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26화 (126/202)

제126화 크리스티의 비밀무기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빅스퀘어 빌딩 꼭대기 층 사무실에 로건이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뉴욕시를 가득 채운 관광객들의 모습과 곳곳에 자리를 잡은 문화 예술인들의 흔적, 그리고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금융 산업의 면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건은 이런 뉴욕을 너무나 사랑했다.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재벌이 된 로건은 원래 디자인을 전공했던 미대생이었다. 스타트업 기업인 이미지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페이스 픽쳐스’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디자이너로 성공하는 삶을 꿈꿨다.

하루아침에 일류 기업의 대표가 되고 경영인으로서 사는 지금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미대 동기들이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쏟아 내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남모를 질투심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소유한 빅스퀘어 빌딩 한쪽 벽면을 대형 스크린으로 장식하고 늘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화려한 영상 쇼’를 기획했다.

오늘도 딱 그런 날이었다.

최근에 푸른 바다를 거칠게 헤엄치는 고래의 모습과 그것을 관람하는 관광객에게 물을 뿌리는 이벤트로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성공적인 행사 후 기쁜 마음으로 퇴근하던 중 우연히 길에서 본 청년의 그림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던 것이다.

허름한 외모에 지루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행위 예술가의 모습을 그리던 그 동양 청년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는 행위 예술가를 무척 신성한 모습으로 그려냈으며, 그것은 그 예술가를 향한 진심 어린 존경의 표시였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마음을 그림에 투영하는 솜씨와 그 완성도는 가히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분명 연락이 와야 하는데…….”

로건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적이 있었나? 내가 명함을 줬는데, 전화를 안 해?”

잠시 뒤, 단정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들어와 그에게 일정 보고를 시작했다. 보고 내내 집중하지 못하는 로건을 바라보며 제시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건,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요?”

그제야 정신이 차린 로건이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제시카. 내가 좀 생각할 게 있군요.”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사적인 일이 아니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전화가 안 와서요.”

“네?”

로건은 지난 밤 타임스퀘어 거리에서 만났던 동양 청년의 그림 솜씨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무 자신이 흥분했다고 생각한 로건이 재빨리 목을 가다듬고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내가 뉴욕에 살면서 수많은 예술가를 봤지만 그런 수준의 작품을 순식간에 그려내는 작가는 처음 봤어요.”

제시카가 무척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로건이 건네는 명함은 분명 무명이든 유명인사든 엄청난 기회의 상징일 텐데요. 그런데도 연락이 없다면 분명 그 청년은 분명…….”

“분명?”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작가일 겁니다.”

제시카의 말에 로건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런! 20대로 보이는 그 외모 때문에 아주 기본적인 실수를 했군요. 잠시만요, 그렇다면 지금 딱 한 사람이 떠오르네요. 설마……. 뉴욕에 왔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요.”

“잠시만요.”

제시카가 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아요. 그가 뉴욕에 왔습니다.”

“오한결 작가가요?”

“네.”

“세상에! 그를 앞에서 보고 못 알아보다니. 그의 작품이 너무 훌륭해서 거기에 홀렸나 봅니다. 당장 오한결 작가의 일정에 대해 알아보세요.”

“네!”

* * *

크리스티 뉴욕 지부.

최근 소더비가 오한결 작가의 그림을 노리고 문화재단에 비밀리에 접속한 사실을 알게 된 크리스티는 내부적으로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소피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어서 해명을 해봐요!”

회의실에서 소피아 지부장을 나무라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들은 정보력이 부족했던 소피아를 나무라기 바빴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자존심이 상해 얼굴이 붉어진 소피아가 담담하게 사과했다.

사실, 크리스티도 내부적으로 오한결 작가의 그림을 획득하기 위해 비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소피아 지부장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바람에 이렇게 소더비에게 뒤통수를 맞게 된 것이었다.

라이벌인 소더비가 한 수 빨랐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난 임원들에게 소피아가 말을 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모두 저의 판단 착오입니다.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만회하겠습니다.”

“기회는 드리겠소만,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게요.”

긴 수염의 노년의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감추며 소피아가 대답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소피아가 지부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책상을 손바닥으로 쾅 치며 소리를 질렀다.

“소더비!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에밀리! 에밀리를 불러와!”

상사의 부름에 급히 달려온 에밀리는 처음 보는 소피아의 신경질적인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에밀리, 어떻게 생각해? 소더비가 우리보다 한발 빨랐나 보네.”

소피아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세 달 전에 입사한 신입매니저 에밀리에게 조금 전 회의에 있었던 내용을 모두 전달했다.

그리고는 은근히 미소지으며 천재 신인 에밀리가 어떤 현명한 대답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킬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고민에 빠진 에밀리를 보며 소피아가 생각했다.

‘5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크리스티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신인 에밀리. 어서 말해봐! 당신은 멘사 회원 중 상위 1% 지능을 보유하고 있잖아?’

에밀리는 기대에 부응하듯 아주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부장님.”

에밀리의 단언에 마음이 놓인 소피아가 물었다.

“그 이유를 들어볼까?”

“제가 예전부터 모은 자료와 방금 인터넷을 통해 얻은 자료를 종합해 보면, 오한결 작가는 문화재단에 의지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독자적 행동을 보이는 오한결의 뒤를 살피는 매니지먼트 역할을 하는 듯 보입니다. 소더비가 문화재단에 접속했다면 분명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한결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그를 움직이는 더 큰 거물을 잡아야 합니다.”

소피아는 에밀리를 대견스럽게 쳐다봤다. 벌써 오한결 주변 인물 조사를 끝내고 그들 간의 이해관계까지 파악했단 말인가?

“에밀리가 생각하는 그 거물은 누구지?”

“이상민 문체부 장관입니다.”

에밀리가 자신감 있게 말을 이었다.

“오한결의 세 번째 방송 모델입니다.”

“아!! 그 절규의 주인공 말이지? 하지만 그는 그냥 모델 아닌가?”

“그는 단순한 모델이 아닙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오한결은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상민 문체부 장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듯합니다. 오한결이 그만큼 장관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근거는?”

“평소 유기견 센터에 후원하던 오한결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이상민 장관에게 부탁해 유기견 센터 봉사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장관 덕분에 전국 유기견 센터 운영 실태가 언론에 나오게 됐고 자연스럽게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서게 됐다고 합니다.”

“오호, 오한결이 엄청 부탁했나 보군.”

“그리고 삼각지 화랑거리에 자그마한 조각품을 발표했는데, 자신의 홍보 능력의 한계를 느낀 오한결이 이상민 장관에게 부탁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상민 장관이 미디어에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한가 보군.”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줄 마지막 기회를 이상민 장관을 그림으로써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평생 보답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하! 그렇지. 하긴 그게 어떤 기회인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에 모델로 이상민 장관을 썼다면 그건 이상민 장관에게 복종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에밀리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방금 믿음직한 정보통에게 문자를 받았는데, 세 번째 그림은 이상민 장관이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확실하군! 이상민 장관이 오한결 작가를 꽉 잡고 있어. 진짜 실세는 장관이었어.”

에밀리가 만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소더비가 문화재단에 접속한 건 분명한 실수입니다. 그림을 얻기 위해서는 이상민 장관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소피아가 활짝 웃으며 에밀리를 보며 말했다.

“역시 천재는 달라! 모든 게 완벽해. 우하하하.”

자신의 천재적 재능이 다시 한번 발휘됐다고 생각한 에밀리도 노골적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드러냈다.

“놀라지 마십시오, 지부장님. 오한결 작가가 현재 뉴욕에 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

* * *

“네? 마이크 폴을 만나고 싶다고요?”

호텔 VIP 라운지에서 오한결과 대화를 나누던 강철 지부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뉴욕에 오면 꼭 찾아뵌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강철 지부장은 마이크 폴이 CNN에 출연해 오한결의 작품을 평론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순간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오한결이 그에게 어떻게든 직접 대면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철 지부장이 무심코 최하늘을 바라보자, 그녀가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문화재단 일정은 뉴욕 예술 명사를 만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마이크 폴은 원래 계획에 없었지만 실제로 만난다면 사실 원래 일정보다 훨씬 훌륭할 겁니다. 마이크 폴의 세계적인 위상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죠.”

최하늘의 말이 꽤 설득력이 높았던지 강철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뉴욕 예술가 단체를 통해 마이크 폴과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오한결이 넌지시 말했다.

“아마도 국립공원 깊은 숲속이나 사막에 있을 거예요.”

몇 년 전부터 마이크 폴이 은둔형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강철 지부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하죠, 작가님.”

* * *

그날 저녁 재즈클럽.

데이비드 오는 혼자 클럽에 방문해 앤드류와 산다라와 함께 지난 추억을 소환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땐 정말 대단했죠.”

“어렸으니까 가능했지, 산다라.”

산다라는 마치 꿈을 꾸듯 데이비드 오를 쳐다보며 과거 그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 그리고 멋진 전시까지 기억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깊어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였다.

“하아~!”

탁!

테이블에 거칠게 맥주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앤드류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거구의 윌리가 앉아 있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 듯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는 연거푸 맥주를 들이켜 댔다.

앤드류가 슬쩍 자리를 옮겨 윌리 앞에 앉았다.

“자네, 요즘 왜 그러나? 힘든 일이 있어?”

한숨을 쉬던 윌리가 술에 취했는지 살짝 꼬인 혀로 말했다.

“어떻게 일정을 하나도 안 지키죠? 이럴 거면 왜 저를 그렇게 닦달했을까요?”

윌리는 마치 자신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물어봐줄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앤드류는 그런 윌리를 귀엽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진지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오한결 작가가 마이크 폴을 만나러 간답니다. 근데 원래 계획은 뉴욕대 출신 교수들과 세미나를 하기로 했거든요. 문화재단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일정에 겨우 넣은 건데, 이렇게 쉽게 변경하면 뭐하러 일정을 짭니까? 그냥 뉴욕 와서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윌리의 말에 앤드류가 이해한다는 의미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가 속상할 만해. 하지만 오한결 작가도 이해해주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이크 폴을 만나겠다면 우리가 막을 수 없지 않나. 그 세계적인 평론가를 직접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 아닌가?”

“……하긴, 그렇죠. 마이크 폴은 이해할 수도 있겠네요.”

“자네가 이렇게 짜증을 내는 걸 보니, 마이크 폴을 만나러 갈 때 동행하지 않나 보군?”

“이런? 잠시만요.”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던 윌리가 급하게 휴대폰을 켜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일행에 자신이 이름을 발견한 윌리가 재즈클럽이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으악!!!”

산다라가 몹시 놀라 같이 소리 질렀다.

“무슨 일이에요!!”

윌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내가 마이크 폴을 만나다니. 이건 기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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