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23화 (123/202)

제123화 자유의 여신상

늦은 밤이 되자, 재즈클럽에 사람들로 더욱 가득해졌다.

산다라가 건넨 맥주 한 잔씩을 들고 모두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하지만 윌리 혼자 꿍한 표정으로 최하늘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윌리의 찬 기운을 눈치챈 최하늘이 오한결에게 속삭였다.

“왠지 이번 출장에 커다란 변수가 생긴 것 같네요.”

오한결이 씨익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저분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곧 풀리겠죠.”

“그럴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최하늘은 윌리가 왜 저렇게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솔직히 이번 출장을 준비하면서 윌리는 어떻게든 일정을 줄여서 쉽게 가려고 했지만 최하늘이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여 좀 더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정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최하늘은 문화재단 직원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 과정에서 윌리가 속이 상했나 보다.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길 바라야죠. 하하.”

자정이 넘어서자, 피곤함이 급속히 몰려온 오한결 일행은 자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 모습을 본 앤드류가 자리를 정돈하며 말했다.

“이런, 오늘 한국에서 오랜 비행을 한 손님들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먼. 빨리 가서 쉬게 해줘야겠어.”

최하늘이 기다렸다는 듯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럼 숙소로 갈게요. 여기서 10분 정도 걸어야 해요. 어서 가시죠.”

데이비드 오 교수가 졸린 눈을 비비고 대답했다.

“근처에 문화재단 레지던시가 있나요?”

“아뇨, 호텔이요.”

“!!”

모두 ‘설마’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최하늘이 자신감 넘치게 대답했다.

“이 근처에 MIL호텔을 보셨나요? 명일그룹이 소유한 호텔이죠. 거길 우리 숙소로 이용할 거예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오한결이 택시를 타고 지나온 길에 최신식 호텔을 지나간 기억을 소환했다. 뉴욕의 화려한 건물 사이에서도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호텔이었다.

‘생각보다 명일그룹의 영향력이 대단하구나.’

어쨌든 오한결도 너무 피곤해 입을 열기 힘들 정도였다.

“빨리 가시죠. 너무 졸리네요.”

3층까지 통유리로 내부의 화려한 로비를 자랑하는 MIL호텔에 도착한 일행은 최하늘의 도움으로 최고급 스위트룸에 배정받고 급히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한결은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자, 그간 참아왔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대충 씻고 자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오한결은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어느덧 따사로운 햇살이 오한결의 얼굴을 뜨듯하게 달구고 있을 때 휴대폰에서 문자 메시지 알람 소리가 났다.

겨우 눈을 뜬 오한결이 휴대폰을 확인하자, 최하늘이 보낸 단체 메시지가 보였다.

「최하늘: 상쾌한 뉴욕의 아침입니다. 저는 지금 호텔 VIP 라운지에 있어요. 준비되시면 모두 이쪽으로 와주세요.」

「데이비드 오: 지금 바로 가죠!」

밤새 베개에 눌린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긴 오한결이 살짝 당황해했다. 분명 엄청 피곤할 텐데, 왜 이렇게 부지런한 거야?

「오한결: 저는 지금 일어나서요. 씻고 나갈게요. 죄송요.]

오한결이 VIP 라운지에 도착하자, 이미 최하늘과 데이비드 오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한결이 은근슬쩍 데이비드 오 교수 옆자리에 앉고는 물었다.

“아침 식사 하셨어요?”

“왔군요. 오한결 작가. 식사는 회의 끝나고 다 같이 하려고 합니다.”

서류를 유심히 살피던 데이비드 오 교수가 슬쩍 오한결을 쳐다보고 말했다.

“오전 일전에 변동이 있어요. 만나기로 했던 뉴욕예술가 단체 소속 작가님이 갑자기 맹장이 터졌다고 하셔서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오한결에게 최하늘이 본인 손에 들린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서류를 대충 넘겨보던 오한결이 슬쩍 웃고는 자료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댄 채 고개를 돌려 푸르게 빛나는 뉴욕 하늘을 바라봤다.

“날씨가 꽤 좋네요.”

“네? 갑자기요?”

“제가 이사장님 허락을 받은 걸로 아는데요.”

최하늘이 혹시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게 있나 싶어 오한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프랑스 일정처럼 우리는 뉴욕에서 ‘여유’와 ‘낭만’을 즐기기로요.”

데이비드 오 교수도 오한결처럼 몸을 편히 기댄 채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하나. 그냥 놀고 싶은 거라고 말하게. 관광을 원하는 건가?”

사실 최하늘은 처음부터 오한결 작가가 관광을 하자고 말할 거로 생각했다. 물론 최하늘 자신도 여유롭게 즐기면서 출장을 한다면 금상첨화 아닌가? 문화재단 직원이 된 뒤 해외 일정은 항상 빠듯했고 여행은커녕 행사장과 호텔에만 머물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오한결과 함께 떠난 프랑스 출장이 그녀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해외 출장에서 즐거움을 느낀 순간이었다.

하지만 최하늘은 문화재단 직원이지 않은가. 그녀가 함부로 재단이 정한 일정을 변경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짧은 시간 안에 오한결 작가가 뉴욕 예술과 접촉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계획을 빠듯하게 짰던 게 바로 최하늘이었다.

은근히 오한결의 즐거운 도발을 기다리던 최하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네요. 이사장님이 허락하셨죠. 호호. 오한결 작가님은 어디를 가보고 싶으세요?”

“음……. 하늘 씨는요?”

“네?”

“하늘 씨는 어디를 가보고 싶으세요?”

오한결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자, 당황한 최하늘이 급히 얼버무리듯 말을 뱉었다.

“자유의 여신상?”

“가죠! 하하. 그리고 저녁에는 타임스퀘어도 들릴 게요. 거긴 제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요.”

오한결이 사적인 볼일을 언급하자, 최하늘과 데이비드 오 교수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프라이버시라는 생각에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자리를 정돈한 후 오한결과 최하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일정은 관광이군. 그럼 두 사람만 다녀와요. 나도 개인적인 볼일 좀 볼까 해서요.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과 타임스퀘어는 자주 가봐서 굳이 갈 필요가 있나 싶구요.”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최하늘이 밝은 얼굴로 답했다. 일정이 정해진 세 사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맛있게 조식을 해치우곤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그럼 잠깐 쉬다가 한 시간 뒤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시죠.”

오한결의 말에 최하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레는 마음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 * *

배터리 파크에 도착한 오한결과 최하늘은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한결이 페리 티켓을 살피며 물었다.

“이분들이 모두 페리를 타려고 줄 서 있는 거죠?”

“네, 맞아요.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의 대표적인 관광 코스 중 하나잖아요. 제가 알아본 바로도 대략 삼십 분에서 한 시간은 대기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때마침 맹렬한 한기를 품은 바람이 공원을 가로질러 오한결과 최하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인상을 찌푸린 오한결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추위에 발을 동동 굴렀다.

자유의 여신상은 리버티 아일랜드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 가려면 페리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한다. 대략 15분 정도 거리라 부담은 없지만, 수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대기 시간이 여간 만만치 않다.

드디어 40분쯤 기다린 끝에 페리에 오른 오한결과 최하늘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뭔가를 검색하던 최하늘이 조급하게 말했다.

“어머! 갑판으로 가야 해요.”

“네?”

최하늘이 갑자기 오한결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페리 갑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르던 오한결은 그녀가 달려가는 곳을 향해 같이 달려갔다.

저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정면으로 보이는 갑판에 위치를 선점한 최하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여기가 딱이네요.”

페리가 물살을 가르며 움직이자, 잠시 뒤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이해 프랑스가 기증한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 여신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까지 포함하면 100미터가량이 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페리가 자유의 여신상 근처를 지나가자, 오한결과 최하늘은 서로 말없이 넋 놓고 여신상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최하늘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있는 거는 알겠는데, 왼손에 든 건 뭐예요?”

오한결이 대답하려는 순간, 뒤에서 굵은 동굴 같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허허. 그건 독립 선언서지요.”

깜짝 놀란 오한결과 최하늘이 뒤를 돌아보자, 흰 수염에 푸근한 몸을 가진 할아버지가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설명 감사합니다…….”

“어허허. 횃불과 독립 선언서를 든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으로 온 이민자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상징이랍니다. 그리고 내가 비밀 하나 말해 줄게요. 사실 여신상은 동색인데 산화되어 초록색으로 보이는 거랍니다. 놀랍지요?”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하던 할아버지를 보며 오한결과 최하늘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할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허허. 신혼여행 왔나요?”

최하늘이 몹시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희는 출장 왔어요.”

“어허허. 그런가요? 이런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두 분이 워낙 분위기가 좋아 내가 착각을 했어요.”

쌀쌀한 강바람에 옷을 꼼꼼하게 여민 오한결이 대답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 알아가요.”

“어허허. 나도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할아버지는 마치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는 듯이 냉정하게 돌아서서 갑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다고 할까? 그러다가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뉴욕은 여전히 특이한 사람이 많구나.’

오한결은 그렇게 생각하며 여행의 낭만을 즐겼다.

리버티 아일랜드에 도착한 오한결과 최하늘은 여신상 전망대에 올라가고 싶었지만 안전 문제로 입구가 폐쇄되어 아쉽게 기념품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미니어처가 전시된 그곳을 구경하던 오한결이 자유의 여신상 모형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이걸 사가면 우리 친구들이 좋아하겠죠?”

프랑스 출장 때 선물로 산 에펠탑 스노우볼에 기겁하던 노을의 얼굴이 생각난 최하늘은 이번엔 단호하게 오한결에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님! 좀 더 비싼 선물이 좋지 않을까요?”

“아! 그걸 놓쳤군요.”

그러더니 오한결이 더 큰 자유의 여신상 모형에 다가가 말했다.

“이건 아까보다 세 배나 비싸요!”

오한결의 모습을 보며 최하늘이 한숨을 쉬었다. 친구들이 원하는 건 흥미롭고 의미있는 비싼 선물이지, 그저 가격만 비싼 선물이 아닌데 말이지.

하지만 곧 오한결이 자유의 여신상을 쓰다듬는 엉뚱한 모습에 최하늘의 답답함은 눈 녹듯이 풀어졌다.

‘은근 귀엽단 말이야. 미술은 잘하는데, 선물에 완전 꽝이네. 귀여워.’

갑자기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자 최하늘이 깜짝 놀랐다.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퍼뜩 정신을 차린 최하늘은 자유의 여신상 모형을 사려는 오한결을 말렸다.

“작가님, 선물은 나중에 사도 돼요. 오늘은 구경만 해요!”

실컷 구경을 마친 두 사람은 햄버거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계획했던 타임스퀘어를 향해 출발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저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뒤로 붉은 노을이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최하늘이 물었다.

“근데 타임스퀘어는 왜 가시는 거예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어머, 혹시 친한 친구라도 만나러 가시나요?”

“아뇨. 하지만 제 인생을 바꾼 사람이죠.”

오한결이 애매한 말로 마무리하자, 최하늘은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가서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니까.

타임스퀘어를 향해 가는 내내 보이던 뉴욕의 풍경에 최하늘이 벅찬 감동을 느꼈다

‘작가님과 함께 하면 늘 설레는 일이 생긴다니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하던 최하늘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해외 출장이 짜릿한 이벤트로 가득 찰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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