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진실 게임
“어이구! 어서 오세요.”
입이 귀에 걸린 김 사장이 국장과 김명호 피디, 김 작가를 맞이했다.
세 사람은 뻘쭘하게 회장실 소파에 앉은 채 김 사장이 직접 끓인 차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김 사장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또다시 최고 시청률을 갱신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김 사장이 차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물론 교육방송은 시청률에 연연하는 곳이 아니긴 합니다. 하지만 워낙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이언트 팡수TV만 해도 우리 교육방송에서 자체 운영 중인 인터넷 방송이고요. 그게 생각지도 못한 인기를 끌면서 재미없고 고루한 이미지의 교육방송을 바꿔놓았어요.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교육방송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대가 열렸단 말입니다.”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장님. 양질의 교육 콘텐츠가 꼭 재미없는 구성으로 전달될 필요는 없으니까요. 현재 너튜브만 봐도 교육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대부분 독자들에게 교육으로 재미와 기쁨을 주고 있어요. 무엇보다 높은 시청률은 교육방송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보장해 주고 앞으로 우리 방송국의 미래와 발전 방향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그래요. 정확한 말씀입니다. 특히나 오한결 작가의 방송은 전혀 자극적인 요소 없이 오로지 작가의 예술적 재능으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어요. 굉장히 순수하고 깨끗하지만 엄청난 핵폭탄급 재미 요소가 숨어 있었던 거죠.”
김 사장이 김명호 피디를 지그시 바라봤다.
“우리 김명호 피디님이 한 건 하셨어요. 내가 보도국장일 때 우리 김명호 피디가 신입으로 입사했는데, 언제 이렇게 훌륭한 피디가 됐을까요? 아주 칭찬합니다.”
입사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칭찬을 들은 김명호 피디는 사장에게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 김 사장이 껄껄껄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오한결 작가의 방송 프로를 정규로 편성하자는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오늘 오후 긴급 이사회를 열어서 그 안건에 대해 처리할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오한결이 출연을 거절했다는 소식을 접한 세 사람은 사장이 전하는 뜻밖의 소식에 웃고 있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들은 사장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국장이 총대를 메고 말했다.
“제가 보고를 늦게 드린 것 같군요. 오한결 작가에게 미리 정규 방송 제안을 했으나 아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사장님.”
김 사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이유가 뭐죠? 작가 본인 인지도도 사실상 엄청나게 끌어 올렸고 무엇보다 작품 홍보도 상당하지 않습니까. 장점뿐인 방송을 포기할 이유가 뭔가요?”
김명호 피디가 대답했다.
“사실 워낙 바쁜 작가라서요. 제가 처음에 섭외했을 때도 엄청 바빠서 거의 반년 만에 지금 방송에 출연한 거였습니다. 앞으로 계속 출연하기엔 일정상 부담됐을 거로 생각합니다.”
초점 없는 눈빛의 김 사장이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면서 손가락 끝으로 소파 손잡이를 툭툭 쳐대기 시작했다.
“저런…… 일리가 있군요. 하지만 무척 아쉽기도 하네요. 사실 제가 팡수보다 오한결 작가를 더 좋아합니다. 최근에 팬카페도 가입했어요. 하하. 그러니까 일단 포기하지 말고 한 번 더 출연 제안을 해봅시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뜻밖의 정보에 김명호 피디가 눈을 굴리며 김 사장을 쳐다봤다. 뭐? 팡수보다 오한결을 더 좋아한다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김명호 피디가 충동적으로 질문을 했다.
“그래도 팡수를 향한 애정이 남다르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하하.”
분명 사장실에 이 세 사람들밖에 없는 걸 알면서도 김 사장이 두리번대며 누가 엿듣지 않을까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좋아하죠. 하지만 전 예술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오한결 작가의 팬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김 사장의 은밀한 고백에 기분이 좋아진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지금이라도 오한결 작가를 붙잡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내 세 사람은 서로가 위험한 생각을 한다는 것을 눈치를 채고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김 사장이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국장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약속한 하와이 비행기 티켓하고 오늘 회식비입니다.”
“!!”
국장이 재빨리 봉투를 낚아챈 뒤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게 전 세계 인기 프로그램이 되고 이렇게 포상 휴가까지 얻게 되다니.
상업 방송에 진출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었다.
‘이게 바로 오한결 효과인가?’
김 사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 보시면 티켓이 한 장 더 있을 겁니다. 오한결 작가도 드리세요.”
봉투를 확인한 국장이 직원 수보다 한 장 더 있는 티켓을 확인했다. 국장이 불안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저기…… 사장님. 사전에 오한결 작가가 하와이 일정을 함께할 수 없다고 연락이 와서요. 다음 주에 뉴욕 출장이 잡혔답니다. 이건, 사실상 필요가 없겠는데요.”
잠시 고민에 빠졌던 김 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래도 일단 이 티켓은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김 사장의 이 한마디에 세 사람은 당연히 다른 직원에게 돌아갈 거로 생각했다. 그들은 방송국에서 제일 친한 직원을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렸다. 누구와 함께 가야 재밌는 여행이 되려나. 당연히 저 두 사람은 내게 양보하겠지?
세 사람은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오한결 때문에 제일 고생한 건 나 아닌가!
세 사람이 머리를 굴리는 낌새를 눈치챈 김 사장이 사냥감을 노리는 사자처럼 느긋하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오한결 작가가 거절하면, 이 티켓은 제가 가집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와이에 가겠습니다.”
“!!”
몹시 충격을 받은 세 사람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사장과 함께 여행이라니!!
절대 안 될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 될 것이며, 삼시 세끼는 당연하고 여행지 곳곳에서 김 사장의 비서 역할 해야 할 것이다.
막아야 한다!! 반드시!
하지만 김 사장이 더 강력한 한 방을 날렸다.
“사실 제가 육식을 안 좋아합니다. 더군다나 요즘 무릎이 아파서 호텔에만 있어야 할 것 같고요. 그리고 혼자 있는 걸 싫어해서. 음…….”
“!!”
순간 ‘최악이다’라는 말이 김 작가의 목구멍을 통과하려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때마침 회장실 밖에서 요란한 소란이 들리더니 팡수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누굽니까! 하와이 가는 사람이? 나 빼고 다 갑니까?”
김 사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팡수 왔나요? 하하…….”
“사장님, 배신 때립니까. 대빵은 배신도 스케일이 큽니다.”
“오해입니다. 해명을 하자면…….”
팡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생각에 김 사장이 슬쩍 세 사람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세 사람은 주저 없이 그 불편한 자리를 피해 회장실 밖으로 나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김 작가가 말했다.
“팡수 때문에 살았네요. 그나저나 사장님과 하와이 여행은 정말 아닌 거 같아요.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국장이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설령 오한결 작가가 하와이에 간다 해도 정말 평온한 휴가가 될까? 또 엄청난 변수가 등장할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인 김명호 피디가 대답했다.
“그러네요. 어쩌면 김 사장님이 나을 수도…….”
김 작가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 * *
신태진 회장 부부가 양승호 비서 커플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다.
이풀잎이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들어오자, 이현미가 매우 기뻐하며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풀잎 씨와 꼭 닮은 꽃이네요. 고마워요.”
신태진 회장이 양승호 비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 덕에 훌륭한 여자친구를 만난 걸 기쁘게 생각하라고.”
쑥스러워 얼굴이 발개진 양승호 비서가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회장의 말이 맞았다. 그가 그림을 함께 배워보자고 하지 않았으면 이풀잎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무척 당혹스러운 제안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도전은 이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평소 한식을 좋아하던 신태진 회장 부부는 젊은 커플을 위해 유명한 호텔 셰프를 초대해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준비했다.
회장 부부가 편안하게 분위기를 이끌자, 긴장이 풀린 양승호 커플도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하며 기분 좋은 식사를 이어갔다.
신태진 회장이 와인 때문에 살짝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이풀잎 선생이 오한결 작가와 대학교 동창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맞아요. 회장님.”
“오한결 작가 얘기 좀 해주겠어요? 학교 다닐 때는 어땠나요? 그때도 지금처럼 그림 실력이 굉장했죠?”
사실 이풀잎은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되리라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은 유명 작가가 된 오한결의 과거가 무척 궁금할 것이고 그의 과거를 아는 자신에게 관련 질문을 쏟아 낼 게 불 보듯 뻔해 보였다. 그게 대학 동창의 귀찮은 숙명이었다.
‘문제라면, 사실대로 말하면 과연 사람들이 믿어 줄까? 라는 거지.’
오한결이 열심히 그림을 그린 건 사실이었지만 실력은 무척 평범했다고. 지금 그가 유명 작가가 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한다면 믿어 줄까?
그래도 거짓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건 이풀잎의 인생철학과 맞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결이는 평범했어요. 딱히 눈에 띄지 않는 그런 학생이었죠.”
예상 밖의 말을 들은 신태진 회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창의적인 사람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죠. 아마 오한결 작가가 그런 부류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하지만 이풀잎은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제가 한결이를 잘 못 본 걸 수도 있죠. 근데 평범했던 건 사실이에요.”
양승호 비서가 이풀잎을 도와주려고 물었다.
“입학 성적이 좋았을 거예요. 가끔 천재들의 삶을 보면 수석 입학한 후 학교 공부에 소홀히 하고 자신의 꿈을 좇잖아요. 오한결 작가님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이풀잎이 주춤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서양학과 수석은 저였어요.”
이현미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어머! 여기 또 한 명의 인재가 있었네요. 어쩐지 꼼꼼해 보이는 풀잎 씨는 그림도 잘 그릴 것 같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사모님.”
기분이 좋아진 양승호 비서가 와인을 원샷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역시! 풀잎 씨 대단해요. 그렇다면 그때 당시 오한결 작가님보다 풀잎 씨가 훨씬 그림을 잘 그렸겠네요. 수석이라는 객관적 데이터로 입증된 사실이니까요. 하하.”
양승호 비서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낀 이풀잎이 회장 부부의 눈치를 살피며 그만하라고 손짓을 했다. 하지만 취기가 잔뜩 올라온 양 비서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풀잎 씨 그림에는 맑은 영혼이 깃들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그 석고 소묘를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제가 본 소묘 중 가장 훌륭하고 멋진 작품이었어요. 당장 미술관에 걸어도 하나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이었죠. 역시 미대 수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네요.”
신태진 회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양 비서를 쳐다봤다.
“자네 취했나?”
깜짝 놀란 이현미가 회장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어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양 비서가 여자 친구를 칭찬했다고 그런 말을 하시면 어떡해요.”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기분이 좋은 양 비서가 실실거리며 말했다.
“사모님 저는 괜찮습니다. 하하. 때론 진실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거든요. 오한결 작가가 무명 시절을 잘 이겨냈듯이 곧 우리 풀잎 씨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반열에 오를 겁니다. 제가 그렇게 믿고 있거든요. 안 되면 제가 만들어 드릴 겁니다!”
이풀잎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털웃음을 보인 신태진 회장이 양승호 비서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주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구먼. 하긴 좋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