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오케스트라
세트장을 에워싼 조명들이 오한결을 비추고 있다.
오한결은 이젤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김 작가가 준 대본을 읽고 있었다. 그런 오한결의 모습을 보며 김 작가는 그가 이번에도 대본대로 말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항상 보는 척은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오한결이 대본을 손에 쥐고 의외의 말을 꺼냈다.
“김 작가님 필력이 좋으시네요.”
김 작가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어머, 감사합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신경을 좀 썼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지난 방송 때 오한결이 한 번도 대본대로 진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대본을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김 작가는 사실상 페이지를 채운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썼던 것이다.
근데 그런 글에 필력이 좋다니? 농담인가?
아니면, 그동안 쥐어짜듯 글을 쓰던 버릇을 버리자 제대로 된 글이 나온 건가?
엄청난 혼란이 김 작가를 집어삼켰다.
방송 시간 1시간 전.
스태프들이 스튜디오를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지막 생방송 점검에 나섰다.
꼬인 동선을 확인한 예민해진 카메라 감독들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댔다.
“김명호 피디 어디 갔어요? 이거 확인해 줘야 하는데?”
“저기 김 작가님, 큐시트 점검 좀 해줘요. 지금 시간대가 안 맞잖아요. 이러다 방송사고 나요!”
펑!
“으악!”
갑자기 스튜디오 조명 하나가 나가더니 연기가 피어올랐다.
“뭐야! 사고 난 거야? 안 다쳤어?”
급하게 뛰어온 조명 감독이 합선된 전기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큰일 날 뻔했네요. 우선 전기팀에 연락해서 점검을 받아봐야겠어요. 모두 조심합시다! 오늘 뭔가 불길해요.”
모두 우왕좌왕하며 일을 서두르고 있을 때쯤, 스튜디오로 검은 정장 무리가 들어왔다.
무리에 둘러싸인 백발의 신사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를 보며 말했다.
“우리 직원들이 일을 참 열심히 합니다. 하하.”
국장이 겸손하게 양손을 모으고 김 사장의 말에 대답했다.
“맞습니다. 사장님. 세계가 주목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 아닙니까. 연이은 성공으로 스태프들의 사기가 부쩍 올랐습니다. 모두 사장님 덕분입니다.”
김 사장이 껄껄껄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요. 모두 다 국장님과 스태프들이 고생해서 만든 결과 아닙니까. 하하. 킁킁. 근데,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나지 않나요?”
아까 스튜디오 뒤쪽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뒤늦게 스튜디오 입구 쪽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국장이 무리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김명호 피디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빨리 가서 확인해봐. 무슨 일인지!”
“사장님,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김명호 피디가 김 사장에게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비우자, 국장이 말을 꺼냈다.
“김 피디가 확인하러 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은 내가 아니라 국장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죠.”
저 멀리 수많은 조명에 둘러싸인 오한결을 바라보던 김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한결 작가는 연예인 같군요. 모든 게 완벽해 보여요.”
오한결에게 다가가려던 김 사장이 바닥에 깔린 전선에 발이 걸려 심하게 휘청거렸다. 놀란 국장이 재빨리 김 사장을 잡으며 말했다.
“사장실에서 방송을 보시지요. 여긴 장비들이 많아 위험합니다.”
“그래요. 국장도 같이 갑시다.”
“넵!”
방송 시작 30분 전, 데이비드 오 교수가 메이크업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즉흥적으로 방송에 임하는 오한결과 다르게 데이비드 오 교수는 세 시간 전에 미리 방송국에 도착해 대본을 숙지하고 김 작가와 방송 전반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말끔한 정장을 입은 데비이드 오 교수를 본 오한결이 말했다.
“우와, 교수님 완전 다른 사람 같네요. 정말 멋져요.”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데이비드 오 교수가 대답했다.
“오한결 작가 덕분에 제대로 된 방송 메이크업을 받아 봤습니다. 잠깐 패널로 나올 때는 잡티만 가려주더만. 하하.”
최하늘이 데이비드 오 교수 곁으로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교수님, 제가 어제 메일로 보내드린 칸딘스키 자료 인쇄본 있거든요. 혹시 필요하시면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자료는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왔어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오한결 작가가 어떤 그림으로 모두를 놀라게 할지 알 수 없으니, 단순히 외운 지식은 그저 참고사항이겠죠. 실시간으로 그림을 보고 제 감상평을 전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어수선한 스튜디오 상황을 정리한 김명호 피디가 무척 긴장된 얼굴로 오한결 곁으로 다가왔다.
“작가님, 컨디션 괜찮으시죠?”
오한결이 김명호 피디의 어두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피디님이야말로 괜찮으세요?”
“아니요.”
“…….”
“유난히 오늘따라 이상한 일이 많이 생겨요. 전선이 합선되지 않나, 김 작가 만든 큐시트 시간대가 엉망이지 않나, 카메라 감독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 가고, 사장님은 부임 후 처음으로 스튜디오에 내려오시고……. 오한결 작가님은 김 작가 대본을 숙지하시고…….”
이 모든 일이 생방송 도중 닥쳐올 불운을 상징하는 것처럼 김명호 피디가 투덜대자, 오한결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볼게요.”
김명호 피디가 자연스럽게 데이비드 오 교수를 바라봤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 피디님, 저도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뒤에서 얘기를 조용히 듣던 김 작가가 김명호 피디에게 속삭였다.
“우리 스태프 걱정이나 해주세요. 감독님.”
때마침 후드를 입은 스태프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생방송 십 분 전입니다!”
이제 스튜디오 주변으로 묵직한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모두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생방송을 앞두고 짜릿한 긴장감을 즐기고 있었다.
그동안 오한결 작가 덕분에 다이나믹한 생방송을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좋은 추억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방송이라고 했으니, 잘 진행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스태프가 한마음 한뜻으로 세 번째 그림 방송의 성공을 기원했다.
김명호 피디가 소리치자, 일제히 모든 스태프가 긴장했고 잠시 뒤 생방송을 알리는 신호가 들어왔다.
[ON AIR]
이젤 앞에 앉은 오한결이 능숙하게 자신에게 향한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한결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방송이자 마지막 방송인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동안 여러분께 흥미롭지만 자극적인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많은 분이 저를 응원해주셨지만, 시각적 예민함을 가진 분들에겐 아무래도 꽤 불편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방송에서는 모든 시청자가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준비해 봤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오한결이 자신의 옆모습을 찍던 카메라를 향해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제가 지휘자가 되어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산뜻하고 발랄한 음악으로 들려드릴까 합니다.”
멍하니 오한결의 말을 듣던 김 작가가 조용히 대본을 가방에 집어넣고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오늘도 오한결 작가 맘대로구나. 근데 역시나 내가 쓴 대본보다 좋다. 칫.”
오한결이 데이비드 오 교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들려드리는 음악을 해석해줄 전문가를 모셨습니다. 국립예술교육원 데이비드 오 교수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살짝 긴장한 데이비드 오 교수가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데이비드 오입니다. 제가 잠시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오한결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 제가 마치 음악 전문가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저는 미술을 전공한 교수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하하. 제 말에 시청자들이 오해를 하실 수 있었는데,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오한결이 슬쩍 데이비드 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어떤 음악을 지휘할지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는데요. 그 이유는 지금 제 느낌을 즉흥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서 작품을 해석하는데 좀 어려움이 있을까요?”
“시각적 이미지를 음악으로 해석하는 일에는 언제나 어려움이 따르지요. 하지만 그건 저 같은 평론가의 몫일 뿐, 오한결 작가는 그저 내면의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될 일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림을 그려보도록 하죠.”
순간 오한결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면서 눈빛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됐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데이비드 오 교수가 그림을 노려보며 자신의 예술 지식을 최대한 소환해 해설을 위한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그림은 도형에 가까웠다.
길쭉한 선이 캔버스를 세로로 가로질렀고 그 꼭짓점에서 파생된 하나의 선이 45도 각도로 뻗어 삼각형 모양을 그려냈다.
그렇게 그러진 삼각형을 중심으로 길고 짧은 선들이 여기저기 뿌려지듯 나타났다.
그러자 그림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그림 전체가 흔들려 보였다.
잠시 뒤 동그란 형태의 도형이 등장했고 크고 작은 원들이 곳곳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다시금 나타난 선들은 구 모형을 관통했고 선들이 쌓이고 겹치면서 격자무늬 패턴이 그림 우측에 자리 잡았다.
단순하던 그림은 점점 복잡해졌고 삼각형, 원형, 격자무늬, 그리고 자잘한 선들이 리듬감 있게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색도 다채로웠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의 점들이 곳곳에 찍히며 묘한 불균형을 이뤘고 그 자체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
조용히 오한결의 그림을 지켜보던 데이비드 오 교수는 칸딘스키의 <컴포지션 No.9>을 떠올렸다.
그것은 작곡가의 변주와 같은 그림이었다.
다채로운 색과 악보 속 음계와 비슷한 도형들의 조합은 왜 그 작품이 컴포지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는지 알게 해준다.
원의 다양한 크기는 강, 약, 중강 등 템포를 의미하고 그것들이 모여 강력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곳곳에 그려진 선들은 시각적 생동감과 청각적 박자를 느끼게 했다.
원의 크기와 색의 변화, 그리고 선들의 자유로움은 첼로와 바이올린, 트럼펫과 피아노 건반의 형태와 무척 닮아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해설을 시작했다.
“오한결 작가가 그린 다채로운 시각 이미지를 음악으로 들으려면 ‘공감각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감각은 충분한 훈련을 통해 기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그 감각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되도록 쉽게 안내를 해보겠습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손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먼저, 그림을 보면 다양한 도형과 색채가 추상화를 이루면서 ‘음악적’ 느낌을 만들어 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어떤 이들은 음악을 들을 때, 색과 모양 등 시각적 감각을 같이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면 저런 형태이지 않을까요?”
잠시 오한결의 그림을 유심히 관찰한 데이비드 오가 말을 이었다.
“저런 복잡한 구성을 교향악적 구성이라고 말합니다. 완전한 추상에 이른 작품은 사물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전혀 없는 상태가 되죠. 그때 대상성이 해방되고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배열이 진행됩니다. 그렇게 그림은 음악을 닮아가는 거죠.”
그림을 거의 완성한 오한결이 입을 열었다.
“칸딘스키는 회화도 음악과 같은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가요? 여러분은 제 그림에서 음악을 느낄 수 있습니까?”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마지막 설명을 보탰다.
“섬세한 사람들은 벌써 그림에서 청각적 즐거움을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공감각은 매우 특별한 능력이기에 어쩌면 적지 않은 분들은 그것을 듣기 위해 별도의 훈련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제 설명을 듣고 그림 속 도형에서 느껴지는 박자와 흐트러진 구도에서 들리는 리듬을 느껴보세요. 마지막으로 칸딘스키는 <점.선.면>이라는 저서에서 점.선.면이라는 회화의 세 가지 요소를 어떻게 음악적으로 번역할 수 있을지 설명을 해놨답니다. 이 방송 이후 회화의 음악성을 공부하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방송이 끝나자, 매번 그랬던 것처럼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스튜디오를 가득 채운 적막감에 다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생각하기 바빠 보였다.
그때 데이비드 오 교수가 벌떡 일어나 오한결을 향해 존경의 박수를 보내자, 오한결도 감사의 의미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그러자 스튜디오에 있던 모든 스태프가 다 같이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김명호 피디는 뒤돌아 몰래 눈물을 흘렸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