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화이트 크리스마스
띠링. 띠링.
어두운 방 안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 알람에 홍미숙이 눈을 떴다. 그녀는 피곤한 몸을 겨우 일으키고는 재빨리 알람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잠을 날린 홍미숙이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전날 밤 준비한 케이크 재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냉장고에서 추가 재료를 꺼낸 뒤, 간단한 세수를 하고 다시 부엌을 찾았다.
홍미숙은 오늘 저녁에 있을 크리스마스 파티를 생각하자,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파티란 조용히 지내거나 몇몇 지인과 식사를 하는 그런 날이었다. 그저 연말 전에 맞이하는 휴식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올해는 분명 다를 것이다.
오한결과 그의 친구들이 홍미숙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그 친구들을 생각하게 됐고, 이제는 뭐든지 함께 나누고 싶었다.
고민 끝에 홍미숙은 그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직접 만든 케이크와 쿠키 그리고 각종 맛있는 음식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며칠 전 홍미숙이 용기 내 파티 계획을 말하자, 모두 뛸 듯이 기뻐해 줬다. 홍미숙은 그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어떤 케이크를 준비할까 고민하다가 때마침 시골에서 보내준 맛있는 고구마가 눈에 띄어 망설임 없이 ‘고구마케이크’로 결정했다. 특별한 날에는 일반적인 생크림케이크 보다 이색적인 케이크를 준비해야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낌없이 고구마를 삶던 홍미숙은 파티에서 케이크로 즐거워할 손님들을 생각하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모두 배부르게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 넉넉하게 세 개의 케이크를 준비했다.
* * *
해가 저물자, 삼각지 화랑거리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에서 주황 불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어두컴컴했던 거리가 포근한 빛에 물들자 조금은 외롭지만 낭만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크리스마스 저녁이라 손님이 뜸한 화랑거리에 오한결과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매서운 추위에 몸을 움츠린 채 걷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트화랑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오한결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검은 하늘에 반짝이는 하얀 점들로 가득했다. 곧이어 천천히 지상에 내린 눈들이 녹지 않고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벌써 눈이 바닥에 많이 쌓였어.”
오한결이 허리를 숙여 눈을 한 움큼 쥐고 있는데,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퍽!
“으악!! 뭐야!!”
그 사이 노을과 서정익 작가가 뭉친 눈을 던져 최무열의 뒤통수를 정확히 맞췄다.
“가만 안 둘 거야!!”
바로 응수해보겠다고 최무열이 눈뭉치를 던져봤지만, 이미 노을과 서정익 작가는 재빨리 아트화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한결이 허무한 표정을 짓던 최무열을 보고 웃자, 최무열 본인도 민망한지 씨익 웃으며 말았다.
“우리도 빨리 들어가죠, 너무 추워요.”
아트화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온갖 달콤하고 향긋한 음식 냄새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정성스럽게 만든 케이크와 피자, 치킨 등 누가 봐도 홍미숙이 직접 만든 수제 음식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창가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형형색색의 커다란 전구가 반짝였고 근처에 세워진 스피커에서 익숙한 캐롤이 흘러나왔다. 한눈에 봐도 영화에서 보던 따뜻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창밖으로 보이는 고요한 밤 풍경에 하얀 눈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모두가 바라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인 것이다.
잠시 뒤, 흰 눈을 머리 위에 잔뜩 이고 최하늘이 아트화랑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파티장으로 바뀐 화랑 내부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홍철수 사장이 탕비실에서 쇼핑백을 가지고 나왔다.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모두 좋아해 주면 좋겠네.”
노을이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자,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껌뻑거렸다.
“사장님!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너무 감동인데요!”
최무열도 부랴부랴 선물 상자를 열고 그 안에서 유화 물감을 집어 들었다.
“이건!! 전문가용 독일산 S 유화 물감이잖아요!! 으악! 너무 좋아!”
서정익 작가도 차분하게 내용물을 확인했다. 사실 이미 유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서정익 작가는 모든 작업에 최고가의 물감을 쓰고 있어서, 지금 선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게다가 살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처음 받아 보는 거라 서정익 작가는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라 로봇처럼 버벅거렸다.
순간 서정익 작가와 오한결의 눈이 마주쳤다. 오한결의 눈은 자연스럽게 감사함을 표시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십분 이해한 서정익 작가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정말 잘 쓸게요.”
하지만 서정익 작가는 이 물감을 절대 쓰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아마 평생 작업실에 모셔 두고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는 소중한 추억 물건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홍미숙이 따로 준비한 붉은색 목도리를 최하늘의 목에 걸어줬다.
“이건 내가 직접 짠 거예요. 어머! 하늘 씨는 붉은색이 잘 어울린다.”
조금은 까칠하지만 폭신폭신한 목도리를 손으로 만지며 최하늘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선물 너무 고마워요. 언니.”
마지막으로 오한결도 선물을 받았다. 그가 작은 상자를 열어 보니, 여러 장의 편지가 차분히 쌓여 있었다. 그때 홍철수 사장이 살짝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무슨 선물이 좋을지 엄청 고민했는데, 오한결 작가에겐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게 최고의 선물일 것 같았어. 그래서 화랑거리 사장들하고 마음을 글로 표현해봤어.”
편지를 펼쳐본 오한결은 한눈에 봐도 그들의 진심이 담긴 텍스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동안 오한결이 화랑거리를 위해 했던 모든 예술 활동에 대한 진심 어린 찬사와 감사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 오한결을 바라보며 최무열이 중얼거렸다.
“헐, 편지라니……. 물감이라도 주시지.”
“오한결 작가님은 이미 충분히 가졌죠. 그래서 그 어떤 선물보단 진심이 담은 편지가 더 나을 거예요.”
최무열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서정익 작가가 불쑥 대답하자, 놀란 최무열이 소리를 질렀다.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말해요!”
그렇게 선물을 주고받은 화랑 식구들은 한참을 떠들다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홍철수 사장이 손님들에게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오늘은 분위기를 위해 맥주 대신 와인입니다. 하하.”
노을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홍철수 사장님은 수제 맥주 전문이잖아요? 그리워요. 맥주가.”
홍철수 사장이 잠시 갈등하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맥주 가져올까?”
“네!!”
모두 입안 가득 음식을 씹으며 그동안 한국 언론이 보인 오한결에 대한 부정적 반응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진지하면서도 무척 화목한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않은 서정익 작가는 살짝 어색해하며 평소보다 더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때 아트화랑 문이 열리고, 바깥 찬바람과 함께 거의 설인의 모습으로 눈을 잔뜩 묻힌 덩치 큰 남자가 들어왔다. 모두 떠들던 수다를 멈추고 놀란 눈으로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런 내가 늦었지? 차를 놓고 걸어왔더니 오래 걸렸네.”
화신벽화 김일중 사장이 겉옷을 벗고 털어대자, 눈 덩어리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으악! 뭐하는 거예요!”
일제히 사람들이 짜증을 내자 김일중 사장이 멋쩍은 미소로 대답했다.
“아, 그게. 왜 그리로 튈까. 하하하.”
홍철수 사장이 말했다.
“자네도 어서 오게. 음식 식기 전에 먹어야지.”
김일중 사장이 재빨리 테이블 자리를 스캔한 후, 은근슬쩍 오한결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작가님,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 은인 옆에 앉으면 영광일 거 같은데. 하하.”
모두 폭소를 터트리자, 김일중 사장이 붉어진 얼굴로 오한결 옆에 앉았다.
김일중은 오한결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덕분에 벽화사업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매출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오한결과 함께 일한 건 딱 한 번뿐이었지만 그건 김일중 사장의 인생을 변화시키기 충분했다. 다행히도 오한결이 벽화 알바를 그만두자마자, 실력 좋은 아티스트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연락을 줬다.
그는 지금까지 만족스러운 벽화를 그렸고 화신벽화는 계속 승승장구하게 됐다. 물론 그가 아무리 잘해도 오한결과 절대로 비교할 실력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모든 시작은 오한결이었고 그 점에서 인생의 은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 마음을 온전히 느낀 오한결은 기분 좋게 김일중 사장을 반겼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후, 홍미숙이 디저트로 케이크 한 접시씩 나눠줬다.
부드러운 고구마 크림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모두 자신도 모르게 ‘음!’하고 소리를 냈다.
“언니 솜씨는 내가 인정!”
노을이 허겁지겁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홍미숙이 부끄러운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이렇게 맛있게 먹는 모습이 좋아서 음식을 만드는 것 같아. 뭐랄까. 오히려 내가 더 대접받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내가 더 고마워.”
김일중 사장이 산적같이 케이크를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미숙아, 이거 더 없니? 내가 고구마 마니아인 걸 어떻게 알고. 우하하.”
노을이 김일중 사장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사장님! 설마 그거 혼자 다 드셨어요?”
“케이크가 세 개나 있잖아. 그럼 실컷 먹으라는 얘기 아냐?”
“아무리 그래도…….”
왁자지껄 떠들며 후식까지 다 먹자, 모두 따뜻한 머그컵을 손에 들고 창밖을 바라봤다. 수선스러운 식사 후 찾아오는 정적에 그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오한결이 고요함을 깨고 말했다.
“제가 모두에게 선물하나 할게요. 홍철수 사장님! 예전에 <홍철수, 홍미숙> 그림을 그렸던 스케치북 갖고 계신가요?”
오한결의 말에 홍철수 사장이 깜짝 놀랐다. 올해 초 오한결이 빛의 화가 ‘렘브란트’ 화풍으로 자신과 동생을 그려줬던 그림 아닌가!
‘그걸 왜 다시 찾는 거지? 설마, 가져가려는 걸까? 그럼 안 되는데, 그건 집안 대대로 물려줘야 할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론 갖고 있지. 왜…… 그러지?”
홍철수 사장이 오한결의 눈치를 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자 오한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모인 분들을 그 스케치북에 그리고 싶어서요.”
오한결의 의중을 파악한 홍철수 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재빨리 사무실에 간 사이, 노을과 친구들은 오한결 작품의 모델이 됐다는 사실만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홍철수 사장에게서 스케치북을 건네받은 오한결이 그것을 펼치자 예전에 그렸던 <홍철수, 홍미숙>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홍철수 사장 남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줬던 초상화였는데, 이게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오한결이 크리스마스트리 근처로 다가가 바닥에 주저앉고 말했다.
“홍철수 사장님이 가운데 서시고, 그 주위로 다들 모여주세요.”
구도를 잡은 오한결이 그림을 그리려는데, 갑자기 서정익 작가가 소리를 질렀다.
“제가 그려볼게요!”
모두 놀라 서정익 작가를 쳐다보자, 그가 용기 내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제가 여러분께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제가 그려드려도 될까요?”
평소 서정익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고 그의 실력을 신뢰하던 최하늘이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정말 멋진 선물이 될 거에요. 서정익 작가님의 그림이라면 최고죠!”
모두 동의를 하자, 오한결이 서정익 작가에게 스케치북과 연필을 넘기고 짧은 응원의 말을 건넸다.
서정익 작가가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는 사이, 모두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대략 한 시간 뒤, 서정익 작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스케치북을 갖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모두 한껏 기대를 품고 그림을 보는 순간, 모두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묵직한 정적이 계속 흘렀다.
그림이 굉장히 독특했다.
서정익 작가 특유의 그림체로 지렁이가 기어가듯 인물의 형태가 그려졌다. 그리고 또 서정익 작가의 특징이 드러났는데, 눈, 코, 입이 인물마다 그 모양이 왜곡 또는 과장돼서 그려져 있었다.
한 마디로 엄청 징그럽고 이상해 보였다.
그림의 작품성을 간파한 오한결과 최하늘은 무척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건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하지만 자신의 얼굴이 예술의 소재가 됐을 땐 마냥 즐거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멋지네요…….”
정적을 깨고 김일중 사장이 서정익 작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