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타임스퀘어
뉴욕 맨해튼에 도착한 오한결과 최하늘은 근처 상점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타임스퀘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타임스퀘어는 맨해튼의 대표적 관광 명소로 크고 많은 스크린 광고로 유명하다.
저 멀리서 건물 외벽에 번쩍번쩍 광고판이 번쩍이자 최하늘이 잠시 멈춰 서서 말했다.
“작가님 저기가 타임스퀘어에요. 어때요? 정말 멋지죠?”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닌 최하늘은 이미 여러 번 타임스퀘어에 방문한 적이 있기에 처음 온 오한결에게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사실상 회귀 전 뉴욕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오한결에게 더욱 익숙한 도시였지만, 최하늘을 배려해 오한결은 적정한 리액션을 해주었다.
“와우! 미디어에서 본 그대로네요. 정말 화려해요.”
오한결의 반응에 흐뭇한 표정을 짓던 최하늘이 대답했다.
“이번엔 제가 안내할게요. 제가 몇 번 와봤거든요.”
드디어 타임스퀘어에 입성한 오한결은 주변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거대한 광고판에서 나오는 화려한 영상과 이미지에 설레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50년의 시간을 거슬러 뉴욕에서 식당 일을 했던 과거가 생각났다.
오한결의 삶이 비참했을 때도 이곳은 언제나 화려했고 그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화려해서, 더욱 쓸쓸했고 외로움을 느꼈던 곳이었다.
오한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최하늘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키며 탄성을 질렀다.
“저것 보세요. 작가님!”
오한결이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명일재단의 광고가 거대한 스크린에 보이기 시작했다.
화면 중간에 한 아이가 등장해 눈을 감는다.
아이의 몸에서 나온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선은 주변 사물 곳곳과 연결되고 상호 소통이 이뤄진다.
그 순간 아이가 눈을 감자, 그 연결선들에서 더욱 강한 전류가 흐르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감싸고 있던 세상이 푸른 빛을 띠며 변하고 있다.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연결된 가상의 세계에서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간다.
그곳은 인류가 만든 유토피아이다.
한 인간의 욕망과 꿈이 실현되는 그곳은 오로지 첨단 산업만이 만들 수 있다.
그 첨단 산업에 선봉에 선 명일그룹에 세계 인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 기업 명일그룹은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선물할 것입니다.’
광고를 본 최하늘은 감동한 듯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도 저런 세상에 살게 될까요? 적어도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에겐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겠죠.”
“그럴 거예요. 그 중심에 명일그룹에 있을 거고요.”
오한결의 대답에 최하늘이 놀라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어머, 회장님이 들으면 정말 좋아하겠어요. 호호.”
오한결이 발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대신, 뛰어난 기술력으로 누구나 예술을 즐기는 세상에 먼저 왔으면 좋겠네요.”
“역시 예술만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찬성입니다!”
타임스퀘어에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 사이를 천천히 빠져나가던 두 사람은 더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꼼짝 못 하게 됐다.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최하늘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 좀 돌아갔어야 했는데, 이러다가 샌드위치 되겠어요. 호호.”
다양한 인종의 관광객들에게 이리저리 눌리고 있던 오한결도 말했다.
“그러게요. 오늘 무슨 날인가. 으악, 너무 많네요.”
“아! 저기 보세요. 무슨 행사를 하나 봐요.”
최하늘이 고개를 들고 소리를 지르자, 오한결도 덩달아 맞은편 거리에 있는 고층 건물을 쳐다봤다. 그것은 타임스퀘어 거리에서 가장 높아 보였고 한쪽 벽면을 모두 대형 스크린으로 장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하늘의 설명에 의하면 100미터가 넘는 벽면 스크린은 평소에 화면을 분할하여 다양한 광고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런데 왜 오늘따라 벽면 스크린이 모두 꺼져 있는 거지?’
주변 건물에서 화려하게 반짝이는 광고 때문인지 불 꺼진 대형 스크린이 더욱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얼핏 감지되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잠시 뒤 회색의 대형 벽면 스크린에 번쩍하고 불이 들어왔다.
곧 화면 밖으로 쏟아질 듯한 어마어마한 바닷물이 빌딩 벽면을 가득 채웠다.
“와! 정말 압도적이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광경에 사람들은 입을 떡하고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죠?”
“설마 광고인가요?”
사람들은 일제히 그 모습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눈앞에 압도적 스케일의 바다 영상은 꽤 화질이 높아 진짜 바다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오한결이 느끼기엔 그건 원초적 두려움이었다.
“무섭네요.”
두근대는 심장을 느끼며 최하늘이 대답했다.
“맞아요. 저 일렁거리는 바닷물 좀 보세요. 너무 무서워요.”
“흠……?”
오한결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저게 전부인가? 이상한데…….’
그 순간, 스크린 하단에서 거대한 검은 형체가 스르르 보이더니 이윽고 일렁이는 푸른 바다 위로 그 압도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관광객들이 탄성을 질렀다.
“와우! 고래잖아.”
회색의 단단한 체형의 고래가 물 밖으로 나와 거칠게 꼬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둔탁하고 묵직한 효과음과 함께 바닷물이 사방으로 튀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놀랍게도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우와! 진짜 바닷물이 튀긴 거야?”
“대박! 소름 돋았어!”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두리번대면서 어디서 물방울이 튀겼는지 찾고 있었다.
그사이 고래는 다시 한번 거칠고 묵직한 몸동작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세로로 길쭉한 스크린에서 보는 그림이라 꼭 고래가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다시 거대한 꼬리로 물 표면을 때리자, 다시금 실제 물방울이 사방에서 튀기며 관광객을 적시기 시작했다.
최하늘이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신나서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쪽 보세요. 작가님.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가 설치돼 있어요. 와우, 이거 굉장한데요? 오늘 우리가 잘 온 것 같아요.”
오한결이 보기에도 굉장한 이벤트였다.
거대한 스크린에 나타난 일렁이는 바닷물과 그곳을 묵직하게 헤엄치는 고래라니. 시각적 충격에 아찔하면서도 스프레이를 통해 관광객에게 촉각적 즐거움까지 선사하지 않았는가?
최하늘이 감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건물 이름이 뭐지?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오한결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빅스퀘어(Big Suqare) 빌딩이요.”
오한결의 지식에 놀란 최하늘이 물었다.
“어머! 역시 많이 아시네요. 처음 오셨는데 저보다 많이 아시는 것 같아요, 호호.”
지금까지 최하늘을 설명을 들으며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컨셉이 들통난 것 같은 느낌에 오한결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오한결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최하늘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해요. 오늘 저녁은 재즈클럽에서 환영회가 있거든요.”
“환영회요?”
“네, 앤드류 교수님이 자리를 만드셨어요. 호호.”
오한결이 무심코 가방에 손을 뻗어 그 안에 있는 미술 재료를 만지며 말했다.
“아, 하늘 씨. 제가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거기를 좀 들렀다 가요.”
최하늘은 그제야 생각났다. 분명 오전 호텔에서 타임스퀘어에 만날 사람이 있다고 했던 사실을. 친구를 만나려고 하나?
“네, 시간은 충분해요.”
“그럼, 저를 따라 오시죠.”
빅스퀘어 빌딩의 대형 스크린 쇼가 끝나서 그런지, 엄청나게 빽빽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길거리에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오한결은 거침없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그 뒤를 따르던 최하늘은 결코 오한결이 이곳에 처음 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너무나 확신을 갖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마치 오한결이 이곳 원주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뭐지? 뉴욕에 처음이라면서 혹시……. 길 찾기 천재? 호호.’
화려한 광고판이 잘 보이지 않는 으슥한 곳에 이르자, 오한결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최하늘이 물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어요?”
“예술가요.”
“네? 무슨 예술가요?”
“황금빛 예술가요?”
어리둥절한 최하늘을 바라보며 오한결이 히죽 웃고는 고개를 돌려 황금빛 예술가를 찾기 시작했다.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오한결이 기억하는 황금빛 예술가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항상 타임스퀘어에 나와 행위 예술을 펼쳤던 사람이었다.
온갖 핑계로 예술을 포기했던 오한결에게 진정한 반성을 기회를 줬던 그런 위대한 예술가 아니었던가?
잠시 뒤, 희미한 가로등 아래 누런 형체의 동상이 홀로 외롭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한결이 신이 나서 외쳤다.
“찾았어요. 하늘 씨, 이쪽으로!”
오한결과 최하늘은 황금빛 예술가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봤다.
황금빛 예술가는 조잡한 상자 위에 올라가 차렷 자세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굳게 서 있었다.
벅찬 감동을 받은 오한결은 살짝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다시 만났네요. 예술가님.”
하지만 황금빛 예술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최하늘의 눈에는 이 상황이 몹시 이상해 보였다.
오한결이 데리고 온 곳에는 어설프게 몸에 색을 칠한 행위 예술가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솔직히 너무 조잡해 보였다.
상의를 탈의한 배불뚝이 아저씨는 온몸에 금색의 물감을 칠했는데, 색이 모자랐는지 곳곳에 황금색 대신 노란 색으로 덧칠을 해놨으며 시간이 꽤 지났는지 물감이 땀에 벗겨져 얼룩덜룩했다.
무엇보다 손과 팔에 털이 수북해 좀 지저분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한 가지 인정하는 건 그의 프로 정신이었다. 슬쩍 눈을 돌려 오한결과 최하늘을 쳐다볼 법도 한데 그는 결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근데 정말 오한결 작가님이 이 사람을 찾아온 거야?’
의문이 일었지만 최하늘은 행위예술가 앞에 놓인 모자에 달러 지폐를 몇 장 꺼내 집어넣으며 말했다.
“찾는 분이 이분인가요?”
“네, 맞아요.”
짧게 대단한 오한결은 황금빛 예술가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요.”
“…….”
하지만 황금빛 예술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오한결이라고 합니다.”
“…….”
“제가 예술가님을 그려주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
오한결의 말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는 황금빛 예술가를 보며 최하늘이 피식 웃었다.
‘뭐지, 이 장면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최하늘이 보기에는 두 사람 사이에 친분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직 오한결이 구애하듯 매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건 착각인가?
오한결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안에서 스케치북과 물감 등 그림 재료를 잔뜩 꺼내 놓았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황금빛 예술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움직이지 마세요.”
“…….”
밑그림 없이 붓에 황금색을 묻힌 오한결이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최하늘의 시선에는 황금색을 칠한 예술가의 허술한 면이 보였지만, 오한결에게는 그 예술가의 완벽한 모습이 보였다.
오한결에게는 눈에 보이는 외형이 전부가 아니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타인의 인정에 목매지 않는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을 본 것이다.
오한결의 시선에는 황금빛 예술가의 몸은 성스러운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예술가의 영혼은 태양처럼 자신을 태우며 황금빛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오한결은 그 빛이 너무 강렬해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황금빛 예술가가 뿜어내는 아우라를 슬쩍슬쩍 보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눈에서는 예술가의 굳은 의지가 뿜어져 나왔고, 각지고 다부진 얼굴형은 그의 고집스러운 성미를 한 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차렷 자세를 취한 그의 단순한 포즈는 예술을 바라보는 일편단심의 상징이며 진정한 예술은 화려함이 아닌 그런 일관된 세계 구축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오한결이 캔버스에 예술가의 성스러운 면을 부각하자, 최하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깨달음을 얻은 부처를 그린 듯한 그 그림은 종교화로서도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을 만큼 깊은 진리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오한결의 그림을 보고 걸음을 멈춰서기 시작했고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수많은 사람이 황금빛 예술가와 오한결을 둘러싸도, 두 사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각자 자신의 역할을 이행했다. 황금빛 예술가는 부동자세를 취했고 오한결은 그림을 그렸다.
잠시 뒤, 그림을 완성한 오한결이 쭈그렸던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끄응…….”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한 자세로 오랫동안 있었더니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젊은 몸이라 너무 방심했나 보군…….’
긴장했던 몸을 풀고 오한결이 자신의 그림을 바라봤다.
남들에겐 허술해 보이는 거리 예술가지만 오한결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을 발견해 캔버스에 표현해냈다. 그림 속 예술가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또 하나의 명작의 탄생 과정을 지켜본 군중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압도적인 장면을 보고 누가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짝…… 짝짝!
오한결을 에워싼 사람 중 누군가가 홀린 듯 박수를 쳤다. 그제야 사람들은 오한결이 부린 마법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두 명씩 박수를 따라하더니 여기저기서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Wonderful!”
“Amazing!”
열렬한 환호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오한결이 천천히 그림을 황금빛 예술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여전히 먼 곳을 응시할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오한결이 그의 발밑에 그림을 놓고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오한결과 나란히 걷던 최하늘이 혹시 분실됐을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황금빛 예술가는 그림을 손에 꼭 쥔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하늘이 히죽 웃으며 오한결에게 말했다.
“저분이 재빨리 그림을 챙겼네요. 호호.”
“그림이 마음에 드나 봐요. 다행입니다.”
오한결도 흐뭇하게 웃으며 길을 걷는데, 갑자기 경호원을 대동한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오한결 앞을 가로막았다.
“저기, 얘기 좀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