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부흥 위원회
소더비의 동양미술팀 매니저인 벨라가 명일문화재단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동안 이나영 팀장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소더비가 독점적으로 경매에 올리려고 했지만 까다로운 이나영 팀장의 업무 처리 방식 때문에 쉽게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전 세계 부호들은 각자의 채널을 통해서 소더비에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고 싶다는 압박을 가해오면서 CEO 제이콥의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눈치를 살피던 벨라는 확실한 대면 회의를 통해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손에 넣고 싶어 한국행을 결정했다.
“여기가 사설 문화재단이라고?”
하지만 벨라는 명일문화재단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명일문화재단에 대한 여러 소문을 듣긴 했었다. 명일그룹 산하 단체인 만큼 그 규모와 크기가 상당하다고.
근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이 정도면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보다 더 멋진걸?”
주눅이 든 벨라는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고 나름 당당하게 문화재단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건물 외형과 다르게 무척 사무적인 회의실을 둘러본 벨라가 신수진 이사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쑥 찾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이나영 팀장과 눈길을 주고받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먼 길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나영 팀장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소더비가 얼마나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원하는지도 확인했고요.”
“맞습니다. 소더비는 전 세계 예술품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는 오한결 작가의 작품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찾아온 것도 이제는 확실한 약속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벨라의 말에 이나영 팀장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메일로 말씀드린 대로, 아직 오한결 작가와 협의할 일이 남았습니다. 갑자기 결정할 사항이 아니에요.”
“협의라……. 이해할 수 없군요. 오한결 작가 입장에선 저희 소더비의 제안이 무척 매력적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뭉크의 절규를 1억 700만 달러, 즉 한화로 1,354억에 거래했습니다. 물론 뭉크의 그림과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만, 오한결 작가의 세 번째 작품이 뭉크의 작품과 기법이 매우 같아 꽤 고가로 거래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소더비 CEO 제이콥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마련된 기회입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들은 신수진 이사장과 이나영 팀장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져들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소더비와 계약을 하고 싶지만 오한결 작가의 작품은 전적으로 오한결 소유로서 자신들은 그럴 권한이 없었다.
무엇보다 오한결에게 관련 내용을 전달했으나,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미루기만 했다. 문화재단 입장에서도 답답할 따름이었다.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오한결 작가가 한국에 오면 얘기를 잘 나눠보도록 하죠.”
신수진 이사장의 말에 벨라가 무척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네? 오한결 작가가 한국에 없나요?”
“지금 뉴욕에 있습니다.”
“네? 오마이갓!”
벨라는 몹시 불안감에 휩싸였다. 뉴욕이라면 소더비의 라이벌 크리스티가 꽉 잡고 있는 곳 아닌가? 물론 소더비도 뉴욕, 런던, 홍콩 등 전 세계 90대 지점에 사무실을 두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뉴욕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건 크리스티였다.
그동안 문화재단이 신인 작가인 오한결을 꽉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업무를 해보니 오한결 작가는 그 어느 단체와 사람에게 구속받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뉴욕으로 갔었어야 했는데……. 제이콥에는 뭐라고 보고하지…….’
벨라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한결 작가의 그림 세 점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론, 여기 문화재단이 보관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이나영 팀장이 잠시 머뭇거린 뒤 말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작품은 여기에 없습니다.”
“네? 오한결 작가가 개인 소유하고 있나요? 아니면 설마 뉴욕으로 가지고 갔나요?”
“아니요. 이상민 문체부 장관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상민 문체부 장관이요? 그분이 왜요?”
* * *
정부세종청사 문체부 장관실.
소더비가 문화재단을 찾았다는 정보를 입수한 문한국 보좌관은 둘만 있는 사무실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은밀하게 장관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보고를 마쳤다.
“뭐! 그게 정말이야?”
“맞아요. 제가 어렵게 입수한 정보에요. 소더비는 특별히 세 번째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뭉크의 절규를 닮은 그 작품이요. 장관님 집에 걸린 작품 말이에요!”
이상민 장관이 기대와 희망으로 은근슬쩍 물었다.
“얼마에 판매가 가능하다고 하던가?”
“대략 천억?”
“뭐!!”
“확실해?”
문한국 보좌관이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음. 그렇게 들은 것 같긴 해요.”
흥분과 기대감으로 황홀한 기분이 들었던 이상민 장관이 현실적 문제를 생각하자 급격히 기분이 다운됐다.
“그럼, 오한결 작가가 다시 뺏어 가겠군.”
“네? 설마요. 장관님께 선물로 주신 거잖아요.”
“조건이 있었잖아. 서울시장을 움직여 삼각지 화랑거리를 리모델링 하라고.”
사실 문한국 보좌관은 오한결의 그런 제안이 달갑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깟 그림 하나 주고 서울시 재건축 정책을 바꿔 달라고? 솔직히 그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상민 장관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소더비가 그림을 팔아준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않던가.
‘이런, 흥미진진하게 돌아가는데? 근데 오한결 작가가 정말로 세 번째 그림을 장관에게 줄까? 그 엄청난 금액에 거래가 될 수 있는데도?’
잠시 두 사람은 각자만의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이상민 장관의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네, 이상민 장관입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티 아시아지부장 소피아입니다. 오한결 작가님 관련해서 전화드렸는데요.]
너무 놀란 이상민 장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뒤 휴대폰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대답했다.
“정말입니까? 크리스티 맞아요?”
‘크리스티’라는 말을 들은 문한국 보좌관도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 저희는 오한결 작가님의 예술적 후원자이고 실질적 작품 관리자인 이상민 장관님과 상의드릴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이상민 장관은 소피아에게 대답하기 전에 휴대폰을 살짝 치우고 문한국 보좌관에게 속삭였다.
“내가 오한결 작가의 예술적 후원자이자 작품 관리자래? 하하하.”
“정말요? 그럼 완전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빨리 수정해주세요!”
눈에서 레이저를 쏜 이상민 장관이 삐친 얼굴로 말했다.
“너 누구 편이야?”
“…….”
* * *
아트화랑에 삼각지 화랑거리 사장들이 수십 명 모여있었다.
긴장된 분위기에 모두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들이 신뢰하는 홍철수 사장의 요청으로 모인 것이라 무언가 중요한 일이겠거니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간이 의자까지 동원해 모든 사람이 자리를 잡자, 홍철수 사장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화랑거리 사장님들이 모인 것도 얼마만 인가요?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화방을 운영하는 조성우 사장이 말했다.
“예전에는 가끔 모여서 모임도 가졌는데, 워낙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그렇게 됐지 뭡니까. 하하. 오랜만에 만나니 다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늙었구려.”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미술재료를 판매하는 김영숙 사장이 대뜸 말했다.
“예전에도 먹고 살기는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때가 참 재밌었지. 화랑거리 곳곳에 자리 잡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가득 채웠으니까. 자고로 북적북적해야 사람 살맛이 나는 법이지. 암!”
아트화랑 바로 건너편에서 그림을 파는 서정욱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최근에 청년 작가들이 모여서 화랑거리에 멋진 조각품을 설치하지 않았나. 그때는 거시기 엄청 유명한 기업 회장도 오고 높으신 공무원 양반도 참석했었지. 솔직히 그렇게 많은 기자도 처음 봤어.”
가만히 동료 사장들의 이야기를 듣던 홍철수 사장이 기회를 봐서 입을 열었다.
“이게 모두 오한결 작가 덕분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알다시피, 오한결 작가는 삼각지 화랑거리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이곳을 위해 활용하고 있어요. 심지어 문화재단 공모전 작품을 화랑거리를 주제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그 작품을 보면서 여기 사람 중에 울컥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한결 작가 덕분에 화랑거리에 대한 인지도가 무척 높아졌어요. 심지어 해외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어요!”
이 말에 모두 흥분하고 있지만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편일점 사장은 고개를 가로 저였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이 모든 건 오한결 작가가 만든 이슈일 뿐이에요.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볼 뿐 화랑거리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요. 어쩌면 당연한 거겠죠. 우리가 뭘 바라겠어요.”
편일점 사장의 말에 누군가가 동조하며 소리쳤다.
“편 사장 말이 맞아요. 지난번 그렇게 화려하게 조각품 공개를 하고 난 뒤, 뭐가 달라졌습니까? 가끔 오는 관광객들이면 충분하나요? 그동안 조용하던 이곳이 잠시 북적였을 뿐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오한결 작가에게 고맙긴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니까요.”
조용히 말을 듣던 김영숙 사장이 버럭 화를 냈다.
“욕심들이 과하시네요. 오한결 작가의 작품과 청년 예술가들의 조각품으로 화랑거리는 확실히 예전과 다른 인지도를 갖게 됐어요. 여러분들도 모두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들 아닙니까? 매출에서부터 차이가 나는데, 어찌 그걸 외면할 수 있겠어요.”
조성우 사장도 김영숙 사장을 거들었다.
“맞아요. 한창 잘나가던 과거 화랑거리를 원하셨나요? 오한결 작가가 화랑거리를 전성기 때로 돌려놓지 못해서 그런 평가를 내리시는지 궁금합니다.”
주고받던 의견들이 차이를 보이자 서로 반대편에 서서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트화랑은 순식간에 논쟁의 장소로 변했고 곳곳에서 고성이 마구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홍미숙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모두 그만 하세요! 오늘 이 자리는 싸우라고 만든 자리가 아닙니다!”
평소 홍미숙을 무척 아끼던 삼각지 화랑거리 사장들은 그녀의 말에 간신히 이성을 찾고 입을 다물었다.
홍미숙이 눈빛으로 사인을 보내자, 홍철수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했다.
“오한결 작가가 제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일제히 침묵을 지키던 화랑거리 사장들을 향해 홍철수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오한결 작가는 화랑거리의 옛 명성을 되찾고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의 거리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끼리 똘똘 뭉쳐 ‘부흥 위원회’를 만들길 바랍니다. 추후 이곳을 세련된 도시 풍경으로 재건축하고 앞으로 몰려들 예술가와 관광객을 관리할 정책을 제안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홍철수가 말을 마치자 모두 황당한 말을 들은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편일점 사장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홍철수 사장? 지금 농담하는 거요? 재건축?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예술가?”
홍철수 사장은 더는 설명을 붙이지 않고 간단하게 말했다.
“오한결 작가가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한결 작가를 믿습니다.”
믿음과 확신이 가득한 홍철수 사장의 목소리에 모두가 다시금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평소 홍철수 사장을 따르던 몇몇 사장들이 기쁨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앞자리에서 열렬한 박수를 보내던 조성우 사장이 말했다.
“그럼, ‘부흥 위원회’ 회장을 뽑아야겠군요!”
흥분한 김영숙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들을 향해 뒤돌아서서 말했다.
“홍철수 사장을 추천합니다. 여러분은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외쳤다.
“동의합니다!!”
그렇게 ‘화랑거리 부흥 위원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에 있는 화랑거리 출신 예술가들과 화랑 사장들에게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