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다른 운명
오한결과 최하늘 그리고 윌리가 뉴욕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J피자’ 가게 앞에서 한 시간째 줄을 서고 있다.
점점 인내력이 바닥나고 있던 최하늘이 거구의 윌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오, 내가 줄 서서 먹는 걸 딱 질색하는데, 어쩜 이런 곳을 골랐을까?’
이렇게 줄을 서게 된 것은 바로 앤드류와 데이비드 오 교수 때문이었다. 공식 일정 때문에 자리를 비우게 된 앤드류는 무척 아쉬워하면서 윌리에게 오한결과 최하늘에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라고 주문했다.
‘더 특색있는 로컬푸드를 먹고 싶었는데.’
최하늘은 아쉬운 듯이 휴대폰으로 찾아둔 맛집 리스트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워낙 윌리가 자신의 취향을 믿지 못하겠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하는 통에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은 제가 알아서 두 분을 모실게요. 가장 유명하고 맛있는 집으로요!”
윌리의 취향이 물씬 풍기는 이번 식당은 피자가게였다. 사실 최하늘도 이곳이 워낙 유명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웨이팅이 기본 한 시간이라는 이곳이 별로 달갑지 않았고 이상하게 윌리가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더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우, 얄미워!’
그런 최하늘을 귀엽게 바라보던 오한결이 한 마디 했다.
“이제 몇 분만 기다리면 되겠어요. 좀만 힘내요. 하늘 씨!”
잠시 투덜대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던 최하늘이 물었다.
“작가님은 피자 좋아하시죠? 어쩌면 윌리의 선택이 맞았겠네요.”
“이곳은 워낙 유명하잖아요. 예전 뉴욕 작업실이 이 근처여서 자주 먹었어요. 도우가 쫄깃하고 치즈가 아주 고소합니다.”
최하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뉴욕에 작업실이 있었어요? 어머, 정말요?”
회귀 전 일을 아무렇지 않게 말한 오한결이 급하게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말했다.
“아……. 인터넷.”
“네?”
“인터넷에서 봤어요. 여기 오기 전에 잠깐 검색을 했거든요…….”
“아…… 인터넷……. 그럴 수 있겠네요…….”
두 사람의 찜찜한 대화가 끝나자 바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사이 줄은 점점 줄어들었다.
한겨울에도 땀을 삐질 삐질 흘리는 거구의 윌리가 입장할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흥분하며 뒤돌아섰다. 맛있는 피자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자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쫄깃한 도우에 고소한 치즈가 일품이거든요.”
“어머! 오한결 작가님과 똑같은 말을 하네요.”
윌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작가님도 와보셨군요?”
“아니, 인터넷…….”
오한결은 자신의 궁색한 변명을 슬쩍 얼버무리며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제발 그냥 넘어주면 안 될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J피자 내부는 무척 허름했다. 색이 바랜 벽에 오랜 세월 장사의 흔적이 묻어났고 낡고 오래된 탁자와 삐걱거리는 의자는 나름 이곳이 전통 있는 가게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고급 레스토랑과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게를 살피며 최하늘이 말했다.
“원래 이런 곳이 진짜 맛집이래요.”
윌리는 가게 안을 감도는 고소한 치즈 냄새에 황홀한 표징을 지었다.
“아, 이 냄새를 향수로 만들면 대박 날 텐데.”
그 말을 들은 최하늘이 경악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 그건 아니죠. 그래도 음식 냄새를…….”
말을 하는 도중 찜찜함을 느낀 최하늘은 윌리의 화난 표정을 보는 순간 입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는 은근히 예민하고 잘 삐치는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좋네요. 피자향 향수. 집에서도 피자가게 느낌도 내고……. 호호호.”
그런 최하늘을 보며 오한결도 억지로 웃어 보였다.
커다란 피자 세 판이 테이블에 놓고 연이어 스파게티도 인원별로 나오자 최하늘이 몹시 당황해하며 물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어요?”
이미 피자 두 조각을 겹쳐 하나로 만든 후 입에 쑤셔 넣고 있던 윌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기면 제가 먹으면 되죠. 그건 걱정 말아요.”
피자 한 조각을 베어 문 최하늘이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이미 자신과 오한결이 남길 걸 계산하고 주문한 거였구나.
‘하긴 저 정도 덩치면 세 판이 적을 수도 있겠는걸.’
순간 오한결과 눈이 마주친 최하늘이 배시시 웃자, 오한결도 그녀의 의중을 이해하고 같이 미소지으며 윌리에게 말했다.
“마음껏 먹어요. 윌리.”
하지만 먹는데 정신이 팔린 윌리는 오한결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얼핏 게걸스럽게 피자를 먹어치우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부스러기 하나, 소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윌리를 신기하게 보던 두 사람도 피자와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피자 맛에 놀란 최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한결을 쳐다보자, 그가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기하네, 정말 작가님이 말한 그 맛이잖아. 역시 인터넷…….’
“여기요, 여기!”
그렇게 맛에 푹 빠진 두 사람이 대화를 잊고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윌리가 직원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바쁜 직원은 그런 윌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다른 테이블에 서빙하기 바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최하늘이 물었다.
“왜요? 뭐 필요해요?”
“핫소스가 다 떨어졌어요.”
최하늘도 고개를 돌려 다른 테이블 위를 살펴봤다. 그리고는 바로 뒤 테이블 손님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혹시 핫소스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저희가 다 떨어져서요.”
그러자 친절한 목소리의 여성이 바로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 테이블엔 두 개나 있네요. 하나 가져가세요.”
핫소스 통을 받은 최하늘이 몸을 돌려 여성을 바로 쳐다봤다.
“한국분이시군요. 반가워요. 저도 한국인이에요.”
“사실 교포예요. 호호.”
피자 한 조각을 다 먹은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콜라를 집어 드는 순간, 그의 귀에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이 퍼렇게 질려 뒤를 돌아봤다.
“!!”
오한결은 그 여성을 보는 순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찔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여기에서 이렇게……?’
솔직히 뉴욕에 다시 돌아오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날을 무척 기다리면서도 그녀의 존재가 아득히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운명은 결국 우리를 다시 만나게 했구나.
‘안녕, 진태희.’
그녀는 회귀 전 50년을 함께한 오한결의 아내였다.
오한결의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던 최하늘은 갑자기 달라진 오한결의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왜 그러시지? 설마 저분 때문에 그런가……?’
최하늘이 그렇게 오해할 만큼 오한결은 뒷자리에 앉은 여성을 보며 더욱 강렬한 기운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호기심이라기보다 한 인간을 향한 존중과 존경, 더 나아가 강렬한 애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뭐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최하늘은 불안한 마음 때문에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 도리가 없었지만, 심각한 건 오한결이 엄청난 심적 변화를 겪고 있다는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진태희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듯이 태연하게 핫소스 통을 건네며 물었다.
“뉴욕에 관광 오셨나 봐요?”
핫소스 통을 건네받은 윌리가 소리쳤다.
“여기 계신 분이 오한결 작가예요. 한국 사람이라면 잘 아실 텐데. 하하.”
“어머!!”
진심으로 놀란 진태희가 입을 가리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 영광입니다. 제가 완전 팬이거든요. 그동안 작품 발표하신 거 다 챙겨보고 있어요.”
여전히 멍한 얼굴의 오한결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드셨군요.”
“그럼요. 여기 제 남자친구도 오한결 작가님 찐 팬이에요. 그렇지 자기야?”
“!!”
진태희가 같은 테이블의 앉은 금발의 남자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오한결은 너무 놀라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남자친구?”
“네. 사실 약혼했어요. 올해 말에 결혼한답니다. 호호.”
“!!”
결국 이거였구나.
오한결은 회귀 후 달라진 자신의 삶처럼 아내의 삶도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오직 오한결 자신에게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혜택을 누려야 한다면 너무나 불공평한 거니까.
하지만 오한결은 회귀 전 아내와 이번 생에도 인연을 이어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너무나 완벽하게 변해버린 삶이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바람은 깨뜨릴 수 없었다.
오한결은 이번 뉴욕 출장 때 혹시나 아내를 만날 기회가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대면한 현실은 오한결이 바랐던 두 사람의 인연은 새로운 삶에서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자, 세상이 멈춘 듯 오한결에게 찾아온 적막감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주변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오한결이 진태희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제 작품을 좋아해줘서.”
진태희 대신 금발의 남성이 대신 대답했다.
“태희는 예술을 좋아해요. 그래서 오한결 작가님이 데뷔하자마자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이렇게 제 여자친구를 기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금발의 남성이 진태희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오한결이 씁쓸하면서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오한결의 모습을 바라보던 최하늘이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작가님, 괜찮으세요?”
진태희와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 하는 오한결에게 그런 최하늘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한결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오한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며칠 후에 빅스퀘어 빌딩에서 작품을 하나 공개합니다. 그때 두 분이 와주시겠어요?”
진태희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 그거 엄청 유명하잖아요. 그 높은 빅스퀘어 빌딩을 가득 덮은 스크린에 멋진 영상이 나오는 거로요. 근데 그거 최근에 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알기론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 라는 대요. 정말 하나요?”
“그럼요. 아주 멋진 작품을 준비 중입니다.”
진태희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무척 기뻐하는 표정을 보며 오한결이 흐뭇하게 웃었다. 때마침 그들이 주문한 피자가 나오자, 오한결이 그들에게 식사를 맛있게 하라는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려 테이블을 바라봤다.
“…….”
그 뒤로 오한결이 평소에 보인 적 없는 낯설고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최하늘도 오한결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 피자를 먹는 시늉만 하고 있었고 오한결은 이미 피자에서 손을 떼고 콜라만 훌쩍이고 있었다.
하지만 윌리는 최선을 다해 음식을 먹었고 급기야 최하늘과 오한결의 피자와 파스타까지 모두 깨끗이 먹어치웠다.
볼룩한 배를 문지르던 윌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한결과 최하늘을 바라봤다. 근데 두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축 처져 있지 않은가.
“무슨 일 있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하지만 여전히 묘한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윌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이동한 오한결과 최하늘, 윌리는 구석에 전망이 좋은 자리에 앉았다.
윌리가 커피를 주문하러 자리를 비우는 사이, 최하늘이 기회를 엿봐 오한결에게 물었다.
“아까, 그 여자분 아는 분이에요?”
오한결은 최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주 예전에요. 저는 그분이 남자친구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그 여성의 행복을 바라는 오한결의 마음이 느껴지자, 최하늘은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사연이 있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한결 작가님의 개인적인 이유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어.’
서서히 오한결도 여유를 찾아가자, 최하늘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의외의 모습이네. 누군가를 향해 이렇게 진정성을 보이다니. 참 멋진 분이야.’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얼굴을 붉히고 있던 최하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민 윌리가 말했다.
“이거 맞죠?”
“네…….”
시원한 커피를 한껏 들이킨 오한결은 며칠 후 있을 빅스퀘어 빌딩 작품에 대해 생각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스크린에 진태희가 좋아했던 작품을 띄우는 거야.’
그건 예술가로 회귀한 오한결이 줄 수 있는 아내에 대한 진정성 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영원히 그날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 작품을 볼 때마다 조금이나마 자신을 기억해줄 수 있도록 추억을 선물하자.
윌리는 말없이 커피만 마시는 오한결과 최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식당에서부터 두 사람이 급격히 말이 없어졌단 말이야.’
윌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오한결과 최하늘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분명 자신이 뭔가를 놓쳤으리라.
‘오호라! 이제야 알겠다. 두 사람은 커플이구나! 이런, 둘이서 사랑 싸움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자신의 정확한 추리에 스스로 감동한 윌리가 깔깔깔 웃으며 오한결과 최하늘을 바라봤다. 윌리의 갑작스러운 큰 웃음에 두 사람이 고개를 들고 윌리를 쳐다보자, 윌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가 원래 눈치로 사회 생활하거든요. 딱 걸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