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유일한 적대자
김보름 교수가 아뜰리에 작업실 문을 열자, 오한결이 친절한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교수님.”
김보름 교수의 당당한 걸음에 맞춰 구둣발 소리가 작업실 바닥을 울렸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특유의 관찰력으로 오한결 작업실을 훑었다.
작가로서 김보름 교수가 내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바로 이면을 보는 뛰어난 관찰력이었다. 김보름 교수는 이곳에서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한 예술가의 작업실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치열한 작업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벽면에 걸린 몇몇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술적 아우라는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도 상대적인 박탈감이 짙게 느끼게 했다.
작업실은 작가의 정체성이다.
지난밤, 김보름 교수는 밤새 고민 끝에 오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간 그녀를 궁금하게 만든 것, 애써 외면했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의 예술적 재능’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내가 불편한 건 아니죠? 오한결 작가?”
“그럴 리가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오한결은 여유롭게 한국 예술계의 거장을 자신의 작업실로 받아들였다. 어젯밤 김보름 교수의 전화를 받은 오한결은 한 번쯤 그녀가 자신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놀라지 않았다.
한 번도 두 사람은 마주친 적이 없었으나, 지난번 ‘99분 토론’에서 김보름 교수가 오한결을 거론할 때 보였던 그 눈빛은 분명한 질투였다. 어쩌면 끊임없이 창작해온 작가로서 오한결의 능력을 향한 놀라움과 존경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오한결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예술계 거장.
오한결은 그런 김보름 교수의 속마음이 몹시 궁금하던 차였다.
벽면에 걸린 몇몇 작품과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작업실을 확인한 김보름 교수가 손님용 소파에 차분히 앉고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명성에 비해 작업량이 많지 않은가 보군요.”
오한결이 그녀에게 차를 건넨 후 맞은편 자리에 앉고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필요한 만큼만 작업하니까요.”
“습작은 없나요?”
“아주 오래전에 많이 했죠.”
김보름 교수가 눈을 지그시 감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한결의 당당한 모습이 눈에 거슬렸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 그런 걸까? 그의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 때문일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글쎄요. 아마도 제가 교수님을 만나고 싶은 이유와 같지 않을까요?”
오한결은 김보름 교수의 <붉은 우산>을 방송을 통해 봤을 때, 서로가 비슷한 예술적 목표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회적 금기를 깨고 자신만의 표현법으로 한국 예술계의 한 획을 그은 김보름 교수는 오한결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김보름 교수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문화재단 공모전 심사위원이었을 때, 내가 오한결 작가 작품 당선을 반대했었죠.”
오한결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랬군요. 왜죠?”
잠시 뜸을 들인 김보름 교수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너무 훌륭했으니까. 질투라고 해두죠.”
“솔직하시네요.”
“칭찬으로 듣죠.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가 왜 그렇게 비겁했을까. 분명 당선이 되어야 하는 작품인 걸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했죠. 제게 오한결 작가는 유해한 존재인 건 확실해요.”
유해한 존재라는 말에 오한결이 잠시 당황하더니 웃어버렸다.
“하하하. 제 존재가 교수님께 민폐군요.”
오한결이 보이는 여유에 김보름 교수의 긴장이 풀렸다.
“미안해요. 제가 성격이 모났어요. 사실 누군가를 칭찬해 본 적이 없거든요. 아마도 너무 이른 성공과 그에 따른 사회적 지위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닌가 싶고요. 좋습니다. 이번엔 용기 내서 말하죠. 오한결 작가는 대한민국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멋지고 훌륭한 예술가 후배고요.”
생각지도 못한 김보름 교수의 말에 오한결이 놀라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상당한 용기를 내신 거네요.”
“물론이죠. 내가 왜 이런 용기를 냈는지 아세요?”
“글쎄요.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거로 봐선 분명한 목표가 있으실 거로 예상했습니다.”
김보름 교수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 작품 하나 같이 합시다.”
김보름 교수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오한결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소문에 의하면, 데이비드 오 교수와 공동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요?”
“약속했으니 곧 하겠죠.”
“그럼 나도 하고 싶어요. 누구한테 지고 사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특히 데이비드 오 교수 같은 사람에게는요.”
오한결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분이 친해지면 좋겠군요.”
“호호호. 데이비드와 나는 몹시 친하답니다. 다만 그 친분이 첨예한 대립과 기저에 깔린 경쟁심에 기반해 있는 거고요. 물론 서로를 향한 존경도 포함돼 있죠. 오한결 작가도 나이를 먹으면 이런 미묘한 인간관계를 알게 될 겁니다.”
회귀 전 노년의 삶을 겪어 봤던 오한결은 그 말의 참뜻을 알듯하면서도,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
오한결의 표정을 살피던 김보름 교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성격이 모나서 살갑지 못해요.”
“상관없어요. 저는 교수님이 작품으로 저를 기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역시 건방진 모습. 마음에 드는군요. 오한결 작가.”
“그런가요? 하하하.”
“호호호.”
* * *
양승호 비서가 이풀잎과 월드아트홀에 도착했다.
김해자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이메일> 작품이 입소문을 타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겨우 소수만이 작품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신태진 회장의 배려로 티켓을 손에 넣었지만, 문제는 회장 부부도 같은 날 연극을 보러 온다는 사실이었다. 오붓하게 이풀잎과 시간을 보내고 싶던 양승호 비서는 오늘 연극 관람이 썩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풀잎은 평소에도 연극에 관심이 많아 오늘 잔뜩 기대한 표정이었다. 그런 이풀잎을 보고 양승호 비서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그녀를 위해 즐거운 표정을 한껏 지어 보였다.
이풀잎이 고풍스럽게 반짝이는 샹들리에를 보며 말했다.
“여기 엄청 고급스럽네요. 월드아트홀은 아무나 못 온다고 들었거든요.”
양승호 비서도 고가의 대리석으로 치장한 로비를 보며 말했다.
“공연은 많이 하는데, 워낙 소수 관람객만 받는 곳이라 그래요. 사운드와 영상 장비 모두 최고급이라 다른 극장과 비교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와! 회장님 덕분에 이런 곳도 와보고. 이따가 꼭 감사 인사드려야겠어요.”
방금 전까지 회장님을 원망했던 양승호 비서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풀잎 씨는 마음씨도 고운 거 같아요.”
이풀잎이 놀란 눈으로 양승호 비서를 쳐다봤다.
“어머! 그 멘트 90년대 드라마에서 나오던 거 아니네요?”
“아…… 그런가요?”
“호호호. 농담! 고마워요. 양 비서님!”
턱시도를 입은 직원이 티켓을 확인한 후 두 사람을 공연장으로 들여보냈다.
VIP 티켓을 손에 쥔 양승호 비서가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VIP석을 가까스로 찾은 두 사람은 바로 앞에 있는 무대를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배우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거리 아닌가? 배우가 고개를 돌리면 민망할 정도로 눈을 마주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양승호 비서는 부담을 느꼈지만, 이풀잎은 VIP석의 매력에 흠뻑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주위 관객석은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시간이 거의 임박해서 입장하는 듯했다.
좌석에 앉은 두 사람은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대를 비추는 형형색색의 조명과 구석에 얼핏 보이는 다양한 소품들이 호기심을 자아냈다. 어수선한 무대 분위기로 봐서는 방금 전 리허설이 끝난 듯싶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자, 양승호 비서가 민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시간 맞춰 올 걸 그랬어요.”
“그러게요, 호호. 사람들이 안 들어오고 로비에서 뭘 사먹고 있긴 하더라고요.”
“아, 그럼, 제가 나가서 뭐 좀 사올까요?”
“아니에요. 제가 요즘 잘 안 먹어서요.”
“아……. 다이어트 하시는구나.”
양승호 비서가 자신을 챙기는 모습이 귀여워, 이풀잎이 히죽 웃었다.
“원래 소식해요. 호호.”
양승호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지난번 만남 때 이풀잎이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던 모습이 생각나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땐 분명 먹방 너튜브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나……?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떼로 들어와 좌석을 찾아 앉았다.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로 객석이 꽉 차 버렸다.
“어이, 양 비서 왔구먼.”
이풀잎과 속닥속닥 담소를 나누던 양승호 비서가 신태진 회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동적으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자, 회장이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아이구……. 여긴 회사가 아니잖나. 너무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안녕하세요, 회장님.”
양 비서 옆에 있던 이풀잎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회장님 덕분에 귀한 공연을 보게 돼서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이현미 관장이 양승호 비서와 이풀잎을 바라보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현미 관장이 양승호 비서에게 물었다.
“어머, 데이트?”
양승호 비서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아……. 네.”
“양 비서에게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가 있었구나.”
이현미 관장이 손을 내밀고 이풀잎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저는 이현미라고 해요. 회장님과 같이 늙어가는 사람이죠. 호호.”
신태진 회장이 더 신나 하며 말했다.
“풀잎 씨는 내 미술 선생님이셔. 내가 얘기 많이 했지?”
“아! 그분이시구나. 어머! 그럼 양 비서랑 사귀게 된 계기도 미술 수업 때 서로 호감을 느낀 거겠네. 이런, 이런. 너무 좋다!”
이현미 관장이 이풀잎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연극 좋아해요? 이거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거거든.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풀잎 씨!”
“넵. 엄청 좋아해요. 감사하게도 회장님께서 티켓을 주셔서 오늘 오게 됐어요. 지금 심장이 콩딱 콩딱 뛰고 있어요. 너무 기대돼서요.”
이풀잎의 반응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이현미 관장이 회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잘하셨어요. 이건 정말 칭찬합니다. 회장님! 호호.”
신태진 회장이 들뜬 아이처럼 말했다.
“오늘 연극 보고 저녁 식사까지 내가 책임지기로 했지. 이게 바로 젊은이들 말하는 더블데이트! 아닌가? 하하.”
아주 짧은 순간, 이현미 관장의 눈에 양승호 비서와 이풀잎의 얼굴에 비친 난처한 기색이 포착됐다. 그리고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목소리를 높였다.
“회장님! 우리가 아끼는 양 비서가 모처럼 데이트를 하는데, 우리가 방해해서 되겠어요?”
신태진 회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 동의를 구한 거라고.”
“그거야, 회장님 부탁이니까 거절을 못한 거겠죠. 오늘 저녁은 두 아름다운 청년들을 위해 우리가 빠져줍시다.”
“……꼭 그래야 하나?”
단호한 이현미 관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태진 회장이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자신이 눈치 없게도 두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 걸까?
당황한 양승호 비서가 괜찮다고 회장님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겠다고 말했으나, 회장 부부는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더 멋진 저녁 식사 자리를 예약해주었다. 오직 두 사람을 위한 장소로.
이제 공연 시간이 되자, 천장 조명이 차례로 소등돼 공연장은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버렸다. 그때 양승호 비서가 슬쩍 손을 내밀어 이풀잎 손을 꼬옥 잡았다.
두 사람은 누구도 눈치 볼 것 없이 몹시 행복한 표정을 마음껏 지어 보였다.
곧 조명이 켜지고 김해자 배우가 무대 중앙에서 미성의 목소리로 아이를 연기했다. 이 연극은 한 배우가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 등 10명이 넘는 캐릭터를 혼자 연기한다.
하지만 지금 이풀잎 손을 잡은 양승호 비서는 연극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회장 부부가 마련해준 멋진 저녁 식사에 대한 환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