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원로예술인
다음 주에 있을 뉴욕 일정을 확정 짓기 위해 오한결과 데이비드 오 교수가 문화재단을 찾았다.
회의실에 모두 모이자 최하늘은 뉴욕대 조교 윌리와 함께 작성한 출장 일정표를 나눠주고 설명을 시작했다.
예술계 유명 인사와 만찬 및 각종 세미나 참석 등 빠듯한 일정을 확인한 오한결이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제가 의견을 좀 내고 싶은데요.”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들고 오한결을 바라봤다.
“네, 작가님. 말씀하세요.”
“사실 지난번 프랑스 출장은 엄청 즐겁고 유익했거든요.”
오한결의 생뚱맞은 발언에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근데 이번엔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신수진 이사장이 당황하자, 이나영 팀장이 대신 나서서 설명했다.
“아, 작가님.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지난번 프랑스 출장과 매우 유사한 일정이에요. 아니, 오히려 더 흥미로운 일정이죠. 뉴욕은 워낙 다양한 나라에서 개성 있는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이잖아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성공한 개인과 단체를 두루 만나보면 굉장히 만족하실 거예요.”
설명을 유심히 듣던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프랑스 출장이 재미있었다고 말한 이유는 그 일정에는 ‘여유’와 ‘낭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제겐 이런 형식적인 유명 인사와의 만남보다 뉴욕을 즐기고 그 느낌을 예술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해요.”
신수진 이사장은 오한결을 바라보며 지난번 프랑스 출장 때를 떠올려 봤다.
‘맞아, 그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프랑스 지부를 통해 오한결에게 파리 곳곳을 소개해 주려고 했지만 그는 보란 듯이 자유 여행을 하듯 프랑스 곳곳을 누비며 다녔었다.
또한 그는 가는 곳마다 독보적인 예술 작품을 남겼다. 심지어 파리 보자르 교수들과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학술적 논쟁까지 벌이고 통쾌하게 승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여유’와 ‘낭만’을 일정에 포함시키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신수진 이사장이 최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한결 작가님이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좀 더 일정을 조절해 봅시다.”
“네, 이사장님.”
데이비드 오 교수는 무척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작가들이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장을 갈 때 저렇게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한 적이 있었던가?
보통은 후원단체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단체가 준비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작가들은 피로를 감수하며 떠나는 게 바로 해외 출장이었다.
사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되도록 많은 뉴욕 문화계 인사들에게 오한결 작가를 소개하고 싶었다. 그래서 빠듯한 일정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점에선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오한결의 주장에 반대하지 않았다.
분명 오한결이라면 뉴욕에서 전 세계가 주목할 만한 대형 사고를 칠 게 뻔했으니까.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신수진 이사장이 회의를 이어가는 와중에 책상에 놓인 그녀의 휴대폰이 눈치 없이 울렸다.
신수진 이사장이 회의를 마치고 받으려고 휴대폰을 끄려는데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급한 전화면 어떡합니까? 지금 받으세요.”
신수진 이사장이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신수진입니다.”
[안녕하세요, 명일문화재단 신수진 이사장님. 여기는 ‘소더비’입니다.]
‘소더비’라고? 순간, 신수진 이사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소더비’라면 ‘크리스티’와 더불어 세계 경매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양대 산맥 아닌가? 순간 오한결과 눈이 마주친 신수진 이사장은 그 모든 게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오한결 작가와 관련된 일이겠구나.
그렇다면 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차분하고 냉철한 전문성을 보여줘야지.
급히 자세를 고쳐 앉은 신수진 이사장이 특유의 냉소적인 목소리로 대응했다.
“소더비에서 제게 무슨 용건으로 전화 주셨죠?”
[저는 소더비 영국 본사에서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는 벨라입니다. 동양미술품팀에서 새로이 한국 담당을 맡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벨라. 근데 소더비에 한국 담당 부서가 있었나요?”
[네. 이번에 새로 부임한 CEO 제이콥께서 오한결 작가님 작품에 완전히 반하셔서요. 그래서 한국 담당 부서를 만드셨는데, 제가 지원했답니다. 사실상 오한결 작가님 전담 매니저라고 보시면 됩니다.]
콧대 높은 소더비의 파격적인 행보에 아찔함을 느낀 신수진 이사장이 잠시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한결 작가 담당이라니. 참 마음에 드네요.”
[저희 소더비는 오한결 작가님께서 방송에서 선보인 그림 3점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괜찮으시면 저희가 한국에 직접 찾아뵙고 싶은데, 지금 이와 관련해서 일정을 논의 드려도 될까요?]
“지금은 곤란하고요. 제가 해외업무 담당자를 배정해서 추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신수진 이사장이 잠시 숨을 고르며 침묵을 지켰다.
통화하던 신수진 이사장의 입에서 ‘소더비’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들은 빨리 신수진 이사장이 통화 내용을 공개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들의 간절함에 답하듯 신수진 이사장이 뉴스를 전하듯 정확하게 소더비 매니저 벨라와 했던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신수신 이사장이 말을 마치자마자, 데이비드 오 교수가 감탄하며 말했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군요. 그 유명한 소더비가 오한결 담당 매니저를 배정하다니요. 이건 한국 예술계의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신수진 이사장이 오한결을 바라봤다.
“축하드립니다. 오한결 작가님. 생각보다 빨리 세계 시장에 진출하셨네요.”
사실 오한결은 지금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했었다. 3점의 작품이 연달아 해외 언론에 주목받자, 그는 분명 그 작품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들이 나타날 거라고 확신했다.
회귀 전 오한결은 자신의 작품이 세계 미술 시장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부호들이 벌인 짓들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던가.
돈 냄새를 맡은 소더비가 오한결 작가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소더비와 라이벌인 크리스티는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감사합니다. 제 그림이 경매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니 다행이군요.”
오한결의 겸손에 신수진 이사장이 미소로 화답한 후 문화재단 직원들을 바라봤다.
“이제부터 문화재단은 오한결 작가의 작품이 최상의 조건으로 거래될 수 있도록 소더비와 직접 업무적 협력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이나영 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력이 많으신 팀장님께서 이번 일을 맡아주세요.”
“네, 이사장님. 회의 끝나고 소더비에 연락을 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신수진 이사장이 최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씨는 팀장님을 도와주시고요. 문화재단, 소더비, 오한결 작가. 이렇게 세 팀이 소통하는데 하늘 씨의 역할이 몹시 클 겁니다.”
“네, 이사장님!”
모든 게 완벽하다는 생각에 뿌듯해진 신수진 이사장이 오한결을 바라봤다.
“작품은 지금 어디에 보관하고 있나요? 괜찮으시다면 재단 금고에 보관하고 싶은데요.”
오한결이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두 점은 아뜰리에에 있고요. 한 점은…….”
주저하는 오한결을 불안하게 쳐다보던 신수진 이사장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한 점은?”
“이상민 장관에게 줬어요. 아, 아직은 대여한 겁니다.”
“!!”
* * *
S호텔 만찬장 상단에 ‘원로 예술인 간담회’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열리는 행사로 매년 원로 예술인들을 초대해 진행하고 있었다.
평균 나이 80세가 넘는 예술인들이 문체부 직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행사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500석이 넘는 자리가 원로 예술인들로 가득 찼다.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주고받는 예술인들 때문에 행사장이 시끌벅적해졌고 더러 몇몇은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자신의 인생 얘기를 크게 떠벌리고 있었다.
행사 시간에 겨우 맞춰 도착한 이상민 장관이 부랴부랴 대기실로 향하는데, 붉은 모자를 쓴 노인이 복도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 원로 예술인 간담회 오셨나요?”
붉은 모자 노인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구, 다행이구먼. 행사에 왔는데, 길을 못 찾았지 몹니까. 어라, 문체부 장관이구먼. 이야! 유명인사를 이렇게 만나다니 난 운도 좋아.”
노인의 행동이 좀 이상했지만 이상민 장관은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대답했다.
“오히려 제가 선배님을 만나 뵙게 돼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선배? 오호. 그렇다면 뭐하나 물어봅시다. 예술인을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
행사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아 계속 시계를 확인하던 장관이 노인의 엉뚱한 질문에 대충 둘러댔다.
“물론이죠. 저는 예술인을 위해 인생을 바친 걸요.”
음흉하게 자신을 쳐다보던 노인을 행사장 입구까지 데려다 준 장관은 찜찜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행사 대기실로 향했다.
잠시 뒤 행사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멘트가 나오자 이상민 문체부 장관이 연단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떠들던 원로 예술가들이 말을 멈추고 이상민 장관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상민 장관이 마이크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예술계 선배님들. 추운 날씨에도 이렇게 저희가 준비한 조촐한 행사에 귀한 발걸음을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희미한 박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수백 명이 동시에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잠시 소리가 잠잠해지길 기다린 이상민 장관이 말을 이었다.
“과거 한국 경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가파른 성장세를 유지했습니다. 맞습니다. 그 유명한 ‘한강의 기적’이죠. 하지만 국가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산업화에 매달릴 때도 어디선가 예술가들은 배고픔을 참으며 예술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흔히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고 말합니다. 하물며 수십 년 전 그때는 어땠을까요?”
과거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예술을 했던 시절이 떠오른 몇몇 노인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장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노동의 가치가 절대적이었던 산업화 시절에도 예술가들은 인생을 걸고 예술 세계에 뛰어들었습니다. 몇몇은 그림 그릴 종이가 없어서 항상 같은 캔버스에 덧칠하듯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린 작품은 그 누구도 돈을 주고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선배님들은 그 암흑의 시대를 버텼고 지금의 한국 예술의 기반을 닦아 놓으셨습니다. 문화체육부 장관으로서 저는 국가를 대표해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노인들의 걸걸한 목소리의 함성이 튀어나왔다.
“귀한 걸음이 헛되지 않도록 오늘은 문체부가 선배님들의 따끔한 충고를 귀하게 들을 것입니다. 그럼 시장하실 텐데, 먼저 식사를 맛있게 하시고 전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마음껏 직원들에게 하시기 바랍니다.”
어젯밤 문한국 보좌관과 머리를 맞대고 쓴 연설문을 모두 읽은 이상민 장관이 고개를 들자 원로 예술가들이 감동한 얼굴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보좌관이 연단에 올라 최근 문체부에서 시행 중인 예술 사업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현재 한국 예술의 성공적 성취 결과를 살짝 과장되게 원로 작가들에게 전했다.
하지만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자유 토론 시간이 되자, 원로 작가들의 엄청난 불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원로 예술가들을 위한 복지가 더 필요하다는 게 다수 의견이었고, 더불어 원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전용 국립미술관을 지으라는 부담스러운 요구도 있었다.
문한국 보좌관과 몇몇 사무관들은 그들이 하는 말들을 하나하나 노트에 적으며, 기계적으로 고려해 보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어서 식사 시간이 됐다.
호텔 셰프들이 총출동하여 행사장 한쪽 구석에 뷔페 음식들을 진열하자, 앞서 불평불만을 마음껏 쏟아내 허기진 원로 작가들이 앞다퉈 접시를 들고 음식을 골고루 담기 시작했다.
그들은 식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한국 예술의 미래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이상민 장관이 대학 은사님과 선배들이 앉은 테이블에 가서 인사를 나누고 행사장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이상민 장관의 팔을 낚아챘다.
놀란 이상민 장관이 뒤를 돌아보자, 붉은 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노인이 금니를 환하게 드러내며 씨익 웃고 있었다.
무엇보다 굵은 금목걸이가 찰랑대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이상민 장관이 물었다.
“아, 아까 뵀던 선배님이시군요.”
“그래, 나를 기억하는군. 그럼, 맞춰 보거라. 내 이름을.”
짧은 순간이지만, 이상민 장관은 그가 아는 선후배와 예술계 사람들을 떠올려 봤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노인과 비슷한 어떠한 사람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예끼! 이놈아. 나를 몰라보느냐!”
“아이구,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서요. 죄송하지만, 제가 좀 바빠서. 그럼, 맛있는 식사하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십시오.”
재빨리 자리를 뜨려던 이상민 장관의 손을 낚아챈 노인이 말했다.
“어디 토끼려고! 문체부 장관이 예술인을 이렇게 홀대해서 되겠는가!”
노인이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상민 장관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네. 무슨 용건이라도?”
노인이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몇 개 그렸는데, 그걸 좀 팔고 싶어서 말이야.”
“문화센터요?”
그때 행사 담당 직원들이 재빨리 달려와 노인의 양팔을 잡고 말했다.
“할아버지!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니까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분명 입구에서 막았는데.”
“이거 놔! 예술인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아까 행사 전에 문체부 장관이 내게 약속했단 말이다. 뭐든지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스트레스로 두통을 느낀 이상민 장관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는데, 때마침 문한국 보좌관에게 전화가 왔다.
[장관님, 큰일 났어요! 제 소식통에 의하면, 소더비에서 오한결 작가의 방송 그림 3점을 경매에 부치겠다고 문화재단에 연락을 했나 봐요. 근데 1점은 장관님이 갖고 계시잖아요! 어떡해요?]
장관은 심장이 툭 떨어져 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소더비라고? 일이 너무 커진 거 아닌가? 그럼 어떡하지……. 오한결 작가에게 그림을 반납해야 하나? 아니지, 서울 시장을 설득해 화랑거리를 리모델링하면 자신한테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래!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문 보좌관. 당장 서울 시장과 약속을 잡게. 서두르게!”
그 사이 붉은 모자를 쓴 노인이 행사장 밖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예술인을 탄압하는 문체부 장관은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