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05화 (105/202)

제105화 호캉스

늦은 저녁, 오한결이 아뜰리에로 향했다.

서정익 작가가 모습을 감췄다면 분명 익숙하고 마음이 편한 장소에 몸을 숨겼을 것이다. 그런 동굴 같은 장소를 떠올리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서정익 작가는 외딴 섬처럼 홀로 세상을 견디며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럽게 생긴 친구들이 부담됐던 걸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예술에만 쏟아부었던 서정익 작가. 오한결은 그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예민한 예술가 기질을 타고난 그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서정익 작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술에 자신의 삶을 바치길 원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렇다면 지금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너무 뻔하지 않은가?

분명 작업실에 처박혀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게 천재적 기질을 타고난 서정익 작가의 운명이다.

오한결이 서정익 작가의 작업실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길고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문 너머 아무도 노크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한결은 서정익 작가가 반드시 작업실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간 서정익 작가를 살펴본 결과 그의 삶은 무척 단순했다. 그에게 작업실은 삶의 전부였다.

“서정익 작가 안에 있는 거 알아. 문 좀 열어줄래?”

오한결의 목소리만 텅 빈 복도에 울릴 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나 혼자 왔어. 그러니까 열어 볼래?”

문 안쪽에서 머뭇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떡진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서정익 작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오한결은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원래 머리 안 감기로 유명했는데, 그간 말끔한 모습에 익숙해져 서정익 작가의 이런 모습을 잊고 지냈다.

‘그는 아뜰리에 귀신이야. 밤마다 떡 진 머리로 복도를 유령처럼 미끄러져 다니더라고!’

지난날 노을이 치를 떨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한결 작가님 무슨 일로…….”

“무슨 일이라니! 그건 내가 물어야지. 왜 잠수를 탔어? 다들 걱정하고 있잖아.”

우물쭈물하는 서정익 작가에게 미소 짓고는 오한결이 작업실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작업실 한가운데에 이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위로 흰 캔버스가 쓸쓸히 얹혀 있었다.

“아직 작업을 시작 못 했구나?”

서정익 작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이제 해야죠.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어요.”

오한결이 서정익 작가의 안색을 살폈다.

“그동안 노을 최무열하고 어울리면서 스트레스를 받은 거야?”

서정익 작가가 그건 아니라며 손을 흔들고 대답했다.

“그 두 분하고 함께 작업하고 지방 여행도 가고 그랬거든요. 제겐 너무 환상적인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너무 좋은데도 그걸로는 이상하게 만족이 안 돼요. 아마도 제가 좀 이상한가 봐요.”

오한결은 서정익 작가의 고민을 이해했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예술적 욕구를 충족하는 활동과 별개의 사안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개인 작업을 하면 그만일 텐데, 왜 이렇게 극단적인 관계 단절로 친구들을 걱정시키는 걸까? 아마도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이 미숙한 탓일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오한결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간 개인 활동이 뜸해서 그럴 거야. 그래도 친구들이 걱정하니까. 잘 있다는 연락은 하고 지내.”

“아……. 저를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몰랐어요.”

사회성이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었지만, 오한결 작가는 다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서정익 작가가 흰 캔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며칠 전, 잠을 자고 일어나니까 무엇에 홀린 듯 작업실 중앙에 이젤을 놓고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근데 그 이후 며칠 동안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어요. 분명 무언가가 나를 자극하고 있는데, 그게 뭔지 실체가 보이지 않아요. 아주 미치겠어요.”

오한결이 이젤 앞에 다가가 삐뚤어진 의자를 바로 세우고 서정익 작가를 불렀다.

“여기 앉아 볼래?”

서정익 작가가 의자에 앉자 오한결이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캔버스를 바라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

“……뭔가 보이긴 해요. 하지만 너무 모호해요.”

오한결은 서정익 작가가 자신과 비슷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불현듯 느껴지는 예술적 영감이 시각적 이미지가 되어 빈 캔버스를 은은하게 채우는 능력 말이다. 작가는 그저 그것을 따라 그리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서정익 작가는 아직 미숙해 그 능력의 실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감정에 솔직해진다면 좀 더 잘 보일 거야.”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것 같아요.”

“최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경험을 떠올려봐.”

“……모르겠어요. 많은 경험을 해서. 딱 하나를 꼽을 수가 없어요.”

“아니! 분명히 있어. 그걸 생각해 내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오한결의 말에 서정익 작가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강렬한 경험이라고? 그게 도대체 뭘까.’

최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떠올려봤다. 매번 긴장됐지만, 무척 설레고 흥미로웠던 순간들.

편견 없이 자신을 대했던 친구들과 함께였기에 그 모든 게 가능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친구들이 지금의 예술적 욕구를 자극한 건 아니었다. 노을과 최무열을 생각하면 고맙고 행복할 뿐이었다. 절대 그들이 이렇게 먹먹하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느끼게 했을 리가 없다.

‘뭘까?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이 감정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각에 몰두한 서정익 작가에게 오한결이 연필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서정익 작가 손 위에 올리고 말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봐. 내가 도와줄게.”

눈을 감은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캔버스 위에 닿는 연필심이 스스슥 스스슥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오한결이 말했다.

“눈을 떠볼래?”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뜬 서정익 작가는 캔버스를 가득 채운 고양이 얼굴에 까무러치게 놀랐다. 눈을 감고 그린 탓에 형태가 일그러지고 외곽선도 이중 삼중으로 지저분하게 그렸지만 이건 분명히 고양이 얼굴이었다.

오한결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고양이? 이게 서정익 작가 마음속에 있는 것 같아.”

“뭉치에요.”

“뭉치라고? 그게 뭐야?”

서정익 작가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노을 씨가 입양한 새끼 고양이요. 얼마 전 아트화랑에 데리고 왔거든요. 그때 처음으로 고양이를 안아 봤어요. 생각해보니까 저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아요. 가녀린 생명체가 미약하게 제 품에서 숨을 쉬고 있다니요.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겨우 참았어요.”

말을 하던 서정익 작가가 눈을 번쩍 뜨고 소리쳤다.

“아, 맞아요! 그때 뭉치를 안을 때 얼핏 생각했어요. 내가 이 아이를 그리겠구나. 그때는 잡생각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그 아이를 그려야 해요!”

서정익 작가는 수일간 자신을 괴롭힌 그 감정의 정체를 드디어 깨달았다. 아기 고양이 뭉치는 단단한 벽 같은 서정익 작가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그는 뭉치를 그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정익 작가는 작은 생명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소화하여 불안했던 삶에 균형을 되찾을 기회를 얻게 되리라.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작업 끝나면 꼭 연락해줘!”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한결 작가님!”

* * *

S호텔로 들어서자 고급스럽고 화려한 로비가 오한결 가족을 반겼다.

평소 조곤조곤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탄성을 질렀다.

“이야! 여기가 5성급 호텔이라고? 기가 막히는구나!”

어머니가 아버지를 제지했다.

“조용! 여기선 그렇게 떠들면 안 돼요.”

체크인을 마친 오한결이 부모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한결아, 갑자기 웬 호텔이니?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급 호텔을. 난 이해하기 힘들구나.”

“엄마! 이게 호캉스예요. 요즘 다 이렇게 즐기고 쉬고 간다고요.”

멋진 로비에 정신이 팔린 동생이 아는 척을 하자, 어머니가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며 대답했다.

“그래? 요즘은 이런다고? 엄청 비쌀 텐데.”

부모님의 짐을 받아든 오한결이 앞장서며 말했다.

“호텔과 바캉스의 합성어가 호캉스예요. 단순하게 하루 쉬고 간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돈 걱정은 그만하시고요. 하하. 아, 방은 두 개 잡았어요. 부모님은 오붓하고 보내시고 저는 동생하고 같이 쓸게요.”

오한결과 부모님이 로비 구석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주변을 살피다가 뒤처진 동생이 강아지처럼 총총거리며 그들 뒤를 쫓아갔다.

호텔 룸에 들어오자, 동생이 침대 위로 몸을 날린 후 대자로 누웠다.

“우와 좋다! 내가 창가 근처 써도 되지? 먼저 찜했다.”

짐을 풀던 오한결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오늘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봐준다.”

“대박! 오늘은 나의 날이도다!”

잔뜩 들뜬 동생이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오한결은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올 걸 그랬네.’

간단히 짐 정리를 마치고 침대에 눕자 졸음이 몰려왔다. 깜빡 잠이든 오한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30분이 지나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생이 창가 테이블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아직 잠이 안 깼나?’

눈을 비벼보았지만 꿈은 아니었다. 어리둥절해진 오한결이 말했다.

“한수 네가 독서를 한다고?”

방해하지 말라는 듯 동생이 책에 눈을 고정한 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은 책이 당기는 날이야. 방해하지 말아 줄래?”

피식 웃은 오한결이 기지개를 켜며 창가로 다가갔다. 거대한 창밖으로 남산 풍경이 보였다. 며칠 전 눈이 많이 와서 그런지 설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휴대 전화가 울려 확인해 보니 어머니였다.

[우리 아들들은 뭐하니?]

“한수는 지금 책 읽어요. 저는 바깥 풍경을 감상 중이고요.”

[어머! 책이라고? 누가 한수가?]

“네. 하하하.”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그나저나 네 아버지도 좀 별나네.]

“아버지는 뭐하시는 데요?”

[반신욕. 여기 욕조를 보더니 바로 반신욕 하러 갔어. 호호.]

“……수영장 간다고 했는데. 갔다 와서 하시지.”

[그러게 말이다. 근데 오늘은 하고 싶은 대로 하자구나.]

“맞네요. 하하. 그럼 30분 뒤에 수영장에 봬요.”

통화를 마치자마자, 오한결이 기분 좋게 웃으며 수영복을 꺼냈다. 오랜만에 수영을 즐길 생각을 하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오한결이 물살을 거칠게 가르며 수영 솜씨를 뽐내자, 물 밖에서 구경하던 부모님과 동생은 그런 오한결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근데 형이 언제부터 수영을 저렇게 잘했지? 우리 가족은 물과 안 친한데…….”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래도 잘하면 좋지.”

오한결이 능숙하게 물속에서 턴을 하자, 어머니가 손뼉을 쳤다.

“이야, 수영 선수해도 되겠다!”

“엄마! 소름끼치지 않아요? 그림도 잘 그려? 영어도 잘해? 이제는 수영도 완벽해? 형이 너무 이상해 보여요.”

어머니는 오한결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다 잘하면 좋지. 그게 문제니? 한수도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잖아.”

“그건 맞죠. 하하하.”

그렇게 가족은 한참을 오한결이 수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슬슬 지겨워지자, 서로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지하에 골프 연습장이 있던데…….”

“그래요? 그러고 보니 12층에서 스파를 즐길 수 있다던데…….”

가족들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더니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대표로 말했다.

“자, 우리도 하고 싶은 거 즐깁니다. 그럼, 이따 식사 때 보자고!”

충분히 수영을 즐긴 오한결이 물 밖으로 나와 가족을 찾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자, 부재 전화가 몇 건 와 있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수영 끝난 거니? 너무 오래한 거 아냐?]

“하나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근데 다들 어디 있는 거예요?”

[수영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서 각자 뿔뿔이 흩어졌어. 하고 싶은 거 한다고…….]

“네? 어디로 갔는데요?”

[한수는 피트니스 갔고 아버지는 골프연습장, 나는 스파 하러 왔어. 어머, 여기 서비스 너무 좋다. 너도 스파 받으러 올래?]

오한결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죠, 뭐. 전 수영을 좀 더 하고 갈게요. 그리고 저녁은 룸서비스로 할 거니까. 이따 룸에서 봬요!”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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