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06화 (106/202)

제106화 영혼의 예술

푸른 물감을 뿌린 듯 하늘이 청량한 어느 날. 모처럼 명일그룹 회장실에도 웃음꽃이 활짝 폈다.

이풀잎을 초대한 신태진 회장은 그간 자신이 그린 작품을 은근히 자랑했고 이풀잎은 자세히 그림을 살피며 진심으로 그의 성장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똑. 똑. 똑.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양승호 비서가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풀잎이 양 비서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윙크를 날렸다.

양 비서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자, 은밀한 내통을 눈치챈 신태진 회장이 헛기침하고 말했다.

“이거 뭐, 노인네가 방해한 것 같군요. 제가 자리를 비워야 하나요? 하하.”

양승호 비서가 그러지 말라고 손을 격하게 흔들자, 그 모습이 어색하고 웃겨서 신태진 회장과 이풀잎이 박장대소했다.

“양 비서, 이리 와서 좀 앉게나.”

양승호 비서가 이풀잎 옆자리에 앉자, 신태진 회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냈다.

“연극 티켓일세.”

티켓을 받은 이풀잎이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이거 되게 구하기 어려운 건데. 너무 감사해요!”

평소 연극에 관심 없던 양승호 비서가 티켓을 살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그렇게 유명한 건가?

그런 양 비서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신태진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일인 다역 연극을 들어봤나? 배우 한 명이 무려 열한 개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거지. 일명 모노드라마라고도 불러. 그 연극이 그거일세.”

“네? 그게 가능해요?”

“한국에 딱 한 명만이 가능하지. 김해자 배우 들어봤지?”

아는 배우 이름이 나오자, 양 비서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죠.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그 티켓이 바로 김해자 배우가 이번에 하는 모노드라마 공연일세.”

이제야 양승호 비서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티켓을 살피자, 신태진 회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공연은 소설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이메일>이 원작이네. 벌써 입소문 때문에 티켓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야. 딸아이가 어렵게 구해줬는데, 오늘 보니까 내가 아니라 두 사람에게 꼭 필요한 공연이라는 생각이 드네.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나. 나는 또 구하면 되니까.”

양승호 비서와 이풀잎이 서로를 바라보며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자신이 아끼는 두 사람이 행복해하자 신태진 회장이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극장에서 보자고.”

“!!”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신태진 회장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날 아내와 함께 갈 예정일세. 그렇게 되면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더블데이트인 건가? 하하. 연극 끝나고 식사는 내가 쏠 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전개에 이풀잎이 억지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 너무 재밌겠네요…….”

이풀잎이 손가락으로 양 비서를 콕 찌르자, 양 비서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하하. 더블데이트 좋죠…….”

갑자기 신이 난 신태진 회장이 50년 전 아내와의 연애 얘기를 시작했다. 양 비서와 이풀잎은 흥미로운 표정을 유지한 채 회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동시에 이 시간이 제발 길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불현듯 상당한 시간이 지난 것을 깨달은 신태진 회장이 양 비서에게 물었다.

“아! 맞다. 오한결 작가 관련해서 보고하기로 돼 있지 않았나?”

보고는 한참 전에 할 생각이었지만, 회장의 말을 끊을 수 없었던 양 비서는 다소 억울한 감정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마이클 폴의 인터뷰 덕분에 한국 언론도 완전히 오한결 작가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양 비서의 보고에 만족한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제야 제대로 일이 돌아가는구먼. 한국에서도 오한결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몇몇 보수 언론들이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부정적 여론을 펼친 거야. 아마도 지켜야할 무언가가 있었던 거겠지? CNN과 마이크 폴의 조합이 단숨에 그 어설픈 장벽을 허물어 버린 거야.”

그러다가 문득, 이상민 장관이 생각난 신태진 회장이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이상민 장관은 좀 안타깝게 됐어. 그가 오한결 작가를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걸 나는 믿고 있거든. 문제라면 그가 욕심이 지나쳤던 거지. 자기만 살려고 오한결 작가를 배신하는 인터뷰를 했으니까 말이야. 인생의 큰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좋으련만.”

양승호 비서가 말했다.

“근데…… 이상민 장관의 행보가 심상치 않습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그게…… 저도 사실 믿기지 않지만, 소문은 이렇습니다. 음……. EBC에서 선보일 두 번째 그림의 모델이 됐다고 합니다.”

“뭐?!”

신태진 회장은 생각했다.

‘분명 뭔가가 있구나!’

신태진 회장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회사를 굳건히 지켜낸 인물이다. 불확실하고 예상하기 힘든 사건을 접할 때 그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을 읽는 타고난 촉이었다.

이상민 장관이 모델이 됐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의 촉이 발동했다.

‘오한결 작가가 실험적인 작품을 준비하는구나!’

그는 언제나 모든 사람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예술가니까. 신태진 회장은 웃음 참지 못하고 터트려 버렸다.

“하하하. 장관이 참 눈치가 없구나. 마냥 좋아하고 있겠지?”

‘눈치’라는 말에 양승호 비서가 회장을 은근슬쩍 째려봤다.

‘칫! 그렇게 눈치가 좋으신 분이 더블데이트라니!’

* * *

갓 구운 피자와 치킨 냄새가 아트화랑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오한결의 EBC 두 번째 그림 방송 날이다. 지난번처럼 모두 모여 방송을 볼 생각에 홍미숙이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부터 음식을 준비한 것이다.

홍철수 사장이 테이블에 맥주와 음료수를 가득 올리고 말했다.

“오한결 작가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야. 그간 여기저기서 안 좋은 소문이 들릴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다고. 절대 오한결 작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

홍미숙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자를 테이블 위에 놓고 대답했다.

“저는 걱정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분명 오한결 작가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고 믿었거든요.”

홍철수 사장이 팔짱을 끼고 동생을 바라봤다.

“걱정을 안 했다고?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 터져 나오던 한숨은 다른 사람을 향한 거였나?”

당황한 홍미숙이 얼른 말을 돌렸다.

“……오빠. 얼른 가서 치킨이나 가져와요.”

때마침 노을과 최무열이 아트화랑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바깥의 찬 기운이 아트 화랑 내부 열기를 식혔다.

맛있는 냄새를 맡은 노을이 무척 기뻐했다.

“언니! 또 실력 발휘한 거예요? 너무 맛있겠다.”

“와, 수제 맥주도 있네. 이건 홍철수 사장님이 준비한 거겠지?”

부엌에서 치킨을 갖고 나오던 홍철수가 대답했다.

“역시 무열 학생은 잘 아는구나. 파티에 수제 맥주가 빠지면 섭섭하지!”

잠시 뒤, 뭔가 허전함을 느낀 홍철수 사장이 물었다.

“서정익 작가는 안 보이네? 설마 아직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거야?”

노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오한결 작가님이 말하길, 원래 그런 시간이 필요한 예술가가 있대요. 그래서 우리도 재촉하지 않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기로 했어요.”

은근히 질투를 느낀 최무열이 중얼거렸다.

“아…… 멋지다. 나도 고독을 즐기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싶다. 근데 왜 혼자 있는 게 이렇게 싫은 거지…….”

홍철수 사장이 우울한 최무열의 등을 두드리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예술가마다 성향이 다르지. 무열 학생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예술 하는 스타일이잖아. 난 그것도 너무 멋진데.”

“오! 그렇죠? 하하하.”

급작스러운 최무열의 태도 변화에 주변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자, 슬슬 EBC 방송 볼 준비를 해볼까?”

노을과 최무열이 홍철수 사장을 도와 텔레비전을 세팅하고 있는데, 조심스럽게 아트화랑 문이 열렸다.

일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느껴지는 찬바람에 놀라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문 앞에 서성이던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저 들어가도 되나요?”

“당연하지! 빨리 들어와요.”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까. 서정익 작가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타고 있었다. 최무열은 그런 서정익 작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요 며칠 안 봤다고, 낯가리는 건 아니죠?”

“제가 좀 그래요…….”

그것도 그거지만, 문제는 서정익 작가의 외모였다. 한동안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카락은 심하게 떡져 있었고 수염도 제법 길게 자라 몹시 지저분해 보였다.

노을과 최무열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아뜰리에 유령이 돌아왔구나!’

노을이 말했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네요……. 멋져요…….”

최무열이 노을의 말에 키득거리며 말을 했다.

“얘기 들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고요?”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들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어깨에 메고 있던 화구통을 열고 돌돌 말린 캔버스를 꺼내 펼쳐 보였다.

그림을 확인한 노을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어머! 세상에!”

노을 반응에 호기심이 생긴 최무열이 고개를 슬쩍 내밀고 그림을 살폈다.

“우와! 고양이 그림이잖아요!”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도 손에 들린 일거리를 내려놓고 재빨리 다가와 그림을 살폈다.

“굉장히 독특한 그림이네. 이런 그림체는 처음 봐.”

서정익 작가가 자신의 손에 들린 그림을 보며 대답했다.

“마음으로 그렸어요.”

이 그림은 서정익 작가도 처음 시도하는 그림 방식이었다.

오한결이 떠나고 혼자 남은 서정익 작가는 마음속 이 강렬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는 결국 이젤 앞에 앉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소화한 뒤 손에 쥔 연필을 캔버스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렇게 연필이 캔버스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눈을 감은 탓일까. 그림의 형태는 일그러지고 엇나갔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림은 시각 예술이지만, 동시에 감성을 담은 영혼의 예술이기도 하다. 이 모든 시작은 서정익 작가를 잡아끌던 어떤 감정이었으니, 그림 또한 그 감정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한결이 눈을 감은 서정익 작가를 이끌며 보여준 그림 방식은 서정익 작가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적 기법을 구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지저분하게 그어지는 겹겹의 연필 선들이 그림의 특징을 만들어 냈다. 하물며 눈, 코, 입 등 인상을 결정짓는 주요 기관들은 본래 자리를 이탈해 그림에 소질 없는 아이의 작품 같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일그러진 인상은 예술적 아우라는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 작은 생명체 얼굴에서 느껴지는 두려움, 공포, 순수함, 그리고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는 안도감을 이처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림체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림을 감상하던 노을이 눈시울을 붉혔다.

“뭉치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요. 바르르 떨며 쓰레기봉투 뒤에 숨어 있던 그 모습이요. 맞아요. 제가 그날 뭉치의 얼굴에서 봤던 그 느낌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최무열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보기엔, 웃고 있는데. 지난번 여기서 재롱부리던 뭉치의 모습이 보이잖아. 누나, 제대로 봐봐.”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과 해석이 달랐으면 싶었던 서정익 작가는 두 사람의 상반된 작품 해석에 기분이 좋아졌다.

“모두 맞아요. 이 그림은 하나의 감정으로 정의할 수 없어요.”

서정익 작가는 그림을 다시 돌돌 말아 화구통에 넣고는 노을에게 내밀었다.

“노을 씨에게 선물로 드릴게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물에 노을이 입을 크게 벌렸다.

“헉! 정말이에요? 저 주시는 거예요?”

“네, 이 그림의 주인은 뭉치를 제게 소개해준 노을 씨가 되어야 해요.”

“끼약!!”

그림을 받고 발을 동동 구르는 노을을 최무열이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누나! 너무 좋겠다. 아, 이건 너무 불공평해! 제건 없어요? 나도 고양이 입양하면 하나 그려줄 건가요?”

노을이 갑자기 최무열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아! 왜 그래 누나! 미쳤어?”

“고양이 입양이 장난이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홍철수 사장이 한마디를 했다.

“애들도 아니고, 싸우긴 왜 싸워. 그러지 말고 어서 텔레비전 설치를 마저 하자구나. 곧 오한결 작가 그림 방송이 시작될 거야.”

그렇게 그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이 힘을 합쳐 홍철수 사장을 도왔다. 서정익 작가까지 합세하자 금세 화랑 중앙에 텔레비전이 설치됐다.

모두 피자와 치킨, 맥주와 음료가 가득한 테이블에 빙 둘러앉았다. 홍미숙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시작하겠어요.”

리모컨을 든 홍철수 사장이 전원 버튼을 누르자, 텔레비전 화면에 빛이 번쩍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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