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교환의 법칙
이상민 장관의 저녁 식사 초청을 받은 오한결은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유명 한정식 집으로 향했다.
급경사를 오르고 올라 식당 앞에 도착한 오한결은 한옥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쳐다봤다. 앞서 식당 정보를 찾아보니, 이곳은 국내외 귀빈들이 애용하는 고급 식당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식사 장소가 마음에 든 오한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 문을 통과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서자, 이상민 장관이 미리 와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긴장한 듯한 그가 오한결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작가님 오셨군요! 이쪽으로 오세요.”
오한결이 장관 앞자리에 앉았다. 근데 분위기가 상당히 묵직한 이유는 뭘까? 오늘따라 유난히 긴장한 이상민 장관의 얼굴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분명, 부담스러운 부탁을 하려는 모양이군.’
이상민 장관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주문을 먼저 했습니다. 이곳은 해외 문화 인사들이 한국에 방문할 때 종종 데리고 왔던 곳이에요. 모든 음식이 다 맛있지만, 특히 오한결 작가님이 좋아할 만한 메뉴를 선택해 봤습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이상민 장관은 EBC 방송에 대한 찬양을 일장 연설로 늘어놓았다. 첫 번째 그림 논란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기쁘지만, 두 번째 그림이 화제성이 뛰어나 모델인 자신이 얼마나 뿌듯한지 과도한 몸짓으로 설명했다.
“오한결 작가님이 저의 어두운 마음을 꿰뚫어 보셔서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위대한 작품의 일부가 됐다는 생각을 하자,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오한결은 확실히 지금의 장관이 방송 당시 때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그림을 그릴 때 오한결이 본 건 이상민 장관의 거대한 불안이었다. 오한결은 마치 열감지기처럼 대상이 가진 감정의 파장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때 유난히 이상민 장관의 파장이 불안정하고 거대하게 느껴졌었다.
오한결은 그런 장관의 감정을 그리는 행위 자체는 장관을 대중 앞에서 벌거벗기는 위험성을 안고 있지만, 그의 위독한 마음 상태를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효과적이고 어쩌면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결국, 오한결의 판단이 옳았다.
두 번째 작품이 국내외 평론가들의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고, 모델이었던 장관의 존재까지 주목받자, 그를 둘러싼 불안의 파장이 이제는 깨끗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상민 장관은 대중의 관심이 필요했고 그 관심은 언제나 호감이어야 한다는 그 욕구를 충족한 것이다.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낸 그림에 장관이 애정을 갖는 건 당연해 보였다.
“장관님이 몹시 평온해 보여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오한결의 말에 여유를 찾은 이상민 장관이 둘밖에 없는데도 혹시 누가 엿들을까 봐 몸을 앞으로 숙이고 속삭였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드르륵.
때마침 문을 연 종업원이 음식을 들고 룸 안으로 들어왔다.
멋쩍은 표정을 짓던 이상민 장관이 체념하듯 음식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한결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확실히 장관이 어떤 부탁을 하려 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이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음식 앞에서는 다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가볍게 샐러드로 입맛을 돋운 오한결이 잘 익은 관자구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음, 맛있네요. 음식이 깔끔해요. 간도 세지 않고요.”
“역시 음식을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그건 들깨소스 관자구입니다. 관자를 올리브유에 볶은 후 고소한 들깨소스를 곁들인 거죠. 저도 이곳에 올 때마다 첫 음식으로 관자구이를 먹습니다. 어쩜 이렇게 우리 둘은 취향이 비슷할까요?”
“아, 네…….”
그 이후로 장관은 오한결의 젓가락이 닿는 모든 음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조리 방법을 설명하고, 몇몇은 역사적 배경까지 지식을 엄청나게 쏟아냈다.
하지만 일단 음식에 집중하던 오한결은 그 지겨운 설명이 잘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는 식사를 마친 오한결이 후식으로 과일을 먹을 때쯤에야 장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네? 제가 아는 음식 설명은 다 했는데요.”
“아니요. 오늘 저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잖아요.”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이상민 장관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너무 티가 나는데요…….”
“정말요?!”
“……네.”
“……음, 그럼 어쩔 수 없이 말씀드려야겠네요. 오한결 작가님께서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죠. 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핵심만 말해 주세요.”
마른침을 여러 번 꿀꺽 삼킨 이상민 장관이 대답했다.
“두 번째 그림을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적정한 가격을 책정해서 제안해 주시면 최대한 수용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상민 장관이 오한결의 표정에서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오늘 이곳에 오기 전에 문한국 보좌관과 오한결의 반응에 대한 수많은 대처 방법을 고심했었다.
설득하기, 윽박지르기, 은근히 협박하기.
빌기, 매달리기, 비굴하게 굴기, 눈물 흘리기 등등.
물론 이 모든 대처법은 문한국 보좌관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오한결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네, 드릴게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
“다만, 조건이 있어요!”
오한결이 이상민 장관을 곁에 두는 이유는 명확했다. 추후 삼각지 화랑거리 부흥을 위해 그가 가진 권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교환의 법칙은 간단하다. 그가 간절히 원하는 걸 내주는 대신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걸 얻으면 그만이다.
‘조건’이라는 말에 장관이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오한결이 나직이 말했다.
“삼각지 화랑거리를 바꾸고 싶습니다.”
“아하! 조각품을 하나 더 설치하고 싶으신 거군요. 하긴 지난번 작품 하나만 놓기엔 너무 허전하긴 하죠. 정확히 어떤 규모의 조각품을 원하나요?”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번째 작품을 요청하면서 고작 조각품과 바꿀 생각을 하다니. 이거 생각이 너무 순수한 거 아닌가?
“화랑거리 전체를 리모델링하고 싶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 거리가 되려면 그에 맞는 멋진 모습을 갖춰야겠죠. 무척 세련되고 감각적인 건물과 깨끗하고 개성 넘치는 거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나중에 화랑거리는 동양의 예술의 성지이자 동서양문화를 잇는 허브가 될 겁니다. 어떤가요? 무척 흥미로운 상상 아닌가요?”
이상민 장관은 오한결의 설명을 들으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솔직히 그가 미쳤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문체부 장관에게 도시 리모델링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는가? 선을 넘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바보 같은 요청이었다.
그래도 장관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작가님이 삼각지 화랑거리에 애정이 많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물론 말씀하신 대로 된다면야 저도 좋지요. 하지만 현실성이 없어요. 예술만 하셔서 실제 도시행정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그건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으로 국토부와 서울시가 긴밀히 협의해도 사실상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는 이상 추진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서울시가 그걸 하겠습니까?”
“하게끔 만들어야죠.”
“어허! 답답하네요. 누가요?”
“장관님이요.”
“!! ……그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제 소관 밖입니다.”
오한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장관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한승엽 서울시장을 만나서 리모델링 건에 대해 논의해 주세요.”
“참 답답하시네. 그 엄청난 예산은 어떻게 합니까, 작가님! 그렇게 밀어붙일 사안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아니 세계적인 기업인 명일그룹 후원을 받으면 어떨까요?”
“……그분이 하시겠어요? 그리고 저도 내키지 않습니다.”
“그래요? 아쉽군요. 장관님.”
하지만 말과 다르게 오한결의 얼굴에는 기대와 흥분이 가득했다. 대화 내내 장관을 관찰한 오한결은 그의 마음속에 두 번째 그림에 대한 욕망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던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처한 요구에 대한 반발심에 더욱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한결은 미리 나름의 방법을 마련했다. 그게 효과가 있으면 좋으련만.
“장관님. 오늘 집에 가면 두 번째 ‘절규’ 그림이 도착해 있을 겁니다.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세요. 나중에 장관님 소유가 될 테니까요.”
“!!”
“하지만, 소유하시려면 제가 원하는 조건을 충족해야겠죠.”
이상민 장관은 당장 집으로 달려가 작품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실물을 바라보고 손끝으로 그 질감을 느끼고 싶은 어마어마한 충동이었다. 그 위대한 작품이 자신만의 은밀한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박찬 감동을 느꼈다.
“이해가 안 갑니다. 신태진 회장은 오한결 작가가 직접 요청하면 기꺼이 후원할 거 같은데, 왜 저보고 부탁하라는 건가요?”
오한결은 단순명료하게 대답했다.
“제가 하면 너무 재미없잖아요.”
* * *
오한결이 문화재단 회의실에서 조만간 떠날 뉴욕 출장 일정을 듣고 있었다.
지난 프랑스 출장은 공모전 후속 행사라 문화재단이 모든 일정을 직접 관리했는데, 이번 뉴욕 출장은 데이비드 오 교수 일정에 오한결이 합류하는 거라 절차가 복잡했다. 무엇보다 문화재단의 입지가 좁아져 좀처럼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나영 팀장이 손에든 볼펜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체류 비용 대부분은 우리가 처리하는데 일정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어떻게 해?”
탐탁지 않은 표정의 최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도 엄연히 뉴욕 지부가 있잖아요. 현지 가이드도 얼마든지 우리가 준비할 수 있고요. 그리고 솔직히 저쪽 일 처리가 너무 늦어요…….”
이나영 팀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하늘 씨랑 내가 워낙 일을 잘해서 그런 거지.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 일이 답답해 보이는 거야.”
“어머! 그럴 수도 있겠네요. 호호호.”
“맞아. 호호호.”
조용히 얘기를 듣던 오한결이 말을 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휴대폰이 울렸다. 회의실 밖으로 자리를 뜨려는 오한결에게 이나영 팀장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서 받아요. 우리도 그렇게 해요.”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진홍의 전화를 받았다.
“진홍이구나. 오랜만이네.”
[작가님, 지금 통화 가능하신 거죠? 혹시 바쁘시면 이따가…….]
“잠깐 통화 가능해. 긴 얘기면 내가 잠시 자리 좀 옮기고.”
[아, 그럼 짧게 말할게요. 작가님, 우리 한라산가요!]
놀란 오한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지난번 아버지와의 산행 이후로 등산에 트라우마가 생긴 걸까?
“뭐? 갑자기……?”
[요즘 공연 끝나고 리프레시 중인데, 자꾸 작가님이 예전에 그렸던 ‘산’ 그림이 떠오르는 거예요. 직접 등반 후 그렸다면서요. 이번엔 저랑 한수랑 같이 등산 가기로 했거든요. 솔직히 단합대회 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같이 가시죠. 작가님!]
수화기 너머로 동생 오한수가 같이 가자고 냅다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지금 같이 있는 것 같았다.
한겨울 산행이라.
지금 한라산은 완전히 설산이겠구나.
잠시 고민하던 오한결은 노진홍의 부탁이기도 하고 한수도 좋아한다니, 굳이 거절할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일정이 정해지면 알려줘. 내가 맞출게.”
[우와! 고마워요! 그럼 다시 전화 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오한결을 슬쩍 바라보며 이나영 팀장이 호기심을 보였다.
“등산가시나 봐요?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바로 옆이라 잘 들려서 그만. 호호. 한라산 가신다고요?”
오한결이 살짝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네. 그렇게 됐네요. 저 때문에 회의 방해 됐죠. 어서 마저 진행하시죠.”
“저기요. 작가님!”
갑자기 최하늘이 오한결을 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이나영 팀장이 깜짝 놀랐다.
“하늘 씨, 등산 싫어하잖아! 지난번에 강원도 갔을 때도 장난 아니었다며.”
“저 싫어하지 않아요. 힘들어할 뿐이지. 그리고 한라산은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었어요.”
이나영 팀장이 눈을 흘기며 속삭였다.
“오한결 작가님하고 같이 가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지?”
“팀장님!! 전 산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는 거라고요!”
“그래? 음, 믿어 줄게. 호호.”
“…….”
최하늘이 오한결에게 다시 말했다.
“절대 민폐 안 끼칠게요. 약속드려요.”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했다.
“민폐 끼쳐도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리면 되죠. 같이 가시죠. 한라산!”
그 말에 최하늘보다 이나영 팀장이 먼저 소리쳤다.
“끼약! 너무 기대된다. 하늘 씨도 그렇지?”
갑작스런 이나영 팀장의 호들갑에 최하늘이 설레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오한결을 쳐다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