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마음의 상처
뉴욕대가 주최한 ‘그랜드마스터’ 초청 작가 강연을 마치고 오한결과 몇몇 VIP들은 만찬을 위해 오한결이 머무는 MIL호텔로 향했다.
명일그룹 소유 MIL호텔은 이번 뉴욕 행사 진행의 전액 지원을 약속했는데, 당연히 호텔 만찬까지 포함된 예산이었다.
만찬장에 도착한 오한결은 자신을 환영하는 플래카드에 살짝 쑥스러움을 느꼈다.
「한국의 천재 작가, 오한결을 환영합니다.」
최하늘과 데이비드 오, 앤드류는 별도의 테이블로 안내되고, 오한결만이 뉴욕 시장과 같은 자리에 배정됐다.
오한결이 다가서자, 먼저 도착한 뉴욕 시장이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작가님. 강연 잘 들었습니다.”
“바쁘신데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올해 뉴욕시에서 열리는 행사 중 가장 큰 행사였는 걸요. 뉴욕 시장으로서 응당 그 자리를 지켜야지요.”
오한결과 뉴욕 시장이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때마침 중년의 한국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이구! 좀 늦었습니다.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살짝 길치라, 좀 돌아왔습니다. 하필이면 비서도 길치지 몹니까. 하하.”
뉴욕 시장이 그를 반갑게 맞아줬다.
“한승엽 시장님, 어서 오세요. 초행길이니 헷갈릴 수밖에요. 근데 차량으로 이동한 게 아니었습니까?”
“뉴욕 밤거리를 좀 즐겨볼까 싶어 걸어왔죠. 뉴욕대하고 호텔하고 아주 가깝던데요.”
“하긴, 그렇긴 하죠. 한 시장님은 낭만을 아시는군요.”
“아, 그런가요? 들켰군요.”
“하하하.”
“하하하.”
화기애애한 두 사람 사이에 오한결이 뻘쭘하게 있자, 그제야 뉴욕 시장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이런, 오늘의 주인공을 두고 우리의 수다가 길었군요. 한 시장님은 오한결 작가님을 잘 아시죠?”
한승엽 시장이 오한결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럼요. 한국의 자랑이면서 세계인들의 자랑 아닙니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작가님.”
실제로 처음 만나는 한승엽 시장이기에 오한결도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뉴욕에서 서울 시장님을 뵙다니요. 이것도 신기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한승엽 시장이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뉴욕 출장을 자주 옵니다. 여기 뉴욕 시장님께서 서울과 많은 교류를 원하고 계시거든요. 물론 예술인 교류를 대표적 사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한결 작가님은 명일문화재단 소속이라 잘 모르시겠지만, 서울시에서 정부 예산으로 예술인들의 활동과 안정된 삶을 위한 복지를 많이 지원하고 있어요.”
뉴욕 시장이 말했다.
“이런, 서울시가 오한결 작가를 호시탐탐 노리는 거 아닙니까? 혹시 뉴욕에서 먼저 오한결 작가를 데려가도 될까요?”
“절대 안 되지요. 하하.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서울, 아니 한국의 자랑이라고.”
“이런 말도 했지요. 세계의 자랑이라고. 그럼 뉴욕도 자격이 있는 거 아닙니까?”
오한결을 사이에 두고 두 시장이 낯간지러운 칭찬이 오가는 와중에 음식이 제공되기 시작했다. 샐러드와 에피타이저가 나오고 이어서 메인으로 스테이크가 나왔다.
농담 섞인 비즈니스 대화가 지루해질 때쯤, 한승엽 시장이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대체 무슨 꿍꿍인 줄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이번 임기 내에 서울시에 땅 투기범들은 모두 소탕하고 말 거라니까요? 문체부 장관이나 되는 사람이 어찌 그런 사적인 욕심에 추해졌는지 모르겠어요.”
오한결이 씹던 소고기를 꿀꺽 삼키고 와인으로 목을 축인 뒤 물었다.
“문체부 장관이요?”
“작가님 앞에서 민망해서 안 꺼내려고 했는데, 사실 문체부 장관이 저를 찾아왔었답니다. 리모델링이니, 재건축이니 하면서 은근슬쩍 압박을 가하더라고요.”
오한결은 미소를 머금으며 겨우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일전에 오한결은 이상민 문체부 장관에게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게 해줄 테니 대신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말이다.
그건 서울 시장으로 하여금 삼각지 화랑거리 리모델링을 추진하게 해달라는 큰 부탁이었다. 다소 억지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한결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간절한 희망사항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상민 장관의 힘을 빌리고자 그가 너무나 갖고 싶어 했던 자신의 그림을 미끼로 이용했다.
한승엽 시장의 말을 들으니, 일단 이상민 장관의 도전은 실패한 듯 보였다. 오히려 그 의도가 잘못 전달된 듯, 그를 땅 투기꾼으로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
일단, 시도했다는 자체가 중요한 거니까.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상민 장관이 열심히 일 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그에 대한 호감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진 오한결은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저, 스테이크 더 먹어도 될까요?”
반대쪽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최하늘은 스테이크 접시를 리필하는 오결을 바라보며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말했다.
“어머, 오한결 작가님이 저렇게 대식가였나요? 저런 모습은 처음 봐요.”
데이비드 오 교수와 앤드류가 서로 눈길을 주고받은 뒤 말했다.
“여기 리필도 되나요?”
최하늘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게…… 뭐, 요청하면 주긴 하겠죠. 어차피 문화재단에서 부담하면 되니까요.”
구석에서 최고급 스테이크를 몹시 아껴먹던 윌리가 최하늘의 말을 듣자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다가온 웨이터에게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스테이크 5인분 더 주세요!”
앤드류가 살짝 창피함을 느끼고 말했다.
“윌리, 우리 포함하면 3명인데, 왜 5인분을 시키나?”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윌리가 대답했다.
“네? 저 혼자 먹을 건데요.”
* * *
지루했던 만찬이 끝난 후 오한결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 룸으로 올라왔다.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발라당 누운 오한결은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서울 시장 앞에서 쩔쩔매는 이상민 장관의 얼굴이 떠올라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 이상민 장관도 꽤 추진력이 있네. 하지만 내 그림을 가지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할 거야.’
오한결은 회귀 전 세계적인 수준의 대우를 받았기에, 자연히 자신의 작품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오한결은 EBC 방송에서 그림 세 점을 그린 후, 현재의 명성에 비추어 그 그림들의 가치를 추정해 본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작업한 작품이었다면 이상민 장관에게 통 크게 선물로 줄 수도 있겠지만,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작업한 그 작품들은 가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추후 점점 올라갈 오한결 자신의 명성을 고려해 보면, 그 작품들의 가치는 끝을 모르고 상승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상당한 재산적 가치는 물론이고 예술성까지 겸비한 그 작품을 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건 오한결이 정말로 원하는 어떤 목표를 위해 쓸 비장의 무기라는 뜻이다.
오한결은 이상민 장관이 화랑거리 리모델링에 큰 힘을 보태준다면 자신의 영혼과 다름없는 작품을 줄 의향이 있었다.
띠링.
생각에 잠긴 사이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앤드류: 오한결 작가 자나요? 아니면 재즈클럽으로 오세요. 우리끼리 한잔해야죠.」
확실한 뒷풀이가 필요했던 오한결은 기쁨 마음으로 당장 달려가겠다고 답장했다. 말끔하게 생각이 정리되자, 나른했던 몸에 생기가 솟기 시작했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지만, 재즈클럽에는 밤의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음식을 서빙 하던 산다라가 오한결과 최하늘을 알아보고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어서 와요. 친구들은 이미 저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어요.”
최하늘이 대답했다.
“언니는 일 때문에 못 오시나요? 함께 있으면 너무 즐거운데.”
“호호호. 갈게요. 이것만 서빙 하면 오늘은 퇴근이거든요.”
일행과 합석한 오한결은 재즈클럽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평소보다 많은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하하, 맥주가 아주 꿀맛이군요.”
“우리 펍이 술맛으로 유명하죠! 자, 건배!”
하지만 일행도 기분이 좋은지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켜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오한결이 서서히 취해가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미 취기가 올라온 오한결은 은은한 조명 아래서 살짝 꼬인 발음으로 수다를 떨어댔다.
“오한결 작가님이 뉴욕이 오시니 너무 좋습니다. 우리 뉴욕에도 멋진 작품 하나 남겨주세요. 프랑스가 부럽습니다!”
“하하하. 부러워하지 마세요. 벌써 오자마자 기가 막힌 작품 하나 완성했습니다. 황금으로 빛나는 성스러운 예술가를 아시나요? 드디어 그분을 그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저! 오한결이 그렸다고요? 그게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저는 천재기 때문입니다! 천재! 우주 최강 천재! 번개가 팍! 천재가 팍!”
오한결 말 대부분이 자신이 얼마나 잘난 예술가인지, 얼마나 당당할 수 있는지 자랑하는 내용이어서 모두 그 말을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자기 자랑하는 오한결의 모습에 살짝 놀라기도 했다.
산다라가 그런 오한결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귀엽네요. 그동안 얼마나 자기 자랑을 하고 싶었을까요?”
최하늘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이상하네요. 오한결 작가님은 항상 겸손하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더 칭찬해드리곤 했는데.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서요.”
산다라가 박장대소하며 최하늘을 흘겨봤다.
“하늘 씨, 생각보다 훨씬 순진하네요. 정말로 오한결 작가가 자신의 실력을 모를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엔 여기서 더 마시면, CNN에 나가서 자신이 얼마나 잘난 작가인지 떠들 것 같은데요.”
오한결의 낯선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최하늘은 혼란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
잠시 뒤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오한결은 작품을 통해 언제나 당당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해왔다. 그의 작품에는 절대로 ‘겸손’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위대함을 소리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던가.
‘오한결 작가님은 꽤 터프하구나. 어머…….’
혼자만의 상상을 하던 최하늘이 얼굴을 붉히자, 산다라가 또 박장대소를 했다.
“귀여워요. 하늘 씨도 당당해져 봐요. 그럼 또 모르죠. 호호.”
술에 취해 데이비드 오와 앤드류에게 서양 미술사 이론을 연신 토로하고 있던 오한결에게 몽환적인 여인의 노래가 들렸다.
“뉴욕의 밤 거리를 거니네, 나 홀로…….”
리나의 목소리가 귀에 꽂히는 순간, 오한결의 취기는 한순간에 모두 날아갔다.
오한결은 몹시 집중하는 표정으로 리나의 노래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청중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었다.
사연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숨겨진 감정을 파고든다.
미세한 떨림의 목소리로 절정에 달하는 그녀의 노래를 듣던 오한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름답고 슬프다. 그녀는 진정한 아티스트구나.”
그 말을 들은 산다라가 오한결에게 말했다.
“리나는 가수의 꿈을 좇아 뉴욕에 온 지 벌써 10년 차에요. 이해할 수 없어요. 저렇게 재능있는 가수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오한결이 그녀의 사연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10년이라고요? 저 정도면 상당한 재능인데요. 오디션을 보면 바로 기회가 왔을 텐데요?”
“리나는 마음의 상처가 있어요. 앨범을 준비하다가 사기를 당한 것만 세 번째라고요. 그녀의 재능으로 돈을 벌려는 사악한 무리들이 도처에 널렸죠. 이제는 재즈클럽 아니면 다른 곳에서 노래를 하려고 하지 않아요.”
“흑……. 흑흑.”
산다라의 입을 통해 리나의 사연을 들은 최하늘이 갑자기 펑펑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루룩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최하늘의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모두 당황했지만 산다라만은 그 모습을 보며 힐끗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최하늘 씨는 엄청 취했거든요. 주사를 부리는 것 같네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최하늘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산다라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내일 어떻게 일행들을 보려고 그래요. 뚝, 그쳐야죠.”
“흐흑……. 훌쩍.”
거짓말처럼 눈물을 멈춘 최하늘이 눈을 껌뻑이더니 잠이 들어버렸다. 일행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산다라가 오한결에게 말했다.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줘요. 리나 집에 놀러 가게요. 리나가 오한결 작가님 팬이랍니다. 호호.”
“리나 씨 집을 아세요?”
“물론이죠. 사실 이웃사촌이거든요. 호호.”
산다라가 은근히 다가와 오한결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작가님이 하늘 씨 업고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의자에 널브러진 최하늘을 본 오한결은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데이비드 오 교수와 앤드류를 향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허리디스크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