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뉴욕지부
한인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순두부 가게에서 저녁을 마친 일행은 강철 지부장의 안내로 근처에 있다는 명일문화재단 뉴욕지부로 향했다.
오래된 뒷골목 같은 곳을 지나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5층짜리 단순한 사각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붉은색 페인트로 칠해진 듯한데, 오랜 시간 색이 바래 꼬질꼬질한 외형을 갖게 됐다.
강철 지부장이 카페테리아가 보이는 1층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 다 왔습니다. 커피는 여기서 마시죠.”
오한결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건물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프랑스 지부에도 1층에 카페가 있던데, 여기도 직원 전용인가요?”
“아, 맞습니다. 재단에서 제공하는 직원 복지죠. 물론 저희 소속 작가들도 당연히 이용 가능하고요.”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현대식 인테리어가 일행을 반겼다. 오래되고 색이 바랜 건물 외부와 다르게 내부는 전부 리모델링을 해 5성급 호텔 수준의 고품격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쳐다보며 물었다.
“와우, 저도 이곳은 처음 와 보는데, 놀랍군요. 안을 이렇게 꾸며놨을 줄이야. 소름 돋는 반전이네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반응을 하자, 강철 지부장이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뉴욕 한복판에 있는 건물 하나를 모두 사용하는 단체는 저희밖에 없을 겁니다. 이곳이 워낙 땅값이 비싸거든요. 그리고 돈이 있다고 해도 사무용 건물을 찾기도 힘들고요. 우리가 운이 좋은 거죠.”
향긋한 커피 냄새가 진동하는 카페테이아 입구 앞에서 강철 지부장이 멈춰 섰다.
“아, 먼저 뉴욕지부를 좀 둘러볼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오한결이 말했다.
“어차피 꼭대기에 숙소가 있는 거 아닌가요? 커피 마시고 둘러 봐도 될 듯한데요.”
‘숙소’ 얘기에 어리둥절한 강철 지부장 대신 최하늘이 대답했다.
“여기는 프랑스 지부랑 달라요. 거기는 지부 건물에 숙소랑 작업실이 다 있는데, 여긴 지하에 소공연장하고 작업실 몇 개 빼고 모두 사무 공간이에요. 참고로 숙소는 호텔로 예약했답니다.”
“건물 5층을 전부 사무 공간으로 쓴다고요?”
강철 지부장이 대답했다.
“이곳은 일종의 네트워크 센터죠. 미국 전역에 있는 한인 예술인 단체를 연결하고 있답니다. 단체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운영을 지원하고 있고요. 연구자들이 예술 단체와 관련된 논문 같은 연구 자료도 만들고 있어요.”
생각보다 규모가 큰 문화재단의 사업 스케일에 놀란 오한결이 물었다.
“이걸 명일재단이 하고 있다고요? 이 정도 규모면 정부에서 운영하는 위원회 같은 크기의 조직으로 보이는데요?”
그 말을 들은 최하늘이 은근히 기분이 좋은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명일그룹이 후원하고 명일재단이 사업을 운영하고 있죠. 사실 이런 식으로 사업을 늘린 것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준비하다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했고요. 때마침 문화재단이 공모전을 한 것도 우리가 구축한 완벽한 인프라를 재능있는 작가에게 제공하고 싶어서였어요.”
오한결이 흐뭇하게 웃었다.
“제가 운이 좋았군요.”
“아니요. 문화재단이 운이 좋은 거죠.”
두 사람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강철 지부장이 손목 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
“자, 어서 움직입시다. 밤이 늦었어요.”
최하늘의 말대로 모든 층은 사무 공간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에 직원들 책상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퇴근해 자리를 비웠는데도 불구하고 다닥다닥 붙은 책상들만 봐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강철 지부장의 말로는 사업이 잘 될수록 일이 많아지는데, 공간은 협소해 이렇게 앉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금 근처 사무 공간을 알아보고 있지만, 워낙 뉴욕에 입주하고 싶은 단체들이 많아 언제 구할 수 있을지 사실상 예측하기 힘들다고 했다.
강철 지부장이 사무실을 둘러보는 최하늘에게 말했다.
“하늘 씨는 뉴욕 지부로 올 생각 없어요? 유능한 직원이 이곳으로 오면 힘이 많이 될 텐데요.”
“아…….”
갑작스러운 강철 지부장의 제안에 최하늘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최하늘도 그 생각은 안 한 건 아니었다. 예술 단체 직원에게 뉴욕 지부는 꿈의 무대라고 불린다. 수많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과 함께 세계 트렌드를 선도해 간다면 최하늘에게도 막강한 커리어가 쌓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한결이 나타나기 전이었다. 그가 작품을 만들 때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다. 이제 한국 서울에서의 작업이 뉴욕보다 더 글로벌하고 트렌디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최하늘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뉴욕에 오면 너무 좋죠. 하지만 아직 제가 오한결 작가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혹시라도 강철 지부장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마음을 졸였던 오한결이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최하늘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저도 지금은 하늘 씨가 필요해요. 뉴욕은 보류해주세요. 하하.”
강철 지부장이 아쉬움을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언젠가 스카우트 꼭 할 겁니다. 하하.”
최하늘이 웃으며 대답했다.
“꼭 해주세요! 호호.”
3층까지 사무실을 구경한 일행은 4층, 5층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는지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것을 보고 일제히 다시 1층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정말 커피가 필요한 시간이에요.”
최하늘이 계단을 내려가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식후 나른한 상태에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으니 정신을 각성할 카페인이 절실한 상태였다.
“제가 한 잔씩 쏠게요.”
오한결이 카페 입구에서 말하자, 강철 지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 커피는 직원과 손님에게 공짜입니다. 이번 커피는 저희 뉴욕지부에서 대접하는 걸로 알고 계시면 돼요. 하하.”
데이비드 오 교수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사실, 전 저녁에 카페인 섭취를 안 해서요. 따뜻한 물로 대신하겠습니다.”
저녁에 커피를 안 마시는 데이비드 오 교수를 제외하고 모두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고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오한결이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고 창밖을 바라봤다.
늦은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거리의 불빛은 생동감을 잃지 않았고 사람들도 분주하게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지 사람들이 잔뜩 옷깃을 여미고 있었다.
그때 한 청년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얇은 겉옷을 걸친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를 본 오한결은 자신이 회귀 전 뉴욕에 왔던 때가 생각났다.
추웠던 겨울, 무작정 선배의 말만 듣고 찾아온 뉴욕이 겨울은 한국보다 훨씬 춥게 느껴졌었다. 아마도 상처 입었던 그때의 오한결은 마음이 더 추웠으리라.
잠시 생각에 잠긴 오한결을 물끄러미 보던 강철 지부장이 물었다.
“이곳에 사연이 있나 보군요, 작가님. 옛 추억을 떠올리는 표정입니다.”
마음을 간파당한 것 같아 민망해진 오한결이 강철 지부장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흥미로운 표정으로 오한결을 바라봤다. 마치 뭔가를 안다는 듯한 눈빛. 오한결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뇨, 저는 공식적으로 뉴욕에 처음 왔습니다.”
오한결의 단호한 말에 모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강철 지부장은 혼자 중얼거렸다.
‘공식적이라.’
잠시 커피를 마시며 몸을 따스하게 녹인 일행에게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지금 제 친구들이 뉴욕대 앞 재즈카페에 모여있다고 하는데 어떠세요, 괜찮으시다면 그쪽으로 이동할까요?”
최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교수님 친구들이요?”
“하늘 씨는 잘 알겠네요. 앤드류하고 윌리요.”
최하늘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너무 잘 알죠. 이번 교수님 뉴욕 출장이 원래 그 두 분을 만나는 일정이었잖아요. 지금 두 사람 모두 재즈클럽에 있는 거예요? 우리 때문에?”
“하하하. 꼭 우리 때문은 아니고요. 그들이 자주 가는 곳이죠. 때마침 우리가 뉴욕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다고 해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과 최하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긴 비행에 피곤할 텐데, 쉬고 싶으면 말해요. 어차피 공식적인 일정이 시작되면 만나게 될 사람들이라서요.”
어두운 조명 아래 뉴욕의 재즈가 흐르는 재즈클럽 이미지를 상상한 최하늘이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으로 오한결을 바라봤다.
“작가님, 피곤하시죠?”
최하늘의 마음을 눈치챈 오한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뇨, 재즈클럽 가기 딱 좋은 상태입니다.”
“!!”
오한결이 긍정적으로 대답하자, 최하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모두 강철 지부장을 쳐다보며 그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강철 지부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오늘은 친구분들 만나는 자리니만큼 제가 빠져 주는 게 맞는 것 같군요. 저는 공식 일정 때 뵙는 걸로 할게요.”
“아, 그렇군요…….”
모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강철 지부장에게 함께 갈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여긴 뉴욕이 아니던가?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면 그만이다.
모두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재즈클럽이 몹시 궁금했던 최하늘이 서둘러 외쳤다.
“그럼 어서 출발하시죠!”
* * *
뉴욕대 앞 재즈클럽 문을 열고 데이비드 오 교수가 들어가자, 뒤이어 최하늘과 오한도 한껏 기대를 안고 따라 들어갔다.
탁한 공기, 뿌연 담배 연기가 자욱한 이곳은 최하늘이 기대했던 딱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둡고 암울한 멜랑콜리 같은 분위기에 취한 최하늘이 두 손을 잔뜩 모으고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은 자그만 탁자를 주위에 두세 사람씩 모여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 들어온 손님 따위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래서 최하늘은 그게 더 시크하고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데이비드 오가 바 테이블 근처로 다가가자, 회색 머리의 훤칠한 중년 남성이 데이비드 오 교수를 힘껏 안으며 말했다.
“어서 오게! 데이비드. 이게 얼마만인가!”
“세상에! 앤드류. 자네 회색의 신사가 됐구먼. 몰라보겠어.”
앤드류는 기쁜 마음을 잠시 주체하고 고개를 돌려 오한결과 최하늘을 바라봤다.
“이분들인가?”
“맞아. 여긴 오한결 작가, 그리고 문화재단 직원 최하늘 씨라네.”
앤드류가 먼저 최하늘과 악수를 하고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윌리에게 들으니, 이번 뉴욕 출장의 숨은 공신이라고 하던데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뉴욕에 오셨으니 너무 일만 하지 마시고 즐기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이번엔 앤드류가 오한결을 쳐다봤다.
그는 오한결을 보는 순간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청년이란 말이지? 세계가 열광하는 천재 예술가.’
순간, 앤드류의 머릿속에서 오한결의 방송 프로그램이 스쳐 지나갔다. 오한결의 과감하지만 섬세한 붓 터치와 친절한 그림설명까지 모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앤드류가 오한결의 검은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직접 보다니, 몹시 영광이네.”
그런 앤드류에게 오한결이 먼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앤드류 교수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윌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오한결 저 사람은 뭐지? 하늘 같은 교수님을 아랫사람 대하듯 바라보고 말을 걸잖아?’
미국은 일반적으로 교수와 학생들 관계를 수평적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완전한 평등적 관계란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교수는 선생이자 지도자로서 권위를 갖게 되기 마련이고 그가 하는 어떤 결정이 학생들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교수와 조수는 직장 내 상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윌리 입장에선 앤드류 교수가 상사이면서도 매우 존경하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런 교수님을 저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윌리는 가뜩이나 한국에서 온 두 청년에게 질투와 시샘을 느꼈는데 이번 일로 더욱 그 감정이 짙어지게 됐다. 앤드류와 데이비드 오, 오한결과 최하늘이 서로 기쁨에 겨운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구석에서 소외된 윌리가 질투의 감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뒤늦게 앤드류가 윌리를 발견하고 말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한 명을 깜빡했구먼. 여기는 윌리. 내 조수이자 가장 친한 친구일세.”
윌리를 알고 있던 데이비드 오 교수는 그와 악수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윌리는 최하늘과 오한결에게 눈빛 레이저를 발사하며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최하늘입니다.”
윌리와 전화 통화하며 업무를 진행한 최하늘이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려다가 윌리가 보내는 차가운 눈빛에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처음부터 윌리의 심상지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오한결이 피식 웃었다. 덕분에 오한결은 윌리의 모습을 살피느라 저 멀리서 오묘한 눈빛으로 자신의 바라보던 여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윌리가 귀엽게 보이시나 봐요.”
오한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한껏 미소를 머금은 여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안녕하세요, 산드라예요. 당신을 기다렸답니다.”
오한결과 산드라가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악수하자, 이번엔 최하늘이 질투에 불타는 눈빛으로 산드라를 쳐다봤다.
‘아, 또 시작인가. 스트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