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 출국 하루 전날.
거실에 앉은 오한결 가족은 이것저것 짐을 챙겨 캐리어에 넣고 있었다.
지난번 프랑스 출장 때는 오한결이 대충 짐을 싸서 다녀왔는데, 어머니께서 생각해 보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고 이번에는 아들 짐을 꼭 자신이 싸주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딱히 할 일이 없던 아버지와 동생도 합세해 가족 전체가 모여 오한결의 짐을 싸는 모양새가 됐다.
오한결이 잠시 멈춰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제 옷을 다 넣으실 건가요? 캐리어가 터지겠어요.”
어떻게든 구겨서 옷을 집어넣던 어머니가 대답했다.
“많이 가져가면 좋지. 하루 이틀 있을 것도 아닌데.”
은근슬쩍 두꺼운 옷을 몇 벌 빼낸 오한결이 대답했다.
“필요하면 거기서 사면 돼요. 오히려 쇼핑하려고 계획도 세웠는데…….”
옆에서 양말을 챙기던 동생이 말했다.
“이번엔 뉴욕에 얼마나 있는 거야?”
동생이 짝짝이 양말을 한 켤레로 묶는 모습을 발견한 오한결이 양말을 잽싸게 뺏은 후 말했다.
“대략 2주 정도라고 하던데. 아마도 재밌는 일이 생기면 더 있지 않을까?”
“우와! 대박. 형,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내가 뉴욕 매니아거든.”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가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매니아가 되지?”
“음, 그냥 느낌 아니까? 사실은 뉴욕에서 유학했던 친구가 있어서 잘 알아. 그놈이 술만 먹으면 항상 뉴욕 얘기를 했거든. 완전 재수.”
심통 난 동생의 얼굴을 살피며 오한결이 말했다.
“내년에 꼭 데리고 갈게. 이번엔 참아.”
눈을 동그랗게 뜬 동생이 소리를 질렀다.
“진짜 약속한 거다? 나중에 딴소리 하면 내가 복수한다?”
“당연하지. 그동안 매니아 등급을 더 올려놔라. 그럼 더 재밌지 않을까?”
두 팔을 들고 만세 자세를 취한 동생이 우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혼자 흥분했는지 거실을 이리저리 돌더니 친구들에게 자랑하겠다면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짜식, 은근히 짐 싸는 거 귀찮아하더니 이런 식으로 도망쳐?’
그래도 아무려면 어떤가. 동생이 즐거워하는 걸 보니 오한결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사이 오한결의 방으로 잠시 들어간 아버지가 대형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나왔다. 오한결이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게 뭐에요, 아버지?”
“보면 몰라? 네 짐이지.”
“네? 설마 옷장에 있는 옷을 다 꺼내오신 건가요?”
“응. 걱정하지 마라, 겨울옷만 챙겼으니까.”
“…….”
부모님이 힘들게 싼 캐리어를 방 한구석에 세워 놓고 오한결이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내일 잘 설득해서 놓고 가야겠네. 하하.”
가족의 진심 어린 마음은 알겠지만, 이민 가는 것도 아닌데 짐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뭐, 내일 아침에 잘 말해보면 되겠지. 그렇게 오한결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기도 잠시.
“잠이 안 오네…….”
알 수 없는 미묘한 흥분감에 오한결은 결국 눈을 다시 뜨고 말았다.
그리고는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에 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뉴욕은 회귀 전 오한결이 제2의 삶을 시작했던 곳이었다.
빈털터리로 뉴욕에 와서 식당 종업원부터 시작해 자신의 가게를 열기도 했고,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천재적 능력을 얻었다.
오한결이 20년간 뉴욕에 남긴 수많은 작품은 회귀하면서 사라졌겠지만, 그래도 뉴욕이 주는 설레는 흥분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뉴욕 토박이였던 아내를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고민하던 오한결은 새벽이 돼서야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날,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인천공항.
오한결이 캐리어를 끌고 나타나자, 최하늘과 데이비드 오 교수가 저 멀리 손을 흔들며 오한결을 반기고 있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오한결 작가. 저는 어제 긴장돼서 잠을 못 잤네요.”
최하늘이 데이비드 오 교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어머, 저도예요. 지난번 프랑스 출장이 너무 좋아서 사실 이번에도 엄청 기대하고 있거든요. 오한결 작가님하고 가면 놀랄 일이 계속 생기더라고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을 슬쩍 쳐다보고 말했다.
“저도 살짝 그걸 기대하고 있어요. 하하.”
오한결은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잠을 잘 못 잔 건 오한결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저 사람들과 다른 이유였다. 회귀 전 삶을 돌아보고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었으니까.
시계를 확인한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이제 그만 갑시다. 출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세 사람이 캐리어 손잡을 잡고 그만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오한결이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친구들과 제대로 인사를 안 하고 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혹시나 프랑스 출장처럼 짠 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전 6시를 갓 넘긴 시간이 아닌가? 그들은 지금쯤 꿈나라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한결 작가님!”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오한결과 최하늘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서로를 얼싸안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비드 오 교수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누가 보면 이민이라도 가는 줄 알겠어?”
* * *
대략 14시간의 긴 비행 후 오한결 일행이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다.
모두 전날 잠을 설쳐서 그런지, 비행 내내 잠을 잤던 세 사람은 피곤이 가신 해맑은 얼굴로 뉴욕 공항을 빠져나왔다.
최하늘은 휴대폰을 꺼내 문화재단 뉴욕지부 지부장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잠시 뒤 세 사람 곁으로 한 남성이 다가왔다. 그가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최하늘 씨? 웰컴, 뉴욕!”
“지부장님?”
최하늘이 쪼르르 달려가 허리를 숙이고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잘 지내셨어요? 강철 지부장님. 와우, 어쩜 그렇게 그대로세요? 더 멋져지셨어요.”
짧은 회색 머리를 가르마 타서 넘긴 중년 남성이 인자하게 웃었다.
“하늘 씨 소식 잘 듣고 있어요. 워낙 일을 잘 한다고요. 역시 제가 사람을 잘 봤군요.”
회색 머리의 근사한 신사는 명일문화재단 뉴욕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강철 지부장이다. 그는 최하늘이 입사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이나영 팀장과 문화재단 업무를 봤었다. 그때 신입직원 면접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는데, 유난히 최하늘의 똘똘한 모습에 반해 그녀에게 후한 점수를 줬었다.
최하늘이 최종 면접에서 쟁쟁한 경쟁자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강철 지부장이 준 점수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철 지부장이 최하늘에게 느끼는 감회가 남달라 보였다.
강철 지부장이 데이비드 오 교수와 오한결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뉴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먼저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강철 지부장이 손을 내밀었다.
“교수님, 한국 생활은 어떠십니까? 뉴욕에서 매주 보다가 그렇게 갑자기 한국에 교수로 떠나셔서 살짝 서운했습니다.”
강철 지부장의 손을 꽉 잡으며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사실 뉴욕 생활이 그리웠습니다. 한국 생활은 살짝 단조롭다고 할까요? 물론 오한결 작가 때문에 요즘 행복했지만요.”
“하하. 그리우셨군요.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럼 뉴욕에 자주 와 주세요. 한국 예술가들은 모이기만 하면 데이비드 오 교수님만 얘기한답니다.”
오한결은 조용히 뒤에 서서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건네는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강철 지부장이 그런 오한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한결 작가님! 드디어 보네요.”
손을 잡자 다부진 강철 지부장의 힘이 느껴졌다. 오한결은 그의 눈을 바로 쳐다보며 인사했다. 회색 머리가 인상적인 중년 남자의 눈에서 상당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오한결은 그에게서 신수진 이사장과 맞먹는 아우라를 느꼈다. 물론 서로 스타일이 다르긴 했다. 신수진 이사장은 항상 당당했고 자신감 넘치는 언어로 상대방을 압도했다면 강철 지부장은 인자한 웃음 뒤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당한 견고함을 지니고 있었다. 강철이라는 이름답게 그의 영혼도 매우 단단해 보였다.
오한결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뉴욕 출장을 재밌게 만들어 주세요.”
강철 지부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럼요. 뭐든지 재미가 있어야 하지요. 역시 오한결 작가님은 다르군요.”
공항을 빠져나온 일행은 강철 지부장이 몰고 온 세단에 짐을 싣고 차에 올라탔다.
강철 지부장이 운전대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명일문화재단 뉴욕지부로 모실까 합니다. 그전에 출출하시면 식사부터 할까요?”
보조석에 앉은 최하늘이 대신 대답했다.
“네, 식사가 좋겠어요. 저희가 식사한 지 꽤 시간이 돼서 교수님하고 작가님 엄청 출출하실 거예요. 물론 저도. 호호.”
“그럼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라도 있을까요?”
오한결이 물었다.
“문화재단 뉴욕지부는 어디에 있나요? 그 근처에서 먹어도 될 것 같아요.”
“맨해튼 한인타운 근처에 있어요.”
“잘 됐군요. 한식이 좀 땡기긴 했어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맞장구를 쳐줬다.
“저도 한식 좋습니다. 한인타운 한식당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더군요. 뉴욕에 오래 살면서도 이상하게 먹어볼 기회가 없었어요. 이번 기회에 한 번 가보죠.”
“좋습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강철 지부장이 모는 세단이 매끄럽게 공항을 빠져나가 뉴욕 도심지로 향했다.
뉴욕의 야경은 서울의 모습과 다른 당당함과 화려함이 묻어났다.
흔히 뉴욕을 ‘절대 잠들지 않는 도시’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365일 24시간 내내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시너지가 도시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오한결은 창밖을 바라보며 꽉 막힌 도로를 사이로 거대하고 오래된 건물들이 줄지어 선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귀 전, 돈도 없이 뉴욕에 왔던 20대 때는 이 거대한 건물이 위압적으로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그저 멋진 건물로 보이는구나.’
감상에 빠진 오한결을 강철 지부장이 깨웠다.
“오한결 작가님은 뉴욕이 익숙한가요?”
잠시 고민하던 오한결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공식적으론 처음 방문입니다.”
강철 지부장은 룸미러로 오한결을 쳐다봤다. ‘공식적’이라고? 이게 무슨 모호한 말이지?
“아, 그렇군요. 그럼 한인타운도 처음이겠네요.”
오한결이 뉴욕에 처음 와서 일했던 김진영 선배의 식당은 한인타운에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아내와 차린 ‘오’s 식당’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오한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마도요.”
한인타운 근처 주차장에 주차한 일행은 강철 지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한인타운 식당가에 도착했다.
“뉴욕 한인타운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요. 만약 다른 도시의 한인타운을 생각했다면 좀 실망하셨을 겁니다.”
최하늘이 열심히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관찰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여기만의 분위기가 있네요. 익숙한 느낌이라 저는 좋은데요.”
그 순간, 오한결의 눈에 자그마한 식당이 들어왔다.
그곳은 회귀 전 오한결이 뉴욕에 처음 와서 일했던 김진영 선배의 식당이었다. 밖에서 내부가 훤히 보였는데, 김진영 선배가 손님들의 호출을 받으며 정신없이 서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한결은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무척 오래된 흑백 사진 속 기억처럼 흐릿하면서도 가슴을 저미게 하는 느낌의 추억이었다.
식당 일은 무척 힘들었지만, 연인은 공모전 탈락으로 삶의 의욕을 잃은 오한결에게 기회를 준 곳이기도 했다. 아픈 추억이면서도 사실상 고마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추억에 젖어 오한결이 멍하니 식당을 바라보는데, 서빙을 하던 선배가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오한결을 발견했다.
그들은 몇십 미터 사이를 두고 서로를 바라봤다.
상당히 당혹스럽고 놀란 표정을 짓는 선배는 손님들의 호출에도 반응하지 않고 오한결을 바라봤다.
오한결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함께 일하기로 약속해 놓고 별다른 핑계도 없이 뉴욕에 나타나지 않았던 건 오한결이었으니까.
그렇게 오한결을 바라보던 선배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오한결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
자신을 원망할 거라 생각했던 선배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오한결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살짝 눈시울이 붉어진 오한결도 두 손을 들고 선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멀리서나마 서로의 안부를 물은 두 사람.
선배는 식당 손님들의 호출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는지, 이번엔 한쪽 팔만 흔들며 오한결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손님에게 향했다.
오한결은 이미 손님 사이로 사라진 선배를 향해 뒤늦게 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골목 끝에 다다른 일행은 오한결이 멀리서 뒤처진 모습을 보자 소리를 질렀다.
“오한결 작가님! 빨리 오세요.”
한때 원망했던 선배와 이렇게 좋게 마무리되다니. 어쩐지 오한결은 이번 뉴욕 여행이 즐거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만 같아 무척 설렜다. 그는 히죽 웃으며 서둘러 일행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