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은둔형 평론가
아리미술관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이현미 관장이 평소와 다른 무거운 분위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나?’
주방으로 들어가자, 신태진 회장과 신수진 이사장이 수저로 밥을 대충 떠먹으며 각자 자신만의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심지어 그 옆에 앉은 복실이 또한 바닥에 힘없이 엎드린 채 이현미 관장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평소에는 외출만 했다 돌아오면 그렇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던 아이였는데 말이다.
인기척을 느낀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여보, 당신 왔어요?”
“……엄마, 오셨어요?”
왈……. 왈…….
답답한 마음에 찬물을 벌컥 들이켠 이현미 관장이 소리쳤다.
“뭐에요, 다들?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사실…….”
신수진 이사장이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고 차분하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오한결에 대한 국내 여론이 잠잠해지지 않자, 그가 직접 CNN에 출연해 유명 평론가와 인터뷰하겠다고 문화재단에 부탁했던 사실까지 말이다.
문화재단은 CNN과 연줄이 닿았지만, 오한결이 지목한 그 평론가는 은둔 중이라 전혀 접근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내내 신수진 이사장은 우울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번 건은 오한결이 직접 부탁한 사안이었다. 그만큼 더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여 오한결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무기력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사전에 없는 ‘포기’라는 단어를 써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수진의 우울한 감정에 동화된 복슬이를 이현미 관장이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른 평론가는 어떠니?”
신태진 회장이 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보탰다.
“그래. 은둔하고 있다는 그 사람을 무슨 수로 찾아?”
“안 돼요! 꼭 그 사람이어야 해요!”
신수진 이사장이 부글부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나! 신수진이 오한결 작가의 부탁 하나 못 들어주는 게 말이 되는가?
신태진 회장과 이현미 관장은 불안한 마음으로 완벽주의자 성향의 딸을 바라봤다. 요즘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한결이 그녀의 승부욕에 불을 지핀 것이다. 만약 섭외에 실패한다면 딸이 받을 상처가 몹시 걱정됐다. 예전엔 한 달간 식음을 전폐했었지…….
‘근데 그 평론가가 누군데 이렇게 고민하는 거지?’
순간 이현미 관장은 그 평론가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미술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지 않았는가? 누구보다 고급 인맥을 알고 있다고 자부한 그녀였다.
“그 은둔한다는 평론가가 누구기에 그러니?”
신수진 이사장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마이크 폴이요.”
이현미 관장이 그 이름을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
“마이크 폴?!”
아내가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태진 회장이 나직이 설명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양승호 비서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현존하는 최고 예술 평론가 칭호를 받는 사람이더군. 근데 좀 사람이 별나. 미국판 ‘나는 자연인’으로 생각하면 되지. 한 번 은둔하면 몇 년씩 산속에서 지낸다고 하더라고. 혹시 모르지, 이제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을지?”
“예술계 종사자는 다 알죠. 유명해요. 호호.”
신태진 회장의 말에 신수진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순간 미간에 주름을 잡은 이현미 관장이 갑자기 휴대폰 화면을 켜고 분주하게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신태진 회장과 신수진 이사장은 그녀가 평론가 정보를 검색한다고 생각했다. 최근 동향을 찾아봤자, 검색되는 것도 없을 텐데…….
그런데 그녀의 휴대폰에서 낯선 외국 남성을 목소리가 들렸다.
[오, 현미! 오랜만이야.]
“마이크 폴! 살아있었구나!”
신수진 이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 마이크 폴?!
[하하. 아주 잘 있다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지.]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이따금 날쌘 바람이 스쳐 가는 소리도 들렸다.
“밖이구나. 소문대로 은둔 생활을 하나 보지?”
[음, 자발적 고립이라 해두지. 내겐 익숙한 삶의 방식이야.]
“그래, 누구나 삶을 방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지. 응원할게.”
[고맙군. 하하.]
용건을 밝힐 때가 됐다고 생각한 이현미 관장이 살짝 긴장한 채 말했다.
“혹시, 오한결 작가를 알아?”
[당연히! 아쉽게도 최근에 알았네. 잠깐 지인을 만나러 시내에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됐지. 사실은 뉴욕타임즈에 오한결 작가 작품평을 기고할까 생각 중에 있거든. 내 인생에 그렇게 멋진 작품은 처음이야. 진정한 천재가 아닐까 싶어.]
이현미 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오호! 사실은 오한결 작가가 마이크를 만나고 싶어 하거든.”
[오 마이 갓! 정말이야? 당장 한국으로 갈까?]
“워워,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이현미 관장은 그간 오한결의 행보를 설명했다. 방송에서 오한결이 파격적인 그림을 선보인 후 해외 언론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국내 언론은 날이 갈수록 악화돼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한결이 마이크 폴과 함께 CNN 대담을 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당연히 도와줘야지!]
“와우! 너무 고마워.”
[근데 왜 CNN에서 내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모두 연락에 실패했다고!”
[아! 맞다. 업무용 폰을 내가 꺼놓거든.]
“그런 것 같더라. 그래서 30년 전 번호로 걸어봤는데, 용케 받았네.”
[하하. 소중한 친구들이 아는 번호니까. 평생 간직해야지.]
이현미 관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CNN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해줄 거지?”
[물론, 무조건이지!]
“오케이. 일정 확인하고 연락할게!”
원하는 결과를 얻은 이현미 관장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남편과 딸을 바라봤다.
“해결했어요. 호호.”
몹시 놀란 신수진 이사장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엄마……. 아니, 어머니! 마이크 폴을 알아요?”
“대학 동창이란다. 나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지. 왜냐면 내가 지금의 아내를 소개시켜줬거든.”
신수진 이사장이 신태진 회장을 보며 말했다.
“당신도 잘 알 텐데요. 30년 전 뉴욕에서 열린 결혼식에 우리도 참석했잖아요.”
“!!”
긴 머리에 비쩍 마른 남성의 이미지가 생각난 신태진 회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놈이 마이크 폴이야? 까맣게 잊고 있었네.”
신태진 회장이 히죽히죽 웃으며 마이크 폴과의 추억을 딸에게 설명했다. 마이크 폴의 소박했던 결혼식부터 그의 신혼집에 찾아가 술을 진탕 먹다 취했던 추억까지. 물론 부엌에 구토를 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무거웠던 집안 분위기가 밝게 변하자, 복실이가 귀신같이 감지하고는 신나게 짖었다.
왈! 왈! 왈!
* * *
“어머!!”
노을이 새끼 고양이 뭉치를 품에 안고 아트화랑에 들어오자, 홍미숙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안아 봐도 될까?”
“그럼요. 뭉치야, 언니 품으로 가봐.”
노을의 품에서 잔뜩 움츠린 뭉치에게 홍미숙이 손을 내밀었다.
뭉치를 안은 홍미숙이 기분 좋게 웃자, 홍철수 사장이 따라 웃었다.
“미숙이가 고양이를 참 좋아해. 이미 두 마리를 키우고 있거든.”
“아, 정말요?”
노을이 홍미숙 옆에 찰싹 붙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는데. 정보 좀 공유해 주세요. 언니!”
“당연하지. 뭐든지 말만 해.”
두 사람이 고양이 육아에 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가 아트화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새끼 고양이를 발견한 최무열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양이 근처로 다가왔다.
“우와! 고양이다. 아트화랑에서 키우는 거예요?”
“노을이 데려왔어. 최근에 입양했대.”
노을이 배시시 웃으며 뭉치와 만났던 일화를 설명했다. 눈이 오는 날 쓰레기봉투 뒤에서 뭉치가 서럽게 울던 그 날을 회상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먹이를 줬는데, 글쎄, 옥탑 작업실까지 따라왔지 뭐야!”
노을이 뭉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뭉치한테 나랑 같이 살래? 이렇게 물어보니까, 그러겠다고 대답하더라. 어쩌겠어? 그래서 내가 키우고 있지. 호호.”
노을의 말에 최무열이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고양이 말도 하세요?”
억울한 생각이 든 노을이 뭉치를 바라봤다. 그럼 이 자리에서 보여주면 되잖아!
“뭉치야, 아트화랑 오니까 좋지?”
야옹!
노을이 최무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 사람 되게 못생겼지?”
이야옹!!
표정이 굳은 최무열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박장대소했다.
노을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말했다.
“봤지? 커뮤니케이션 되는 거.”
홍미숙이 삐친 최무열에게 뭉치를 건네자, 뭉치가 최무열의 품속으로 쏙 들어갔다.
최무열은 품에서 느껴지는 작은 생명의 따스함과 미세한 떨림에 묘한 황홀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귀여웠다.
“뭉치야? 노을 누나가 괴롭히진 않고?”
이야옹!!
뭉치가 소리치자, 이번엔 사람들이 노을 보면서 히죽댔다. 노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라고 말한 뒤 서정익 작가를 바라봤다.
“작가님도 안아 볼래요?”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질린 서정익 작가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 저는 고양이 못 만져요. 무서워요.”
노을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요? 이렇게 귀여운데.”
“할퀴면 어떡해요. 저 날카로운 발톱 좀 봐. 저는 사양할게요…….”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때마침 아트화랑 문이 벌컥 열리더니 추위에 코가 벌게진 최하늘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좋은 소식 있어요!”
“언니 오셨네요!”
노을이 반갑게 인사하자, 최하늘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두리번대며 오한결을 찾았지만 그가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실망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최무열이 안고 있는 고양이를 보자마자 다시 환하게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고양이다!! 귀여워!”
최하늘의 반응에 놀란 최무열이 슬쩍 뭉치를 최하늘의 품으로 넘겨줬다. 뭉치는 전혀 경계하지 않고 최하늘의 품에 들어가 그르릉거리며 행복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뭉치의 사연을 들은 최하늘은 노을에게 물었다.
“옥탑 작업실에 가면 뭉치를 볼 수 있겠네?”
“그럼요. 자주 놀러 오세요. 언니.”
홍철수 사장이 따뜻한 차를 건네며 최하늘에게 물었다.
“아까 말한 좋은 소식이 뭔가요?”
이제야 아트화랑을 방문한 용건이 생각난 최하늘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내 정신 좀 봐!! 호호. 오한결 작가님 CNN 인터뷰 확정됐어요. 그리고 마이크 폴 평론가도 대담자로 섭외됐고요. 이제 방송만 나가면 오한결 작가님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 분위기가 완전히 바뀔 거예요.”
사람들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자, 뒤늦게 최하늘이 설명을 이어서 했다. 국내 여론을 돌리기 위해 오한결이 CNN에 세계적인 평론가와 함께 출연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 사실을 알려줬다.
마이크 폴이 그렇게 유명하냐고 노을이 묻자, 자신의 차례가 왔다고 생각한 최무열이 길고 상세하게 마이크 폴의 이력을 읊어댔다. 따분한 미술사 강의처럼 느껴졌지만 최무열의 열정에 모두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사이 뭉치는 최하늘의 품에서 잠들어버렸다.
최무열의 지루한 설명이 끝나자, 최하늘이 말했다.
“아쉽지만, 오한결 작가님께는 전화로 알려드려야겠어요.”
살짝 추위를 느낀 최하늘이 난로 근처에 앉으려고 하는데, 품에 안긴 뭉치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었다. 뭉치를 누군가의 품에 넘기려고 주위를 돌아보다가, 서정익 작가와 눈이 마주쳤다.
“서정익 작가님, 잠깐 뭉치 좀 안고 계실래요?”
“……”
당황한 서정익 작가가 말을 하지 못 하자 노을이 대신 설명했다.
“서정익 작가님은 고양이가 무섭대요.”
최하늘이 손바닥만 한 뭉치를 슬쩍 보고 말했다.
“아직 새끼 고양이에요.”
“그래도……. 맹수는 야생의 본능을 감출 수 없죠.”
그 사이 잠에서 깨어난 뭉치가 최하늘 품에서 힘껏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는데, 뭉치 눈에 서정익 작가의 겁먹은 모습이 보였다.
이야옹!
뭉치가 서정익 작가를 향해 울자, 서정익 작가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뭉치가 작가님께 가고 싶대요. 안아 보세요!”
최하늘이 슬쩍 웃으며 서정익 작가 품에 뭉치를 건네자, 뭉치가 서정익 작가 팔 안쪽으로 파고들어 편한 자세를 취했다.
뭉치를 안은 서정익 작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사람 손을 타긴 했어도 이 고양이는 결국 야생 동물 아닌가? 그 야생성이 약해질 수 있지만 제거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하늘의 말대로 너무나 작은 생명체였다. 주먹만 한 뭉치는 서정익 작가 품에서 세상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곧이어 서정익 작가는 깨달았다. 이 작은 생명체가 자신에게 의지하여 생명을 보호받길 원한다는 것을.
그러자 두려움은 점점 희미해졌고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보호 본능이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자신을 꽁꽁 싸맸던 서정익 작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미묘한 변화가 싫지 않았다.
이야옹.
기분이 좋아진 뭉치가 소리를 내자, 서정익 작가는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전보다 훨씬 따스한 눈빛으로 뭉치를 바라봤다.
여전히 두려운 마음이 들지만, 이 작은 생명체를 품에 안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이 아이를 그려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