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설산 풍경
제주도 출발 전날 밤.
아버지가 오한결에게 등산 용품을 챙겨주며 아주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익힌 등산 노하우를 아들에게 모두 쏟아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했다.
“한결아, 겨울 한라산은 장비 없으면 위험해. 지금쯤 눈이 많이 내린 설산일 텐데, 매우 미끄럽거든.”
아버지가 꼭 필요한 장비라며 하나씩 소개했다.
“이건 아이젠. 신발 바닥에 스파이크를 달아서 미끄럼 방지 역할을 해주지. 그리고 이건 스패츠. 이렇게 발목을 감싸는데, 신발 안으로 눈이 들어와 양말이 젖는 것을 막아주는 거야. 그리고 스틱. 뭐, 나는 없어도 되는데 한결이는 등산 초보니까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오한결은 처음 보는 등산 장비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는 이런 장비들은 언제 구매했던 걸까. 어머니도 아시나?
“장비 멋지네요. 역시 아버지께 여쭤보길 잘했네요. 등산 전문가시니까.”
오한결의 칭찬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가 그간 전국을 돌며 올랐던 명산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시작했다. 수십 번 들어 외우다시피 한 그 내용을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을 즈음, 문자가 하나 왔다.
「노진홍: 작가님! 한라산 등산모임 단톡 만들었는데요, 같이 오시는 분은 작가님이 초대해 주세요. 얼른 들어오세요!」
「오한결: 알았어. 조금 이따가. 미안.」
오한결이 인내심을 갖고 아버지의 전설 같은 등산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따로 일이 있다고 말한 뒤,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책상에 앉은 오한결이 달력을 보며 제주도 등반 일정을 확인했다.
등산은 이틀 뒤지만, 노진홍과 동생의 부탁으로 내일 아침 제주도에 도착해 관광을 한 뒤, 그다음 날 새벽에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최하늘은 내일 저녁에 도착한 뒤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 새벽에 오한결 일행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보니 최하늘은 노진홍, 오한수와 초면이겠구나.”
그럼 미리 단톡방에서 인사를 나누면 좋지, 아마도 그런 이유로 노진홍이 단톡방을 미리 개설했을 것이다. 워낙 꼼꼼하고 사려 깊은 아이니까.
휴대폰을 켜고 단톡방에 접속 후 최하늘을 초대했다.
「최하늘: 안녕하세요! 문화재단 직원 최하늘입니다.」
「오한수: 그때 발레 뮤지컬 때 오셨죠? 형 옆에 앉았던 누나죠? 반가워요.」
「최하늘: 어머! 작가님 동생이라 눈썰미가 굉장하네요. 그때 공연 잘 봤어요. 완전 멋졌음.」
「노진홍: 안녕하세요, 노진홍입니다. 공연에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최하늘: 네, 반가워요! 제가 진홍 씨 뮤지컬 보고 완전 팬 됐어요. 표현력, 연출 등 뭐하나 부족함 없이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문화재단 업무 중에 무용가 지원 사업도 있거든요. 나중에 제가 연락드릴 수도 있겠어요. 호호.」
「노진홍: 와! 그럼 엄청 좋겠다. 근데, 문화재단 거긴 프로만 지원하지 않나요? 그래도 생각만으로도 좋네요. 하하.」
「최하늘: 오해예요. 문화재단은 신인 예술가도 많이 지원해요. 호호.」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자, 오한결이 흐뭇하게 웃으며 채팅창을 바라봤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서로 할 말이 고갈됐는지 이모티콘만 남발하기 시작했다. 기회를 봤다가 오한결이 끼어들었다.
「오한결: 일정 정리할게요. 노진홍과 오한수는 내일 나랑 같이 제주도로 먼저 가고 하늘 씨는 모레 새벽에 한라산 관음사 주차장으로 오세요. 거기서 집결 후 이동하겠습니다.」
「노진홍: 탐방 예약은 필수라서요. 제가 미리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관음사 코스는 꽤 고난도예요. 지금 눈이 많이 내려 미끄럽다고 하니까. 모두 장비 꼭 챙겨 오시고요.」
「최하늘: 넵!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식은 제가 챙길게요.」
「오한수: 엄청 기대된다. 그럼 이틀 뒤에 봬요. 누나!」
* * *
몹시 어두운 제주도의 이른 새벽. 관음사 주차장에 도착한 오한결과 오한수, 노진홍은 짐을 바닥에 내리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최하늘을 기다렸다.
잠시 뒤, 최하늘이 배낭을 메고 부랴부랴 근처로 다가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와, 저도 일찍 나온 건데, 더 일찍 나오시다니. 모두 대단하세요.”
오한수가 오한결을 째려보며 대답했다.
“누가 잠이 없어서요. 아우, 졸려 죽겠네.”
노진홍이 다리를 일자로 찢으며 마저 스트레칭을 마쳤다.
“난 더 좋던데. 성공한 작가는 부지런하다는 교훈을 배웠지.”
이렇게 만나자마자 수다를 떠는 세 사람을 지켜보던 오한결이 초조해진 얼굴로 끼어들었다.
“벌써 30분이 지났어.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
모두 자신의 등산 장비와 간식, 물 등 필요한 준비물을 점검 후 등산로 입구로 다가갔다. 해뜨기 전 산속은 무척 어두워 마치 어둠 속 미지의 세계처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오한결이 랜턴을 켜며 말했다.
“자, 출발합시다.”
오한결이 선두로 최하늘, 오한수, 노진홍이 뒤따르며 산길을 걸었다. 막상 등산이 시작되자 모두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얕은 경사를 걷는 그들의 규칙적인 숨소리에는 낯선 곳에 대한 본능적 긴장과 두려움이 묻어났지만 앞으로 펼쳐진 설산에 대한 기대와 흥분 또한 커다랗게 내포하고 있었다.
랜턴에 비치는 산길은 시야가 몹시 좁았고 주변의 푸른 나무의 형체도 수상한 검은 그림자처럼 으스스해 보였다.
어느덧 검은 하늘 저편으로 새벽 푸른빛이 돌면서 날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충분히 시야가 확보되자, 오한결이 랜턴을 끄고 뒤를 돌아봤다.
“하늘 씨, 괜찮아요?”
지난번 등산 때 최하늘이 보여준 끈질긴 열정이 떠올랐다. 사실상 등산이 불가능한 체력이었는데, 그 누구에게도 신세 지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강원도 용화산 정상에 올랐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한결은 내심 최하늘이 걱정됐지만, 그녀는 의외로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작가님. 제가 만반의 준비를 했거든요.”
오한결이 고개를 갸웃하자, 최하늘이 자신 있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오늘을 위해서 체력 훈련을 엄청 했거든요. 부족한 근육을 늘리고 심폐 기능도 강화했죠. 사실 개인 강습까지 받은걸요. 호호.”
최하늘의 노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 오한결은 그 뒤로 따라오는 오한수와 노진홍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오한수가 소리를 질렀다.
“형! 우린 걱정하지 말아줘. 이 정도는 끄떡없음.”
노진홍도 맨 뒤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렸다.
“저도 괜찮습니다.”
등산 시작 후 두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아침 해가 뜨기 시작했다. 검푸른 하늘빛이 맑은 푸른색으로 변했다. 잠시 뒤 구름 한 점 없이 높은 하늘이 드러나자, 설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확연하게 보였다.
겨울 내내 내렸던 눈이 녹지 않고 두텁게 땅을 덮었고 그 위로 솟아오른 나무들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은 바람이 불 때마다 흰 모래를 뿌리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한결 일행은 묵묵히 겨울 산을 걷고 또 걸어 올라갔다.
비록 서로 침묵을 지켰지만 그들의 눈은 한라산의 겨울 풍경과 무한한 소통을 하고 있었다. 자연이 주는 경외감과 예술성에 몸서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탐라계곡 목교에 도착한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었다.
오한결이 고개를 들고 경사진 등산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급경사가 시작된대. 모두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말을 마친 오한결이 순간 최하늘의 얼굴에서 걱정이 스치는 것을 알아챘다.
“힘들면 말해요. 저희가 도와줄게요.”
최하늘은 자신을 걱정하는 오한결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만큼 지난번 최악의 체력으로 함께 등산했던 과거를 지우고 싶은 열망도 커졌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다.
노을, 최무열처럼 도전의 아이콘이 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아니에요. 반드시 혼자 힘으로 정상에 오르고 싶어요.”
오한수가 에너지바를 씹으며 말했다.
“와, 뭔가 되게 멋지시다. 누나, 제가 응원합니다. 화이팅!”
유연하게 스트레칭을 하던 노진홍이 말했다.
“누나, 제가 스트레칭 알려줄게요. 이거 하면 근육 긴장이 많이 풀리거든요.”
최하늘이 다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하자, 오한결이 마지못해 따라 했다. 예상했지만 노진홍이 선보인 건 절대로 간단한 스트레칭이 아니었다.
그는 다리를 180도로 벌리고 허리를 90도로 꺾는 기이한 동작을 선보였다. 당연히 그 누구도 비슷한 자세를 흉내도 내지 못했다. 끙끙 앓는 신음만 여기저기서 들려왔을 뿐이었다.
그들은 채비를 하고 다시 등산길에 올랐다.
근데 경사는 생각보다 훨씬 가팔랐다.
과호흡에 숨쉬기가 무척 힘들었고 다리 근육이 뻐근해 지면서 한 발짝 내딛는 것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몸에서 열이 과하게 나자, 모두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버렸다.
등산 내내 펼쳐지던 장엄한 설경에 익숙해질 무렵, 높은 고도에 이르자 산 중턱에 걸쳐 있는 구름층이 눈에 들어왔다.
비현실적인 구름과 산 풍경을 모두가 넋을 놓고 쳐다봤다.
‘이런 맛에 등산하는 거겠지.’
그간의 고단함이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최하늘이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말했다.
“제가 체력이 안 돼서 등산이 힘든데, 산에 올 때마다 기분 좋은 건 왜일까요. 호호.”
“누나, 그건 등산이 체질에 맞아서 그래요.”
“어머! 뭔가 감동적이네.”
“하하. 제 말이 맞아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지만, 얼굴에는 평온함이 가득한 노진홍이 대답했다. 평소 고강도 무용 연습으로 단련된 노진홍에겐 지금 등산은 체력적으로 부담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꿋꿋하게 멈추지 않고 올라간 끝에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다.
중간에 간식을 먹긴 했지만, 체력 소모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한결 일행은 대피소에 자리를 잡고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오한수가 나무젓가락을 들고 군침을 삼켰다.
“현기증 난다. 빨리 기력 보충을 해야 해.”
체력이 방전된 최하늘이 힘없이 벽에 기댄 채 말했다.
“저는 뜨끈한 국물을 먹어야겠어요.”
오한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으신 거죠? 힘드시면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지나친 걱정은 눈치 없는 행동과 다르지 않으리라. 최하늘은 처음으로 오한결에게 답답함을 느끼며 다시금 불굴의 의지로 자신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앉으며 말했다.
“거의 다 왔잖아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오한수가 나무젓가락을 질겅질겅 씹으며 피식 웃었다.
“한결이 형 이제 보니 눈치 완전 제로네. 그나저나 누나 정말 대단하시다. 역시 문화재단 직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지만 두 사람의 생각과 다르게 오한결은 최하늘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말로 하는 걱정보단 묵묵히 그녀의 성공을 응원해주는 방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라면과 김밥, 그리고 초콜릿까지 잔뜩 섭취하고 정상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간 정상으로 가는 길은 이미 빙판이 되어 엄청 미끄러웠다. 다행히 길옆에 설치된 밧줄을 잡고 천천히 올라갈 수 있었다.
드디어 오한결 일행이 정상에 도착했다.
그곳에 서니 제주도가 한눈에 들어왔고 발아래 설경은 애니메이션 배경처럼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두꺼운 운무가 산 정상을 감싸고 있었는데, 신선이 있다면 이런 곳에 살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곳의 주인공은 백록담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화산 분화구답게 웅장하고 거대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겨우내 내린 눈이 오목하게 파인 백록담을 가득 덮는 풍경이 절경처럼 느껴졌다.
지칠 대로 지친 오한결 일행은 말없이 한동안 백록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추위를 느낀 오한결 일행은 다시 점퍼를 입고 서로를 바라봤다. 오한결이 말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백록담을 실물로 보다니. 가슴이 벅찬데.”
“아! 잠시만요.”
배낭을 열고 주섬주섬 안을 살피던 노진홍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오늘을 기념하려고 사진기를 가져왔어요. 전문가용으로. 하하.”
노진홍이 주변을 서성이던 남자에게 다가가 단체 사진을 부탁했다. 오한결 주변으로 모여든 일행들이 V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자, 남자가 백록담이 배경으로 나오게끔 위치를 조정한 후 멋진 사진을 찍어주었다.
찰칵!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노진홍이 오한결에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백록담 멋지게 찍어주세요. 작가님이라면 분명 작품이 나올 거 같거든요.”
“……난 사진 전공이 아닌데.”
억지로 오한결 손에 카메라를 쥐여 준 노진홍이 씨익 웃었다.
“확신이 왔어요. 분명 잘 찍으실 겁니다.”
오한결이 체념한 듯 카메라 렌즈를 무심히 백록담으로 돌렸다. 그리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사진을 찍었다.
찰칵!
카메라를 재빨리 낚아챈 노진홍이 두근대는 마음으로 액정을 확인했다.
“대박! 이건 작품이잖아!”
그것도 잠시, 오한결이 노진홍의 손에서 카메라를 다시 낚아챈 뒤 최하늘을 향해 말했다.
“하늘 씨, 백록담 배경으로 독사진 찍어드릴게요.”
“어머!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제 보니까, 오늘 주인공은 하늘 씨였네요. 한라산 정복 축하합니다. 아주 완벽한 등산이었어요.”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는 최하늘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승자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등산 별 거 아니네. 다음엔 백두산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