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남극의 피카소
똑. 똑. 똑.
“네, 들어오세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연구실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오한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돋보기를 끼고 자료를 보던 데이비드 오 교수가 안경을 벗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한결 작가, 어서 오세요.”
최근 국내외 언론을 상대하고 방송 준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오한결의 스케줄을 알던 데이비드 오 교수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바쁜 사람이 참나, 내가 찾아간다니까. 그래도 얼굴은 좋아 보이네요.”
“빠듯한 일정이긴 해도 힘든 일은 아니라서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을 빤히 바라봤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저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생각해 보니까 오한결은 처음부터 그랬다. 항상 자신감 넘쳤고 무슨 일이든 여유롭게 처리했다. 그리고 항상 완벽했다.
데이비드 오는 본인을 포함한 현역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을 되짚어 봤다.
‘참, 부럽긴 하네. 실력이 만든 여유로움이라니. 이걸 요즘 말로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고 하나?’
데이비드 오 교수가 최근 선물로 받은 건강 음료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오한결 작가 고생하는 것 같아서, 내가 식사 대접이라도 하고 싶어서 불렀어요. 그리고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기도 했고요.”
“감사함이요?”
오한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뚱한 표정을 짓자, 데이비드 오 교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뭐랄까, 예술계 선배로서 후배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죠. 한국 예술은 나를 포함해 몇몇 작가들이 해외에서 이름을 알렸지만 사실상 순수 예술 분야에선 불모지나 다름없었어요. 그걸 오한결 작가가 바꾼 거죠. 어찌 선배 된 도리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뭐든 해주고 싶어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한결 작가가 부담 갖는 건 싫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연락을 드렸고요. 먼저 우리는 친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며 교수의 말을 이해한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어차피 공동 작품도 같이 할 거고 며칠 후면 같이 뉴욕 일정도 소화할 텐데, 왜 이 시점에서 친목 도모를 이유로 밥을 먹자고 한 거지?
오한결이 데이비드 오 교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궁금하시군요?”
물건을 훔치다가 걸린 아이처럼 데이비드 오 교수가 화들짝 놀랐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세 번째 방송에 대해서요.”
“!!”
데이비드 오 교수가 민망한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오한결 작가는 가끔 사람을 너무 투명하게 바라봅니다. 꼭 알몸으로 앉아 있는 것 같아 민망하군요.”
순간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난 오한결이 건강 음료를 한 번에 들이켜고 말했다.
“제가 데이비드 오 교수님께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하는데요.”
“뭐든지! 말만 하세요.”
“세 번째 그림 방송에 출연하셔서 제 그림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정말입니까?!”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오한결도 기쁘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제가 그림을 그리면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는데요. 생각해 보니까 교수님 같이 저명한 작가이자 평론가가 옆에서 작품을 설명해주시면, 제 그림이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울 것 같아서요. 어떤가요?”
“물론입니다! 오한결 작가는 그림에만 집중해야죠.”
뜻밖의 수확을 거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진정하고자 건강 음료를 원샷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세 번째 그림에 대한 정보를 주시겠습니까?”
몹시 기대에 찬 표정의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지금 당장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그의 표정을 오한결이 흥미롭게 바라봤다.
자세를 고쳐 앉은 오한결이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이번엔 작곡을 해보려고요.”
수수께끼 같은 오한결의 대답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악을 말하는 건가요? 갑자기 그걸 왜?”
“유쾌하고 발랄한 음악을 시청자들에게 들려주면 어떨까 싶어요.”
“하지만 그림 방송 아닙니까? 제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게 맞나요?”
데이비드 오 교수는 오한결의 태연스러운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가? 하지만 저렇게 당당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한다고?
그게 아니라면, 오한결은 분명 어떤 암시와 상징으로 세 번째 작품을 자신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뭘까,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잖아!’
오한결이 눈을 감았는데도 바로 앞에 있는 데이비드 오 교수의 심적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건 호기심을 넘어 분노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항상 차분했던 데이비드 오 교수의 색다른 모습에 오한결이 흥미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림 속 어떤 추상적 형태가 음악을 닮을 수 있겠죠.”
“…….”
데이비드 오 교수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오한결이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답을 바로 알려줄 수는 없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가 먼저 정답을 말해야 한다.
오한결이 힌트를 하나 더 말했다.
“형태와 색채가 자유롭게 배열되면서 느껴지는 리듬감. 완벽한 추상에서 느껴지는 시각의 청각화. 어떤가요? 여전히 모르겠나요?”
“시각의 청각화?”
“점. 선. 면. 리듬. 선율. 화성. 그것들이 음악성을 띠는 작품.”
“!!”
“제가 이 모든 요소를 성공적으로 표현한다면 시청자들이 그림에서 음악을 느낄 수 있겠죠.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바실리 칸딘스키!”
기쁨도 잠시, 정답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 부끄러운 데이비드 오 교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칸딘스키는 말했죠. 회화도 음악과 같은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을 마친 데이비드 오 교수가 극심한 허탈감에 정신이 어찔했다. 누구보다 칸딘스키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왜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설마, 내가 오한결 작가 앞에서 긴장한 걸까?
데이비드 오 교수가 정답을 맞히자 오한결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교수님 말이 맞습니다.”
“작가님이 방송에서 칸딘스키 작품을 구현할 거고 그 작품을 내가 설명해주길 바라는 거군요. 세상에! 이런 영광이 있나요. 근데 그게 가능하다고요? 아니지, 지금까지 오한결 작가의 파격적이고 성공적인 행보를 보면 충분히 가능하겠군요. 세상에 믿어지지 않는군!”
데이비드 오 교수의 표정에서 기쁨과 두려움, 걱정과 흥분이 번갈아 나타났다.
그 모습을 재밌게 바라보던 오한결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 식사는 언제 하나요? 배가 너무 고파서요.”
시계를 확인한 데이비드 오 교수가 깜짝 놀랐다.
“이런!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났군요. 그래, 뭘 좋아하나요? 뭐든지 사주고 싶어요.”
오한결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궁전떡볶이 제일 매운맛이요.”
칸딘스키보다 더 충격적인 대답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다시 물었다.
“떡볶이? 자네 진심인가?”
“제가 매운 거 먹고 땀을 쫙 빼면 스트레스가 풀려서요. 교수님도 도전해 보시죠.”
“이런……. 고백할 게 있어요. 사실 내가 매운 걸 잘 먹는 맵부심이 좀 있어서.”
“후후. 두고 보면 알겠죠.”
잠시 뒤 데이비드 오 교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주문 완료했어요. 핵폭탄 매운맛으로.”
“!!”
* * *
긴장감이 감도는 EBC 회의실에서 국장이 세상을 다 얻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한결 작가가 정규 프로그램 출연 제안을 거절했어!”
김명호 피디와 김 작가가 환호성을 지르며 회의실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첫 방송 이후 뒤따르는 숱한 이슈 때문에 그들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었다.
평화로운 방송국 생활에 거대한 태풍을 몰고 온 오한결을 원망한 적도 많았다. 그저 평범하게 그림만 그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 그 고민도 끝났구나. 잘 가라 오한결!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갑자기 찾아온 적막감에 모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김명호 피디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근데 왜 이렇게 씁쓸할까요? 정말 좋아해야 하는 게 맞나?”
한참을 고민하던 김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가 오한결 작가님을 감당하지 못한 거죠. 그분의 작품은 정말 어마어마했잖아요. 어쩌면 우리가 지금 비겁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국장과 김명호 피디, 김 작가는 그간의 고생보단 그들이 기획하고 제작한 프로그램이 세상의 이목을 끌고 예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아,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오한결 작가에게 매달려서 정규 프로 출연 허락을 받는 게 맞지 않을까?
김명호 피디가 국장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자이언트 팡수TV 인기의 흐름을 끊은 것도 오한결 작가 그림이었어요. 사실상 오한결 작가만 있다면 우리 팀이 EBC 주인공이라고요! 이제 와서 뺏길 수 없어요.”
그간 자이언트 팡수TV 담당 피디의 건방진 모습이 생각난 국장이 얼굴을 붉혔다.
“안 되겠어! 우리가 오한결 작가를 다시 설득해 보자고!!”
하지만 섣불리 그 누구도 국장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국장 자신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길 바라는 눈치를 보내지 않았던가.
때마침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거대한 검은 형체가 불쑥 들어왔다.
“팡하!”
EBC 간판 스타. 팡수였다.
“뭡니까, 이거! 환영 안 해줍니까!”
김명호 피디는 거대한 펭귄 탈을 쓰고 나타나는 팡수를 넋 놓고 쳐다봤다. 설마, 회의실에 도청장치라도 있나? 팡수 얘기를 하니까, 진짜 팡수가 나타났네?
바로 이어서, 팡수 뒤로 수많은 카메라와 음흉한 미소를 짓는 최 피디의 모습이 보였다. 까마득한 후배 주제에 최근 팡수의 인기를 등에 업고 김명호 피디를 은근히 무시했던 놈이었다.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팡수를 데리고 온 거야!
팡수가 두리번거리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여기 대빵 누굽니까!”
국장이 손으로 김명호 피디를 은근히 가리켰다.
팡수가 김명호 피디에게 말했다.
“오한결 어딨습니까? 나의 라이벌 오한결 도망갔습니까?”
놀란 김명호 피디가 말을 하지 못하자, 팡수가 회의실 곳곳을 누비며 소리를 질렀다.
“오한결 나와! 내가 상대해 주지! 오한결!!”
그렇게 회의실 안을 누비며 정신을 쏙 빼놓은 팡수가 촬영을 마치고 사라지자, 기회를 엿보던 최 피디가 김명호 피디에게 은근슬쩍 다가왔다.
“선배! 놀랐죠? 팡수TV 새로운 아이템 찾다가 오한결 작가와 대결하면 어떨까 해서 왔어요. 근데 아쉽게도 오한결 작가는 없었네요.”
“야, 최 피디! 그럼 미리 말을 하고 왔어야지!”
“에이, 선배 감 떨어졌구나. 그럼 재미없죠. 팡수TV 컨셉이 기습 인터뷰인데요. 최근 오한결 작가로 시청률 재미 좀 본 걸로 아는데, 아주 잠깐이라 잘 모르시는구나.”
“야! 최 피디!”
“어이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김명증 사장님 만나러 가야 해서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찌나 사장님이 만나자고 보채는지 귀찮아 죽겠어요. 아, 그리고 혹시 안 바쁘면 저 좀 도와주세요. 워낙 인기 프로라 그런지 일손이 달리네.”
최 피디가 나가자, 김 작가가 슬쩍 다가와서 말했다.
“오한결 작가를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반드시!”
그러나 아무도 김 작가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