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재즈클럽
우중충한 날씨가 오후 내내 이어지더니 해가 떨어지자마자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예술 평론 기고문을 쓰던 앤드류가 무심히 창밖을 바라봤다.
며칠 전 뉴욕타임즈에서 오한결 작가에 대한 평론을 의뢰받았다. 앤드류는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그의 작품을 본 적도 없지 않은가? 오로지 인터넷에 떠도는 그의 작품 사진과 최근 한국 교육방송을 통해 본 그의 그림 방송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앤드류는 선뜻 거절하지 못했다. 자기 말고도 오한결 작가의 평론을 앞다퉈 하고 싶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뉴욕타임즈의 제안은 그에게 무척 달콤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빗줄기는 더 굵어져 메마른 도시를 가득 적시고 있었다.
앤드류는 최근 안구 건조증으로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 지금 시간이? 오한결 작가의 세 번째 그림 방송을 놓치면 안 되지.’
시계를 확인한 앤드류가 두 시간가량 남은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하던 업무를 정리했다. 문서파일을 저장하고 오한결과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한 후 책상 한쪽 모서리에 가지런히 놓았다.
앤드류가 코트와 우산을 챙겨 뉴욕대 교수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우산을 썼는데도 휘몰아치는 빗줄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건널목에서 차량 바퀴에 튀긴 물 폭탄을 가까스로 피한 후 학교 앞 그가 좋아하는 펍(Pub)으로 들어갔다.
뉴욕대 힙플레이스 ‘1984 재즈클럽’
앤드류가 대학생 때부터 찾던 곳으로 간단한 식사와 술이 제공되는 미국식 술집이었다.
내부는 무척 어두컴컴했다. 군데군데 켜져 있는 조명들이 사람들의 형체를 겨우 알아보게끔 할 정도였다. 이곳은 무척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면이 많아, 앤드류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종종 갖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혼자 온 손님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둘 또는 셋이서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앤드류는 애용하는 바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머리 위 조명이 살짝 비켜 간 그곳은 재즈클럽 중 가장 어두운 장소로 남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로 고민하거나 우울할 때 생각을 정리하려는 손님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긴 검은 생머리의 바텐더가 한껏 미소 지으며 앤드류에게 다가왔다.
“앤드류, 어서 와요.”
“오, 산다라군요. 오랜만이네요. 여행은 어땠나요?”
몸을 앤드류 쪽으로 숙인 산다라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환상적이었어요. 사실 겨울이 싫어서 따뜻한 나라를 돌아다녔거든요. 강렬한 태양과 숨 막히는 열대야를 마음껏 즐기고 왔죠.”
“오, 그랬군요.”
앤드류는 산다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한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태닝한 피부는 그녀가 몇 달간 낯선 이국땅에서 살았다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계 미국인 산다라는 뉴욕대 출신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앤드류가 한참 선배라 같이 수업을 들은 적은 없지만 그가 들은 소문으론 예술대 출신의 그녀는 종종 기행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졸업 후 세계일주를 마친 산다라는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1984 재즈클럽’에서 바텐더로 일을 하고 있다. 앤드류는 언제든 그녀가 자유를 찾아 떠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산다라가 앤드류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오늘이 오한결 작가 방송 날이죠? 무척 기대되네요.”
앤드류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산다라도 오한결 작가를 좋아하나요?”
“물론이죠. 언젠가 꼭 만나고 싶은 예술가예요. 분명 기회가 오겠죠?”
앤드류가 팔짱을 끼고 산다라를 지그시 바라봤다.
“제가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죠. 조만간 오한결 작가가 뉴욕에 올 거예요.”
“어머! 정말인가요?”
“네, 제가 초청을 했거든요. 데이비드에게 부탁했죠.”
“오! 데이비드가 오는군요. 그분은 잘 지내죠?”
산다라는 데이비드 이름을 듣자마자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데이비드와 앤드류는 뉴욕대 강의가 끝나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항상 재즈클럽을 찾았었다.
그때 산다라는 데이비드의 순수한 열정과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러던 그가 한국의 유명 예술대학교 교수가 되면서 뉴욕을 떠났던 것이다.
“데이비드가 뉴욕에 오면 꼭 이곳에 들렸으면 좋겠어요. 그립군요.”
“물론이죠. 당연히 그럴 겁니다.”
몇몇 손님이 반대편 바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산다라가 손님들에게 방향을 틀며 말했다.
“늘 마시던 걸로 드릴게요. 앤드류.”
시간이 지날수록 재즈클럽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들이 쏟아 내는 수다는 이곳에 묘한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심장을 흥분시키는 음악 비트는 앤드류를 설레게 하면서도 동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한 시간 후면 오한결 작가 방송이 시작하겠구나.”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앤드류가 한껏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오한결 작가의 방송을 재즈클럽에 본 건 두 번째 방송부터였다. 오한결의 첫 번째 방송은 그가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때 우연히 너튜브를 통해 접하게 됐다.
오한결의 화려한 그림 솜씨를 보던 앤드류는 설마, 설마를 계속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건 위대한 예술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이었다. 그림은 갈수록 더 엽기적으로 변했고 그럴수록 오한결의 예술적 위대함은 더욱 커져 보였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앤드류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며 그림 방송을 돌려보고 또 돌려봤다.
앤드류에게 오한결 작품은 거대한 감정의 폭탄이었다. 즐기면 즐길수록 생명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다시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오한결의 방송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 마셔요. 앤드류.”
산다라가 짙은 흑맥주를 앤드류 앞에 내려놓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싸하고 톡 쏘는 흑맥주를 들이켠 앤드류는 그제야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과연 오늘은 어떤 그림을 보여줄까? 시간이 갈수록 심장이 점점 옥죄여왔다.
이제 1시간 남짓 남았다.
재즈클럽 어두운 그늘 아래 홀로 술을 마시던 앤드류의 등을 누군가가 툭툭 쳤다.
“교수님? 일찍 오셨네요?”
앤드류가 뒤를 돌아보자, 그의 조교로 일하는 거구의 흑인 윌리가 거침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윌리? 자네야말로 오늘 늦는다며?”
윌리가 앤드류 옆자리에 덜컥 앉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물기를 닦았다.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났어요.”
“다행이군. 근데 밖에 여전히 비가 많이 오나 보군.”
민망한 듯 손수건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은 윌리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땀이에요. 조금 빨리 걸었더니 덥네요.”
“한겨울에도 땀을 흘리다니. 살 좀 빼야겠어.”
“그래서 지난주부터 한 끼를 줄였어요.”
요 며칠 윌리가 삼시 세끼 챙겨 먹던 모습을 본 앤드류가 의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 몇 끼를 먹는데?”
“여섯 일곱 끼는 먹죠.”
“……그렇군. 행운을 비네.”
“내 친구 윌리! 어서 와.”
때마침 산다라가 윌리를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왔다. 그녀는 윌리와 뉴욕대 동창으로 학교 다닐 때부터 거의 붙어 다닐 정도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 산다라가 재즈클럽에 취업하자 그 누구보다 윌리가 제일 기뻐했었다. 더 자주 오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 내가 휴가간 사이 다이어트를 시작했구나. 얼굴이 반쪽이야.”
“맞아. 한 끼를 줄였거든.”
“이런, 너무 굶으면 건강에 해로워. 내가 스페셜 요리를 갖다 줄게. 특별히 윌리가 좋아하는 폭탄치즈를 듬뿍 올려서 말이야.”
산다라가 급히 주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윌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앤드류가 보기엔 산다라는 윌리를 친구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윌리는 그녀가 천천히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앤드류가 윌리에게 물었다.
“다음 주에 데이비드와 오한결이 뉴욕에 오는데 차질 없도록 잘 준비해 주게나.”
그 말을 들은 윌리의 표정이 달갑지 않게 변했다.
“문화재단 직원도 오는 거죠? 워낙 깐깐한 사람 같더라고요.”
“문화재단에 잘 협조해주게. 원래 뉴욕대 방문 일정만 있었는데 문화재단 덕분에 뉴욕시 예술인 단체와 다국적 기업, 정부 기관하고 만남이 주선되지 않았나.”
투덜대던 윌리가 앤드류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보조금으로 소규모 행사만 운영해본 윌리는 명일문화재단이 엄청난 예산과 네트워크로 대규모 행사를 쉽게 준비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원래 데이비드 오 교수의 방문 일정은 단순했다. 뉴욕대 교수들과 만찬을 하고 가능하다면 세미나도 참석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가지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예술대 졸업 작품 전시회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오한결이 끼어들었고 자연스럽게 문화재단도 이번 행사에 개입했다. 그렇게 일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화려해졌다.
무엇보다 문화재단 최하늘 직원의 꼼꼼한 일처리 때문에 편하긴 했지만, 그녀의 화려한 업무 스킬을 따라잡지 못한 윌리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그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솔직히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어쨌든 이게 모두 오한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아보니까 오한결 작가와 최하늘은 20대 초중반 청년들이었다.
다음 주에 뉴욕에 오면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가 몰래 한소리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쪼잔 해 보이지만 그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산다라가 접시 가득 고기를 담아오자, 윌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산다라는 나를 너무 잘 알아. 고마워.”
“부족하면 말해, 윌리.”
게걸스럽게 음식을 퍼먹는 윌리를 보며 앤드류는 그가 왜 살이 쪘는지 아주 명확하게 알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방송을 기다리는 사이, 지난 오한결의 두 번째 방송을 휴대폰으로 보던 앤드류가 윌리에게 말했다.
“오한결 작가가 오늘 어떤 작품을 선보일까? 무척 기대된다네.”
고기를 게걸스럽게 씹어 삼킨 윌리가 대답했다.
“이따 보면 알겠죠. 한국 방송은 예고편도 없나? 아니면 미리 보도 자료라도 뿌리던가. 하여간 마음에 안 드네요.”
뚱한 윌리의 말에 앤드류가 슬쩍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방송을 빨리 보고 싶다며 징징대던 그가 왜 이렇게 변한 거지?
“문화재단과 일정을 논의하면서 뭐 얻은 정보는 없고?”
음식을 먹던 윌리가 티슈로 입을 닦고 말했다.
“말도 마세요. 어찌나 깐깐하던지, 그런 걸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니까요.”
“고생이 많았구먼…….”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한참 동안 끊어졌다. 윌리는 그 많은 음식을 모두 해치웠고 앤드류는 긴장했는지 흑맥주 외에는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이제 곧 시작하겠군. 어서 준비하게.”
윌리가 가방에서 15인치 노트북을 꺼내 바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너튜브를 켜고 EBC 교육방송 채널에 접속하자, 아직 방송 전이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광고가 흘러나왔다.
앤드류와 윌리는 긴장된 마음으로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략 다섯 편의 광고가 끝나고 방송 화면이 바뀌었다.
드디어 오한결의 얼굴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