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국제도시
신태진 회장의 리무진이 인천 산도 국제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깔끔하게 정비된 도로 양옆으로 번쩍번쩍 오후 햇살을 반사하는 고층 건물이 줄지어 섰고 그 주변으로 초록빛의 공원이 도시의 차가움을 상쇄하고 있다.
아시아 최대 공원을 지나자 우주선 모양의 금속성 건물이 그 위용을 과시했다.
이윽고 리무진이 멈추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급히 달려와 차 뒷문을 열었다.
신태진 회장이 천천히 차에서 내려 직원에게 악수를 건넸다.
“박영운 실장, 오랜만일세.”
“회장님께서 직접 오시다니요, 영광입니다.”
“명일그룹의 대표 프로젝트인데, 어찌 회장인 내가 뒷짐 지고 있을 수 있겠나.”
양승호 비서가 부랴부랴 회장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날씨가 춥습니다. 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신태진 회장이 아직 공사 중인 건물 외형을 찬찬히 훑어봤다.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
드디어 명일그룹에서 이 건물을 세웠구나!
신태진 회장은 수많은 난관에 굴복하지 않고 명일그룹을 세계 선두 기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세계 경제는 항상 숱한 변수로 출렁였고 거기서 살아남았다고 한들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상에 선 명일그룹은 더 나아가야 했다. 혹자는 이미 최고의 위치에 있는 명일그룹은 새로운 경쟁자를 물리치고 자리를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라고 충고했지만, 신태진 회장은 그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아니, 그 자리에 머무르는 순간 그 자체로 기업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더 나아가야 한다. 과거에는 해외 선도기업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됐었지만 이제는 명일그룹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몇 년 전부터 신태진 회장은 명일그룹이 단순한 민간 사업체를 넘어 세계 경제와 문화 심지어 국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의 위치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였다.
때마침 인천 산도 국제도시의 탄생이 신태진 회장의 꿈에 날개를 달아줬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 즐비한 이곳은 마치 싱가포르처럼 하나의 도시 국가 역할을 하고 있다.
수많은 업무지구, 최첨단 교육시설, 항만까지 갖춘 이곳에 몇 년 전부터 다국적기업과 국제기구가 앞다퉈 입주하고 있다.
심지어 십 년 안으로 UN 본사가 이곳에 터를 잡을 수 있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은가?
명일그룹은 이런 황금 땅을 버리고 굳이 해외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한국 안에서도 국제기구와 다국적기업을 옆에 두고 사업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보호 장비를 갖춘 신태진 회장이 박영운 실장의 안내로 공사 중인 무역센터 건물로 들어갔다.
바닥 여기저기에 철근과 시멘트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얼마 전에 바른 듯한 짙은 회색 시멘트벽은 무척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한눈에 봐도 웅장한 로비를 보며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이곳은 향후 몇 년 안으로 수많은 국제기구가 입주할 것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각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제적 이슈, 온난화 등 기후 위기, 인공지능에 따른 의료 윤리, 첨단 우주 산업까지 바로 이 건물에서 논의될 거란 말입니다.”
자아도취에 빠진 회장이 혹시 바닥에 깔린 공사 자재에 걸려 넘어질까 봐 양승호 비서가 진땀을 흘리며 회장 주변을 맴돌았다.
“저기, 회장님 조심하셔야…….”
“어이구!”
양 비서의 말에 뒤를 돌아보던 회장이 작은 돌부리에 걸려 몸을 휘청거렸다.
양승호 비서와 박영운 실장이 재빨리 회장의 양팔을 잡았다. 양 비서가 놀란 토끼 눈으로 회장을 쳐다봤다.
“괜찮으세요? 구급차 부를까요? 아님, 헬기를 띄울까요?”
신태진 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양 비서 어깨를 툭툭 쳤다.
“오바 하지 말게나. 난 아무렇지도 않아.”
다치지 않은 회장을 보고 안심한 박영운 실장이 주섬주섬 가방을 뒤졌다. 이윽고 건물 내부 설계도와 조감도를 회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근데 회장님,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로비 내부 구조를 천천히 살피던 회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오한결 작가가 작품을 그릴 이곳을 자세히 살펴봐야 하지 않겠나? 사진 같은 자료로 보는 것과 이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분명 차이가 있네.”
로비의 웅장한 벽면을 바라보며 신태진 회장이 한껏 기대에 찬 미소를 지었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오한결이 이곳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그 환상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장면을 말이다.
오한결의 작품은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의 눈을 그려 넣자마자, 용이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일화처럼 오한결의 작품은 무역센터라는 용의 눈동자가 될 것이다.
반면, 박영운 실장은 회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박 실장의 모습을 눈치챈 회장이 양승호 비서를 쳐다봤다.
“아직 내용이 전달 안 된 건가?”
양승호 비서가 억울한 눈으로 말했다.
“직접 얘기하신다고 저보고 함구하라고 하셨는데…….”
“아, 그랬나? 나이를 먹으면 깜빡깜빡한다네.”
마지막으로 로비를 슬쩍 훑어본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감기 들겠어.”
무역센터 근처 빌딩 20층에 있는 유럽식 카페에 자리를 잡은 신태진 회장은 창밖으로 보이는 산도 국제도시의 이국적인 풍경을 넋 놓고 쳐다봤다.
“참 멋진 곳입니다. 안 그런가요?”
“맞습니다. 회장님.”
회장의 질문에 기계적으로 대답한 박영운 실장은 좀 전에 무역센터 로비에서 거론됐던 오한결의 이름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도 오한결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방송에 나와 유명세를 떨친 젊은 예술가 아닌가.
‘설마, 오한결 때문이었나?’
최근 로비 디자인 시안을 회장에게 보고했으나 그가 확정하지 않고 다른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의견을 보였다.
당연히 그 전문가란 해외 유명 공간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다. 근데 오늘 보니까,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사회 경험도 없는 아직 애송이인 오한결 작가를 회장이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회장이 말을 했다.
“오한결 작가에게 로비 디자인을 맡겨볼 생각이네.”
어찌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인가. 골이 띵해진 박영운 실장이 겨우 입을 열었다.
“회장님……. 오한결 작가의 실력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만. 제가 이 분야에서 30년의 경력이 있는 만큼, 제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사실상 실력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회장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펼치는 박영운 실장을 양승호 비서가 부럽게 쳐다봤다.
수십 년 전 명일그룹이 중견기업으로 이름을 날릴 무렵 신태진 회장이 유망한 한국대 건축학과 교수였던 박영운 실장을 영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회장의 숱한 노력 끝에 건축 학자의 길을 가던 박영운 교수는 산업계로 발을 디디게 됐다. 두 사람은 매일 머리를 맞대고 새롭고 창의적인 신도시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젊음을 다 바쳤었다.
사실상 명일그룹에 상당한 이익을 안겨준 건설 사업의 일등 공신이 박영운 실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회장이 오한결을 밀어붙여도 박영운 실장은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반대 의견을 펼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신태진 회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는 최근 세상이 주목한 천재 작가니까. 박 실장, 새로운 인재는 언제나 새로운 시대에 나타나는 법이야. 과거의 인물들은 그런 시대를 열기 힘들어.”
박영운 실장은 회장의 말에 일부 동의하지만 일부는 그럴 수 없었다.
“회장님, 건축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닙니다. 그건 인문학과 철학의 산물이어야 합니다. 특히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는 명일그룹의 미래 비전 아닙니까? 거기엔 지난 50년의 명일그룹의 철학이 녹아들어야 합니다. 단순히 예술적 기교를 잘 부린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박영운 실장의 말에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이 과거 수많은 능력자를 마다하고 굳이 한국대 박영운 건축학과 교수를 찾은 이유도 그가 학계에서 보여준 냉철하고 고집스러운 원칙 때문이었다.
그때는 신태진 회장이 박영운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회사의 철학을 건축에 녹아줄 그런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박영운 실장이 회장에게 비슷한 말을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물론 맞는 말이네. 하지만 오한결 작가가 명일그룹 철학을 작품에 반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는 충분히 능력이 있어.”
잠시 회장의 말을 곱씹던 박영운 실장이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아직 오한결 작가가 그런 실력을 갖췄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자네는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한결 그림 방송을 보지 못했는가?”
“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논쟁은 지금 불필요한 게 아닐까?”
“아니요. 그걸 봤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분명히 그는 순수 예술 분야에 상당한 소질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역센터 로비 디자인은 순수 예술 분야가 아닙니다. 제가 회장님께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절대로 물러서지 않던 박영운 실장의 질문이라 회장이 긴장한 채 말했다.
“얼마든지.”
“회장님께서 오한결 작가의 특출난 로비 디자인 능력을 보증한다면 분명 확실한 보증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가 오한결 작가를 오해하고 있는 거라면 빨리 생각을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팽팽한 긴장감에 양승호 비서가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회장의 신임을 받는 박영운 실장이라도 지금 본인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잊었는가? 바로 신태진 회장이다.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실장을 내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자기주장을 내세울 일인가?
그러는 사이 갑자기 회장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목이 말랐는지 신태진 회장이 따뜻한 물을 주문했다. 그가 천천히 목을 축인 후 말했다.
“나는 박영운 실장을 아주 신뢰합니다. 방금 무역센터의 성공을 바라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솔직히 아직은! 오한결 작가보다 박영운 실장이 제게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오랜 세월 함께한 가족 같은 동료이기도 하고요.”
이제 긴장이 풀렸는지 박영운 실장도 슬쩍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신태진 회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박영운 실장을 설득하려고 왔는데 제가 설득을 당했군요. 오한결 작가에게 미안하게 됐지만, 이제 그가 박 실장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겠어요.”
양승호 비서가 깜짝 놀랐다.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 오한결 작가는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런 오한결을 끝까지 설득해 로비 디자인을 맡긴 게 바로 신태진 회장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오한결 작가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로비 디자인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오한결이 납득할까?
오히려 역정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영운 실장과 미팅을 마친 신태진 회장이 리무진을 타고 인천을 빠져나오고 있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고속도로에 차들로 가득했고 리무진은 느릿느릿 조금씩 앞으로 나갈 뿐이었다.
그간 침묵한 채 창밖을 바라보던 신태진 회장이 옆자리에서 자료를 넘기며 일을 하던 양승호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박 실장 말대로, 오한결 작가가 실력이 없을 것 같나?”
뚫어지게 쳐다보던 서류를 무릎에 내려놓고 양 비서가 말했다.
“아…… 그게, 저는 오한결 작가를 믿습니다.”
“그래? 자네의 근거는?”
“제가 지금까지 본 결과, 그는 분명 뛰어난 학습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모르는 주제를 만났을 때도 순식간에 관련 지식을 터득해 전문가 수준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자주 봤거든요. 그건 예술적 재능과 별개로 지능이 꽤 뛰어나다는 증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당연히 건축에도 상당한 실력을 보일 게 분명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양승호 비서의 말에 감동한 신태진 회장이 ‘하지만’ 단어에 고개를 휙 돌려 양 비서의 얼굴을 쳐다봤다.
양 비서가 긴장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오한결 작가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면서까지 이번 프로젝트를 맡을지가 의문입니다. 아마도 거절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어느덧 막혔던 도로가 한산해져 리무진이 빠른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서울로 진입하자 창밖으로 고층 건물의 풍경이 나타났다. 신태진 회장은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오한결 작가를 설득하는 건 내 역할이 되겠지. 이제 나도 내 능력을 증명할 때가 된 거야.”
어느덧 창밖으로 빼어난 도시 야경이 아름답게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