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31화 (131/202)

제131화 햄버거 해장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과 최하늘을 데리고 한적한 뉴욕 공원을 배회하고 있었다.

여전히 숙취로 고생 중인 최하늘이 발을 질질 끌 듯 데이비드 오 교수를 따라갔다. 그녀 뒤에 있던 오한결은 그녀의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하늘 씨, 괜찮아요?”

오한결의 말에 화들짝 놀란 최하늘이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저는 오늘 최상의 컨디션인데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어젯밤 재즈클럽에서 잔뜩 취한 최하늘은 자신의 주사를 똑똑히 기억했다. 갑작스럽게 울어버렸던 순간도 일행에게 큰 소리로 떠들던 일들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리고 데이비드 오, 앤드류, 오한결이 그녀를 겨우 부축해 호텔로 향하던 순간도 너무 선명하게 기억했다.

‘아, 쪽팔려.’

아침에 호텔 로비에서 최하늘을 만난 오한결과 데이비드 오는 그녀가 애써 창피함을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전날 자신의 추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두 사람은 최하늘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서로의 마음을 얼추 짐작했다.

말 그대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랄까?

쓰러질 듯 최하늘이 휘청이는 순간, 데이비드 오 교수의 말이 들렸다.

“다 왔어요. 저기 테이블에 앉으시죠.”

데이비드 오 교수가 가리킨 곳은 공원에 있는 햄버거 가게의 야외 테이블이었다. 최하늘과 오한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런 곳에 햄버거 가게가 있네요.”

“이 지역 명물입니다. 물론 맛도 기가 막힙니다.”

곳곳에 설치된 테이블 사람들이 앉아서 입안 가득 햄버거를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맛있는 고기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 아찔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역시 해장에는 햄버거가 좋답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의 말에 최하늘이 즉각적인 반응을 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뜨끈하고 시원한 국물을 먹어도 시원찮을 텐데…….”

“여기가 상당히 유명한 햄버거 가게에요. 제가 뉴욕대에서 교수로 있을 때 자주 왔던 곳이니까 저를 믿고 한 번 드셔보세요. 하늘 씨, 그럼 메뉴는 뭘로?”

“…….”

“음, 맛있는 메뉴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들죠? 그럼, 주문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최하늘이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시그니처로 알아서 주문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데이비드 오 교수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최하늘이 느글거리는 배를 문대며 중얼거렸다.

“오,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겠구나…….”

오한결이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볼 땐 해장도 해장이지만, 데이비드 오 교수님이 햄버거를 먹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마침 하늘 씨도 해장이 필요해 보이니, 본인이 해장하셨던 방법대로 먹여보고 싶으셨겠죠.”

최하늘이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잠시 기다리니, 데이비드 오 교수가 햄버거가 담긴 작은 상자와 음료를 갖고 나타났다.

오한결은 갓구운 패티의 구수한 냄새와 야채의 신선함을 눈으로 확인하며 감탄을 했다.

“와, 비주얼이 끝내주네요. 잘 먹겠습니다!”

최하늘은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음료를 들이켰다.

“우엑! 이게 뭐야!”

오한결과 데이비드 오 교수가 순간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하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민망해진 최하늘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밀크쉐이크네요. 속이 더 안 좋아졌어요……. 난 당연히 콜라인 줄 알았는데.”

“아……. 그럼 콜라로 바꿔올까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민망한 표정을 짓자, 잠시 까탈스럽게 말한 자신을 자책하며 최하늘이 대답했다.

“어머! 죄송해요.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최하늘이 밀크쉐이크를 죽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와우! 맛이 판타스틱이네요. 여기가 엄청 맛집인가보다.”

자신이 오해했다고 생각한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햄버거 가게의 오랜 역사와 자신이 돈 없던 유학생 시절 이곳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던 추억을 모두 대방출했다.

“그러고 보니까 저 안에 그 가수가 일을 하던데요. 아마도 알바를 하나 봐요.”

“가수요? 누구?”

“그 사람 있잖아요. 어제 재즈클럽에서 노래하던 여자분. 목소리가 참 몽환적이었던.”

그녀의 이름이 생각난 최하늘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쿵 내리쳤다.

“리나!”

“맞아요.”

오한결이 가게를 바라보며 말했다.

“생계 때문에 낮엔 여기서 알바를 하는군요. 저녁에는 재즈클럽에서 노래하고.”

잠시 햄버거에 열중한 세 사람이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가게 문이 열리고 리나가 본인보다 큰 쓰레기 봉투를 바닥에 끌다시피 가지고 나왔다.

그녀를 발견한 최하늘이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리나! 반가워요.”

화들짝 놀란 리나가 오한결 일행을 발견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쓰레기 봉투를 가게 한쪽 벽에 세워둔 후 테이블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최근 재즈클럽에 자주 오시는 손님분들이시죠? 식사하러 오셨나 봐요.”

최하늘이 반도 못 먹은 햄버거를 몸으로 가리고 대답했다.

“엄청 맛있어요. 인생 햄버거예요. 호호.”

순간 오한결과 눈이 마주친 리나는 평소 오한결의 팬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오한결의 눈에서 리나는 그의 진심어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왜 노래를 안 부르고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가수잖아요. 당신도 나처럼 예술가잖아요.

당신은 실패한 게 아니에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라고요.

‘아, 리나는 지금 자책하고 있구나.’

오한결은 끝없는 우울감에 빠져드는 리나를 보며 생각했다.

“리나, 괜찮아요.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오한결의 따스하지만 단호한 말투가 들리자 리나는 더욱 감정이 격해진 표정을 지었다.

“……!”

급기야 리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매몰되어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흐어엉……”

“리나, 괜찮아요?”

그 괜찮냐는 한 마디에 리나의 감정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큭큭 대던 신음이 이제는 대성통곡으로 바뀌었고 눈물과 콧물이 주룩주룩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의 힘든 일들이 한꺼번에 찾아와 서러운 마음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최하늘은 리나의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에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눈물을 흘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너무나 평화로운 평일 오후 맛있는 식사를 나누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반면 데이비드 오 교수는 리나의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의 원인을 눈치챘다.

‘이런……, 오한결 작가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는 게로군.’

‘리나가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오한결은 어젯밤 산다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리나는 사기꾼에게 속아 가수 데뷔가 매번 물거품이 됐던 아픔이 있다고 했다. 산다라의 이웃사촌인 리나에게 오한결이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어떤 도움을 줘야 할까?

오한결은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을 썩히기엔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뉴욕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녀의 재능이 세상에 빛날 수 있게 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 * *

뉴욕 JFK 공항에 신태진 회장과 양승호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글라스를 낀 신태진 회장이 앞장서며 말했다.

“오한결 작가에겐 비밀로 해주게. 여기에 내가 나타났다는 걸 알면 부담스러워할 거야.”

“네, 회장님.”

신태진 회장은 지난번 스위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만난 로건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오한결과 친분을 쌓길 원하는 세계 일류기업의 청년 CEO.

그때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오한결에게 먼저 다가가라고 조언했지만, 왜 세상 부족할 것 없는 기업 CEO가 오한결을 만나고 싶은지, 그 이후 오한결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경황이 없어 물어보지를 못했었다.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오한결이 걱정돼 며칠 잠을 뒤적거리는 끝에, 아내가 뉴욕에 들러서 직접 확인해보라는 말에 급히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것이다.

미리 대기시킨 리무진에 올라탄 신태진 회장이 나직이 말했다.

“로건에게 가자고.”

“네, 회장님.”

수많은 차들로 북적이는 뉴욕을 가로질러 타임스퀘어로 리무진이 진입했다. 주변을 감싸는 건물 외벽에는 수많은 대형 스크린에서 화려한 광고가 어지럽게 나오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명일그룹의 광고를 찾던 양승호 비서가 소리쳤다.

“저기, 명일그룹 회사 광고가 보입니다.”

양 비서의 호들갑에 신태진 회장이 창밖으로 그 광고를 확인했다. 처음부터 신태진 회장이 직접 주도해서 만든 광고로 기업의 과거와 미래를 환상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상영되고 있었다.

이제는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기업 탑3에 들었지만, 워낙 유동성이 강한 시장에서 언제든 도태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화려한 명일그룹 광고는 회장의 그런 걱정을 확실하게 날려버릴 만큼 대단해보였다. 신태진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 앞에 리무진이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이 건물 꼭대기에 로건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건물 최상단으로 이동했다.

비서의 안내로 CEO 사무실로 들어서자, 로건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신태진 회장을 맞았다.

“이런, 신 회장님이 직접 이렇게 찾아오시다니요. 몹시 영광입니다.”

“나 역시, 로건을 다시 만나게 돼 매우 기쁩니다.”

신태진 회장을 창가로 안내한 로건이 말했다.

“전망이 어떤가요? 뉴욕 타임스퀘어가 한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저녁에 오셨다면 더 멋진 야경을 봤을 텐데요. 그게 좀 아쉽습니다.”

“하하하. 얼마든지 기회가 있겠지요. 이왕 온 김에 뉴욕을 잠시 즐겨볼까 합니다.”

“아하! 좋습니다. 회장님.”

소파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주고받았다.

로건은 갑작스레 신태진 회장의 방문에 의아해하면서도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 것 같아 흥분한 반면, 신태진 회장은 평소 엉뚱하다고 소문난 젊은 사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신태진 회장은 솔직하게 물어보면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직도 오한결 작가의 전화를 기다리나요?”

로건이 민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아직 그렇습니다. 제가 명함을 받은 사람 중 저를 외면한 사람은 없었거든요. 소위 잘나가는 작가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죠.”

신태진 회장이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겉으로는 매우 쾌활하고 자유로운 영혼 같지만 기업 CEO로서 지키고 싶은 자존심과 얼핏 보이는 로건의 자만심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중재자 역할을 해도 좋을 것 같군. 분명 오한결 작가에게도 좋은 기회일 테니 말이야.’

분명 로건이라면 오한결 작가 인생에 커다란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신태진 회장은 그 좋은 기회를 오한결이 놓치지 않길 바랐다. 필요하다면 자신이라도 나서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신태진 회장이 입을 열었다.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왜 로건은 오한결 작가가 필요한가요?”

잠시 고민하던 로건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제 꿈을 이뤄줄 겁니다.”

“꿈이요?”

“어려서부터 디자인을 전공한 저는 시각적인 즐거움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곤 했어요. 지독하게 가난하던 학생 시절 누군가가 꿈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번뜩 드는 생각이 제가 제일 사랑하는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멋진 건물 주인이 돼서 그 건물 가득 멋진 영상을 트는 거였어요. 단순 광고가 아닌 예술작품을 보여주는 영상이요.”

“음……. 제가 듣기론 이미 그런 퍼포먼스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고래 이미지로요.”

고개를 가로젓던 로건이 힘없이 말했다.

“물론, 했죠. 그것도 많이요. 하지만 제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어요. 너무 멋진 작품인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심장이 터질듯한 벅찬 감동을 느끼지 못했어요. 저는 그게 중요합니다.”

로건의 말에 신태진 회장이 설레기 시작했다.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타임스퀘어에 오한결의 작품이 초대형 스크린으로 나온다고?

그건 신태진 회장도 감히 해줄 수 없는 최고의 기회였다. 신태진 회장은 그런 멋진 기회를 오한결이 반드시 잡길 원했다.

“멋지군요. 그럼 제가 두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놔드리죠.”

로건이 매우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저는 오한결 작가가 필요합니다. 지난번 타임스퀘어 거리에서 그의 작품을 본 뒤 꿈에서도 그 멋진 작품이 나오거든요. 얼른 제 건물 스크린에 그의 작품이 나오는 걸 보고 싶어요.”

로건의 마음을 이해한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후 아주 은밀하게 말했다.

“대신, 오한결 작가에겐 제가 뉴욕에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주세요.”

로건도 은밀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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