은 전 세계에서 뛰어난 가수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그중 어떤 가수가 오한결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오한결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가수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로건은 엔터테인먼트 종사자들을 상대로 오한결 작품에 함께 등장할 가수를 찾았지만 그들은 전혀 들어본 적 없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섭외된 가수가 없는데 어떻게 공연을 하지?
지난 며칠을 오한결에 대한 기대와 함께 불현듯 찾아오는 불신으로 무척 괴로웠다.
‘설마,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건 아니겠지?’
또 다시 혼돈에 빠진 로건은 무작정 오한결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오한결 작가님. 다름이 아니라…….]
로건은 주절주절 자신의 고민을 오한결에게 털어놓았다. 조용히 그의 목소리를 듣던 오한결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재즈클럽으로 오세요. 제가 거기에 있거든요!”
뉴욕대 정문 앞 사거리에 있는 재즈클럽은 로건도 잘 아는 명소였다. 로건이 학생 시절 종종 친구들과 들렸던 분위기 좋은 클럽이었기 때문이다.
추억을 회상하며 설렘을 안고 재즈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로건은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오한결을 찾았다.
저 멀리 오한결이 일행들과 함박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오한결 작가님!”
로건의 등장에 오한결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한 반면, 데이비드 오 교수와 앤드류는 눈알이 튀어나올 듯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진짜 로건이잖아?’
‘뭐야! 로건이 여기에 왜 온 거지? 내가 꿈꾸나?’
두 사람이 놀라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사이, 로건은 재즈클럽 분위기에 푹 빠져 있었다.
“세상에, 오래전에 방문했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군요. 너무 좋습니다.”
무척 상기된 표정의 로건이 바 테이블의 빈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하, 재즈클럽을 잘 아시는군요.”
오한결도 로건 옆에 앉고 대답했다.
로건은 몇 년 전만 해도 철부지 청년이었다며 그때 그가 겪었던 흥미진진한 경험들을 오한결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온갖 제스처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하던 중 로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일어섰다.
“오마이갓! 산다라! 아직도 이곳에서 일하는군요!”
주방에서 나온 산다라도 로건을 알아보고 방긋 웃었다.
“이게 누구야? 로건! 잘 있었어요?”
“세상에! 나는 산다라가 다른 나라로 영영 떠난 줄 알았어요. 워낙 세계 여행을 자주 다니니까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아프리카 여행을 갔었죠?”
“정확히 기억하고 있군요. 맞아요. 아프리카에서 3년, 아시아에서 2년 있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어요. 그 사이 로건 당신은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었더군요. 처음에 놀랐다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뉴욕에선 뭐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로건이 무척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시아도 갔었군요. 그럼 한국도 갔겠군요. 고향이 한국이라고 들었어요.”
싱글벙글 웃던 산다라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한국에 안 갔어요. 그리고 저는 미국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이 아니에요!”
오한결은 산다라의 반응에 꽤 호기심을 느꼈다. 그녀와의 첫 만남 때도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한국에 대한 혐오까지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로건이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산다라는 당연히 미국인이죠. 하지만 제가 알기론 한국에서 태어났고 이렇게 한국 친구들이 많으니까 한국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태어난 곳이 중요한가요? 제 기억에 한국은 없어요. 미국에서 삶을 시작했고 지금의 부모님을 만나 사랑받고 자랐어요. 저는 뼛속 깊은 곳까지 미국인입니다.”
말을 마친 산다라가 갑자기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간의 감정 변화를 감춰버렸다. 그리고는 휴대폰에 저장된 가족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어빠, 엄마와 찍은 거예요. 참 좋으신 분이랍니다.”
사진을 본 오한결은 처음에 당황했지만 그녀가 왜 한국과 거리를 뒀는지 알 것 같았다.
부모 모두 서양인이었다. 그간 산다라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그녀는 어렸을 때 입양됐게 틀림없었다.
오한결과 로건은 사진을 보며 동시에 말했다.
“매우 행복한 가족 사진이네요.”
산다라가 여유롭게 피식 웃고는 로건을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재즈클럽은 무슨 일이에요? 옛 생각이 나신 건가요?”
그제야 자신의 방문 목적이 생각난 로건이 놀라며 대답했다.
“이런! 깜빡했군요. 오늘은 오한결 작가님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오호라. 오한결 작가님은 인기가 참 많군요. 거물급 친구들도 아주 많으시구요. 그렇다면 오늘은 제가 맥주를 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산다라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자, 오한결이 웃으며 로건에게 말했다.
“이렇게 직접 달려온 걸 봐서는 제 작품에 출연하게 될 가수가 너무 궁금했던 모양이군요.”
로건이 민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자꾸 생각이 납니다. 과연 어떤 작품이 나올지, 그게 어떻게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지 너무 궁금해요. 무엇보다 가수와 협업을 한다면, 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가수를 찾았는지도 알고 싶어요.”
“음……. 당연히 찾았으니까 제안 드렸겠죠?”
화들짝 놀란 로건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혹시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요. 뉴욕에서 활동 중에 있는 가수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갑자기 로건이 소리를 지르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로건과 오한결을 쳐다봤다. 로건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제가 뉴욕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가수를 조사했어요. 그 누구도 오한결 작가님에게 제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한 곳을 조사하지 않으셨나 보네요.”
“네? 어디를 말씀하시는지?”
“여기요.”
“여기라면? 재즈클럽?”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수수한 차림의 리나가 재즈클럽 구석 작은 무대 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리나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리나의 노래를 듣는 내내 로건의 표정은 수십 번 변하다가 이제는 아예 영혼이 탈출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노래가 끝나자 로건이 기립 박수를 치며 오한결에게 말했다.
“세상에! 제가 방금 뭘 들은 거죠? 저분은 천사입니까?”
오한결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