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20화 (120/202)

제120화 긍정의 힘

서울시청 복도를 힘없이 걷던 문한국 보좌관을 누군가가 뒤에서 불러 세웠다.

“한국 오빠?”

문한국 보좌관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대학 후배 민수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진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와, 되게 섭섭하네. 나 시청 공무원 됐잖아. 그러고 보니까 오빠, 요즘 거의 잠수탄 거 같은데. 동창회도 안 나오고 말이야. 단톡도 씹고. 혹시 무슨 일 있어?”

문한국 보좌관이 민수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공무원이 됐다고? 공무원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는 있는 걸까? 과연 내가 축하해줄 수 있을까?

3년 전, 문한국도 4년 동안 노량진에서 고시원 생활 끝에 국가직 공무원에 합격했고 꿈에 바라던 문체부로 발령이 났었다. 그때는 꿈 같은 미래가 펼쳐질 줄 알고 좋아했었는데, 현실은 암담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일단 보좌관 업무가 퇴근 개념이 불분명해 워라밸은 꿈도 못 꾸고, 문체부에서 일하면 문화생활을 좀 더 할 줄 알았는데, 집과 사무실만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문화예술 단체들이 쏟아 내는 불평불만을 듣다 보면 어느새 일 년이 훌쩍 지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젯밤에도 문한국 보좌관은 혼술을 하며 생각했다.

‘설마 내가 번아웃인가?’

그럼에도 문한국 보좌관은 민수진에게 축하를 먼저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내가 요즘 바빠서 네 소식을 몰랐어. 축하한다. 수진아! 경쟁률도 상당했을 텐데 멋지네. 어때 일은 재밌어?”

당연히 힘들어 죽겠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민수진은 완전히 다른 말을 했다.

“엄청 재밌어.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하는 줄 몰랐어. 민원이 많을 땐 조금 지치긴 하지만, 그 사람들 생활이 얼마나 불편하면 그렇게까지 할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다행이네, 사실 그런 생각하기가 쉽지 않거든.”

“그러니까! 나랑 일하는 과장님도 그 말을 하더라. 공무원이 체질이라고. 적성에 딱 맞대! 십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다고 칭찬하던데. 호호.”

민수진의 해맑은 대답에 오히려 더 우울해진 문한국 보좌관이 이제 그만 작별 인사를 하고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 잘하고. 다음 달에 내가 모임에 나갈게.”

“오, 좋았어! 잠깐, 근데 오빠는 시청에 왜 온 거야?”

“장관님이 서울 시장님과 면담 중이거든.”

“설마 오늘 오전에 나랑 통화한 사람이 오빠였어? 아 그러고 보니까, 오빠가 문 씨구나. 문한국 보좌관. 호호. 난 만날 한국 오빠라고만 불러서, 문한국 이라고 전화로 설명하니까 되게 낯설었나 보네. 정말 몰랐어.”

문한국 보좌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핑계를 대긴. 하긴 나도 똑같이 못 알아듣긴 했지만.’

시청 방문 전에 문한국 보좌관이 비서실에 전화했더니, 과하게 발랄한 톤으로 전화를 받았던 어떤 직원이 생각났다. 그때 그가 이름을 말하긴 했는데, 워낙 바빠서 제대로 들을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그래……. 비서실에 발령받았구나.”

“응! 지난달에 시청에 왔어. 그럼 이제 나랑 소통하면 되겠네.”

순간 고급 정보를 얻을 좋은 채널이 생겼다는 생각에 문한국 보좌관이 민수진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럼 하나만 묻자. 서울시에서 삼각지 화랑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엥? 그게 어디야?”

“용산 근처에 있는데 미술용품하고 화방이 많은 곳이야. 잘 모르는구나…….”

“아……. 근데 거길 왜?”

“……시장님 생각은 어떤데? 새로 짓고 예쁘게 꾸미는 거에 관심이 있나?”

문한국 보좌관의 이상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한 민수진이 대답했다.

“나도 시장님에 대해 잘 몰라. 근데, 지난번 회의 때 보니까, 재건축 이야기만 나오면 엄청 깐깐하게 말 하시더라고. 원칙주의자 같아.”

“아……. 좋네. 원칙주의자.”

문한국 보좌관은 어렵지 않게 앞으로 닥칠 시련을 예측할 수 있었다.

* * *

같은 시각 서울시청 시장실에 한승엽 시장과 이상민 장관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한승엽 시장이 이상민 장관을 지그시 바라봤다.

‘딱히 문체부와 해결할 정책적 이슈도 없는데 왜 온 거지?’

문체부와 협력하는 사업이 있긴 했지만 그건 실무진 선에서 모두 결정할 수준이었다.

보통은 사전에 날짜를 조율해 이런 만남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이상민 장관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한승엽 시장을 아주 당혹스럽게 했다.

이상민 장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가 아주 좋습니다. 이런 것만 봐도 시장님께선 뛰어난 미각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친한 지인이 직접 재배해서 올려보낸 차입니다. 역시 좋은 차를 알아보시는군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장님하고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네요. 우리는 비슷한 구석이 많은 것 같아요.”

장관의 능청스러운 한 마디에 한승엽 시장이 심하게 경계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 수작을 부리는 거지?

한승엽 시장이 괜히 바쁜 척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장관님?”

“지난번 행사에서 시장님을 보고 언젠가 제대로 인사를 나눴으면 했는데, 생각난 김에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게 됐습니다. 시장님과 세상 돌아가는 일로 담소도 좀 나눌까 싶어서요.”

별로 공감하기 힘든 이유였지만 예의상 한승엽 시장이 맞장구를 쳐줬다.

“……아, 그랬군요. 저야 서울시를 책임지는 사람이니까 서울시밖에 할 얘기가 없어서 어쩌죠.”

“서울시는 대한민국의 수도 아닙니까? 당연히 세상 이야기를 하려면 서울시부터 해야겠지요?”

한승엽 사장은 ‘서울시’로 좁혀진 대화 주제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그렇지. 의도가 다분하구먼!

“시장으로서 자랑하자면, 서울시 예술 문화 산업은 수준이 꽤 높습니다. 해외 선진국 문화 정책 담당자들이 아시아에 들를 때면 꼭 서울시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으니까요.”

문체부 장관이니까 당연히 문화 사업에 관심이 많을 줄 알고 꺼낸 얘기였지만 이상민 장관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관의 반응에 기분이 상한 한승엽 시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이상민 장관이 시장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말을 꺼냈다.

“서울시에 낙후된 곳이 많더군요. 재건축 문제가 시급하겠어요?”

한승엽 시장이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생각했다.

‘오호라, 재건축? 분명 서울에 땅을 사 놨구먼. 집값이 걱정돼서 찾아온 거야.’

“문체부 장관님께서 재건축에 관심을 가지다니요. 의외인데요.”

“……저는 항상 민생에 관심이 많아서요. 노후 지역을 볼 때마다 빨리 주거환경이 개선돼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몇몇 지역을 보면 이미 슬럼화가 진행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한승엽 사장은 몸을 뒤로 재치고 나름의 추리를 시작했다.

일단 장관이 노후 지역에 땅을 샀고 그곳이 곧 슬럼화로 변할 위기에 처했다는 뜻을 저렇게 돌려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략 열 군데 중 하나에 투자했단 말인가?

근데 이런 식으로 압력을 주다니, 장관도 정치인이 다 됐군!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이런 청탁은 싹을 잘라야 한다!

“죄송하지만, 제가 원칙적인 얘기를 할 수밖에 없군요. 재건축 같은 민생현안은 지역별 우선순위를 정해 진행하게 됩니다. 물론 열악한 주거환경 개선이 우선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일단 주민 동의를 민주적 절차로 받아야 하고 사전 타당성 조사와 정비계획도 수립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변 경관과 조화도 생각해야 하고요.”

빡빡한 한승엽 시장의 태도에 살짝 기분이 상한 이상민 장관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궁금한 건 주거 지역이 아니라서요.”

한승엽 시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상민 장관을 쳐다봤다.

오호라. 상업 지구에 빌딩을 하나 사셨구먼! 땅값이 오르면 비싼 값에 팔아서 한 몫 챙기려고? 그런 뻔한 수법을 내가 모를 줄 알고? 설마, 기업에서 뒷돈이라도 받았나?

“장관님, 주택 재건축도 원활하게 못 하는 마당에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한승엽 시장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이상민 장관이 한발 물러섰다.

“아니, 그게 아니라…….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보면 노후화된 곳이 보여서 걱정돼서 하는 말씀입니다.”

잠시 뜸을 들인 이상민 장관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아, 맞다! 어제 우연히 삼각지 화랑거리를 지나갔는데, 예전 명성과 비교하면 지금 모습은 살짝 초라하더라고요. 시장님도 화랑거리 역사를 아시죠?”

“…….”

“아이구! 이런! 서울 시장이니까,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봅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설명을 해보자면, 그곳은 한때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유서 깊은 곳을 문체부 장관인 제가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제 무지를 지적하려고 오신 건가요?”

한승엽 시장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자, 이상민 장관이 과할 정도로 손을 흔들었다.

“어이구! 아닙니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거기서 미술 재료를 샀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생각보다 미술용품 상점이 많더라고요. 혹시 시장님도 그림을 좋아하시면 거기에 화방도 많으니, 하나 사셔도 될 듯합니다…….”

“아하! 그 뜻이었군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다행이군요.”

“물론 그림에 관심 있죠. 집에 하나 들여놓을까 했는데 잘됐네요.”

“그렇군요. 제가 그림을 하나 추천해도 될까요?”

“그럼 저야 너무나 감사하죠. 그럼 어떤 걸?”

* * *

언짢은 표정으로 시장실에서 나온 이상민 장관이 복도를 서성이던 문한국 보좌관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문 보좌관, 그만 가세!”

문한국 보좌관이 장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얘기는 잘 해보셨어요?”

빠른 걸음으로 걷던 이상민 장관이 멈춰 서서 투덜댔다.

“말도 마라. 아주 꽉 막힌 사람이야. 삼각지 화랑거리 리모델링은 얘기도 못 꺼냈어.”

“그럼요? 아무런 성과도 없는 건가요? 큰일이네요.”

“일단 오한결 작가와 좀 더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 내게 그림을 선물로 주고 싶다고 말한 것은 분명 내가 해줬으면 하는 역할이 있다는 뜻이니까. 시장을 설득하지 못했다고 해서 오한결 작가가 순순히 그림을 뺏을 것 같지는 않을 것 같거든.”

“아, 그렇겠네요. 오늘은 뭐, 첫 만남이니까. 서로 얼굴을 익힌 거로 만족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장관님.”

이상민 장관이 문한국 보좌관을 스윽 쳐다봤다.

“언제부터 이렇게 긍정적이었지?”

“오늘 긍정적인 후배를 만나서 그런가 봐요. 하하.”

“그래……? 긍정도 전염되나?”

“…….”

다시 걸음을 재촉하던 이상민 장관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도 아무런 성과가 없지 않아. 내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잖나. 그래서 그림 하나는 추천해주고 왔지. 아주 감각적인 작품으로.”

“오, 아주 잘하셨습니다. 예술 작품으로 그렇게 호감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죠.”

갑자기 발걸음을 멈춰선 이상민 장관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 호감. 맞아. 그걸 줬어야 했는데. 어쩌지?”

“왜요? 설마?”

장관이 떠나고 혼자 남은 한승엽 시장이 휴대폰으로 추천받은 그림을 검색했다.

“장관 추천이라니, 꽤 안목이 높겠지?”

검색창에 작품명을 입력한 한승엽 시장은 너무 놀란 나머지 휴대폰을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이게 뭐야!! 공포영화 포스터 같잖아!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의 습작>

이 작품은 스페인의 천재 화가이자 초상화가의 대가로 불렸던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을 잔인하게 뒤틀어버린 그림이었다.

원작은 교황의 권위가 여실히 드러난 수준 높은 초상화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원작이 보여준 엄격한 교황의 권위를 지워버리고 의자에 묶인 교황이 고문을 받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교황이 입을 크게 벌린 채 처절한 고통을 토해내는 그림을 통해 프랜시스 베이컨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걸까?

그는 원작에서 시각적 아름다움을 제거해 촉각적 충격을 주고 있는데, 이런 방식은 이성적 인간이라는 존재를 한낱 육체적 존재이자 푸줏간의 고기로 전락시키는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계 최고 권력자인 교황이 민중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세해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행을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림을 통해 심판하고자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한승엽 시장은 뒤이어 그림과 관련된 정보를 폭풍 검색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짧은 탄식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생각보다 멋진 그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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