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그랜드 아트 마스터
뉴욕대 정문에 오한결을 초대한 행사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제120회 뉴욕대 초청 그랜드 아트 마스터 강연」
「강사: 오한결 작가」
「주제: 예술과 희망」
오한결이 고개를 들고 거대한 현수막 왼쪽 구석에 자신의 사진을 바라봤다. 문화재단 공모전 시상식 때 수상소감을 전하던 때의 사진이었다.
“그래도 사진은 멋진 걸 넣어주셨네요. 정장을 입을 때가 저 때 딱 한 번이었거든요.”
일전에 행사용 사진을 오한결에게 요청했는데, 모두 산이나 공원에서 찍은 셀카만 보내줘서 적잖이 당황했었다. 사진 보내기 직전 공모전 행사 사진이 생각난 최하늘이 재빨리 사진을 교체했기에 지금의 멋진 플래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
“어쨌든 사진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호호.”
두 사람 뒤에서 통화를 하던 강철 지부장이 전화를 끊고 말했다.
“어서 들어가시죠. 간단한 리허설이 있다고 하네요.”
뉴욕대가 마련한 행사장은 대략 천 명정도 수용 가능한 공간이었다. 행사장 입구 로비는 고급 대리석으로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면 모던한 공연장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때마침 오한결을 기다리던 데이비드와 앤드류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은 뒤로 윌리와 노신사가 함께 따랐다.
앤드류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이 행사를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지 모릅니다. 그랜드 아트 마스터 강연은 전 세계 제일 핫한 작가 한 명을 선정해 뉴욕대가 초청 강연을 준비한 행사입니다. 자체 섭외 위원회가 있는데 만장일치로 오한결 작가를 선정했어요. 저는 이번 행사가 완벽한 흥행을 거둘 거라고 확신합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앤드류를 흥미롭게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이렇게 흥분하는 걸 첨 보는군. 이래서 내게 오한결 작가를 꼭 뉴욕에 데리고 오라고 닦달했구먼. 하하. 나는 처음에 나를 초청한 행사인 줄 알았는데.”
앤드류가 살짝 당황했다.
“아니, 뭐……. 자네도 중요한 귀빈이지. 하하.”
오한결이 슬쩍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신사에 눈을 돌리자, 그제야 앤드류가 화들짝 놀라며 노신사를 소개했다.
“이분은 뉴욕대 총장님이네. 오늘 강연을 제일 기대하고 계신 분이시기도 하지.”
총장이 조급한 듯 손을 내밀며 오한결을 바로 쳐다봤다.
“실물은 더 젊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한결 작가.”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장님.”
총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뉴욕은 예술의 도시입니다. 전 세계에서 예술에 뜻을 품은 수많은 작가가 이곳에 몰려들죠. 감히 예술을 평가할 수 없지만, 그대로 그 중 으뜸은 뽑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오한결 작가는 오늘 그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거예요. 어떤가요, 기분이?”
“영광입니다. 그리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오한결과 총장이 리허설 장소로 이동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고 그 뒤로 앤드류와 데이비드 오가 따르고 있었다.
행사장 관객석에 남아 있던 최하늘과 윌리는 서로 어색한 모습으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최하늘은 은근히 말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윌리가 내뿜는 날카로운 아우라에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니, 왜 삐진 거지? 이유가 뭐야?’
참을 수 없던 최하늘은 아무 말이나 떠들었다.
“오늘 행사 너무 기대되지 않나요? 윌리도 예술 전공이라고 했죠?”
“네.”
“오한결 작가님 작품 좋아하세요? 아이구, 너무 당연한 걸 물었네요. 싫어하는 예술가도 있나? 호호.”
“…….”
갑자기 침묵으로 일관하는 윌리를 답답하게 생각한 최하늘이 순간 짜증을 이기지 못했다.
“근데 이유라도 압시다. 왜 삐진 거예요?”
“제가요?”
“네, 평소 말도 잘 안 하고, 얼굴은 항상 찌푸리고.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신경 쓰지 마세요.”
윌리의 성의 없는 대답에 최하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그렇게 싫은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요!”
윌리도 같이 소리쳤다.
“그래요. 삐졌어요. 됐어요? 그럼 안 되나요?”
“맞네. 삐진 거.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요?”
“부럽고 질투 나니까요.”
“……오한결 작가님에게요?”
“아니요.”
“그럼 누구한테요? 앤드류? 데이비드 오? 설마, 강철 지부장?”
한숨을 푹 쉬던 윌리가 말했다.
“아뇨. 최하늘 씨요.”
“!!”
윌리가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저는요. 예술 전공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 힘들어요. 그래서 지금 예술 행정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너무 벅차거든요. 업무 실수는 다반사고, 행사 기획 같은 건 언제나 한계를 느끼고. 근데 이번에 최하늘 씨랑 일을 하면서 진짜 일을 잘 한다는 게 뭔지 알게 됐어요. 제 생각보다 두세 단계는 앞질러 가고 업무도 실수 없이 깔끔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계획한 모든 계획을 취소하셨잖아요.”
“아……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고. 문화재단이 정한 거죠…….”
“괜찮아요. 어차피 최하늘 씨가 한 게 더 완벽한 일정이니까요. 사실상 오늘 그랜드 아트 마스터도 최하늘 씨가 다 기획한 거잖아요.”
최하늘은 윌리가 삐친 이유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세상에, 오한결을 보고 질투했다면 그건 백번 이해하겠지만, 어떻게 자기를 보고 질투를 하지. 업무 능력이 질투난다고? 그럼 문화재단에 와서 6개월만 일해보라지. 신수진 이사장님, 이나영 팀장님 밑에서 일하면 금방 배울걸!
“너무 그러지 마요. 저도 문화재단이 정한 방향대로 움직였을 뿐이에요. 그리고 오한결 작가님은 지금까지 계획한 일정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잖아요. 아, 오늘 행사 빼고. 그건 다행이네요.”
“우하하하. 맞아요. 그건 그래요.”
최하늘이 하소연을 하자, 윌리가 갑자기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와서 그도 생각해보니까, 최하늘의 업무도 분명 쉬운 게 아니었다. 뉴욕에 와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숙박, 교통 등 모든 일정에 관여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빠진 윌리가 최하늘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 친하게 지내요. 갑자기 안쓰러워졌어요. 그쪽이.”
억지로 손을 잡은 최하늘은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쌍욕을 하고 있었다.
‘뭐야, 지금 장난해? 두고보자, 윌리!’
* * *
강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 커다란 행사장에 오한결의 강연을 들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VIP 좌석에는 뉴욕시 주요 인사들과 뉴욕대 교수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강사 대기실에서 오한결이 피자를 먹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왔나 보네요. 묵직한 웅성거림이 들리네.”
최하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행사 10분 전인데, 그렇게 드시다가 체하면 어쩌려고요. 긴장 안 되세요?”
“편안한데요. 그리고 배가 고프면 할 말도 생각 안 나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최하늘이 오한결을 쳐다보고 있을 때 행사장에서 사회자가 오한결을 소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사 참가자 모두 오한결의 이름이 들리자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곧이어 사회자가 오한결의 이름을 부르자, 피자를 먹던 오한결이 콜라를 들이켠 뒤 말했다.
“갔다 올게요.”
유유히 행사장으로 떠나는 오한결의 뒷모습을 본 최하늘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콜라도 한 병 다 마셨는데. 설마, 마이크 앞에서 트림이라도 하면……. 꺄악!’
오한결이 마이크를 차고 무대 중앙에 서자, 뒤에 설치된 스크린에 오한결의 사진과 그의 작품 사진이 번갈아 가며 나오기 시작했다.
행사장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고 오한결을 비추는 조명은 점점 밝아졌다.
오한결이 무대 중앙에 서서 수많은 눈빛을 받아내며 말했다.
“사실, 제가 뉴욕대 강연 주제를 보고 잠시 망설이긴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작품으로 대중을 일깨울 수 있을까?’,가 주제였으니까요. 아마도 한국에서 보여주었던 제 작품을 보고 저를 강연자로 섭외한 것 같습니다.”
키득키득 웃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오한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파격을 원하는 당신에게 ‘아름다움’이 갖는 예술적 미덕을요. ‘파격’과 ‘아름다움’ 중 어떤 표현법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렸어요. 하지만 ‘아름다움’의 효과를 모르고 ‘파격’을 선택한다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겠죠?”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사람들이 기대감에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은 예술의 고유한 속성인 ‘희망’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잠시 뜸을 들인 오한결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지금도 수많은 예술 작품이 대중들을 만나고 있지만, 여전히 있기 있는 미술 작품 주제는 쾌활하고 즐겁고 예쁜 것에 한정돼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쁜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거든요. 만약 집에 작품을 걸어놨는데, 프랜시스 베이컨의 잔인한 인간의 모습이라면, 손님들이 기겁하겠죠?”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오한결은 중단없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작가들이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림만 그리는 건 도덕적, 정치적인 이슈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작가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행위라고요.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리겠죠. 예쁜 것을 그리는 행위는 현실 도피와 다르지 않다고. 그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이지만, 터무니없는 헛된 ‘희망’을 준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죠.”
오한결이 무대를 좌우로 이동하며 관객들의 집중을 더 끌어올린 뒤 말을 이었다.
“제가 뉴욕에 오기 전에 조사를 좀 했습니다. 현재 뉴욕 예술가들의 작품 경향은 어떠한지. 몇 년 전부터 파격적인 소재와 표현법으로 그로테스크한 기법이 난무하더군요. 물론 저도 그 기법을 좋아하지만, 우려스러운 점은 꼭 그게 예술의 정답처럼 여기고 있는 기류 같습니다.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예술의 목적은 뭐니해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미지의 작품에 도전하는데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술의 역할에 대한 오한결의 강연이 마무리되자, 앤드류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쏟아 냈다.
“강의 잘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점과 우려스러운 주장이 있군요. 물론 예쁜 그림은 우리 눈을 무척 즐겁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때론 지옥 같다는 걸 깨우쳐야 하지 않을까요? 예쁜 그림으로 사람들이 진실을 볼 눈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앤드류의 말을 곱씹어본 오한결이 대답했다.
“정말 사람들이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굳이 예술가가 지적해주지 않으면?”
“…….”
“잔혹한 현실을 알려드리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며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면 왜 사람들이 예쁜 예술 작품에 관심을 갖고 감동하는 걸까요? 현실이 아름다우면 예쁜 예술 작품에 누가 흥미를 갖겠어요?”
“……대중들은 예쁜 그림을 통해 위로를 받길 원한다는 말인가요?”
“맞아요. 인생이 고단할수록 아름다움에 더 감동하는 법이죠. 그러니까 대중들이 현실의 고통을 몰라서 예쁜 그림을 찾는다는 말은 말이 안 돼요. 그들은 너무나 자신의 현실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위로를 받고 싶어서 예쁜 예술을 찾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술대 교수들과 학생들은 오한결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대중을 가르치고 알려줘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사상이 얼마나 헛된 것일 수도 있는지, 그 가능성을 전혀 상상해보지 않았다.
오한결은 마지막 말로 모든 사람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예술가는 고통스럽죠. 하지만 감히 일상의 무게를 하루하루 버티는 서민들보다 괴롭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예술가의 삶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작품을 통해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표현하지 못한 수많은 대중들의 고통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거죠. 그러니까 예술가는 그 표현력을 이용해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하는 의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사장을 감싸는 묵직한 침묵을 깨고 오한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중에게 행복을 주세요. 우선 작가라면 그것부터 하시면 됩니다.”
오한결의 말이 끝나자, 천 명이 넘는 관객이 동시에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