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비상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벽난로 옆에 이현미 관장과 신수진 이사장이 뻘쭘하게 앉았고 그 아래 복실이가 자신의 발로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안 돼, 움직이지 마.”
이젤 앞에 앉은 신태진 회장이 신중하게 스케치를 하며 말했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던 신수진 이사장이 투덜거렸다.
“갑자기 가족 그림을 그리신다고……. 아버지도 참.”
“너 몰랐니? 회장님 요즘 그림 배우시잖아.”
전혀 생각지 못한 소식에 놀란 신수진 이사장이 어머니를 쳐다보자, 신태진 회장이 짜증을 냈다.
“수진아! 지금 이목구비 그리는 데 그렇게 얼굴을 돌리면 어쩌냐? 방금 완벽한 비율을 잡았는데. 이런!”
이현미 관장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수진아, 조금만 더 버텨봐. 회장님이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연습하셨는데.”
신수진 이사장이 아버지의 열정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슬쩍 웃어 보였다.
“네, 버텨볼게요.”
세 시간 뒤, 그림을 완성한 신태진 회장이 벽난로 옆에 작품을 세워놓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뭔가를 해본 지가 얼마 만이었던가.
기진맥진한 회장이 소파에 풀쩍 주저앉고는 피곤한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현미 관장과 신수진 이사장이 간단한 다과를 가지고 회장 곁에 다가왔다. 신수진 이사장이 회장 옆에 바싹 붙어 앉고는 그림을 쳐다보며 물었다.
“고생하셨어요. 어때요? 만족하세요?”
신태진 회장이 그림을 눈으로 훑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면 합격 아니냐? 인물 배치도 훌륭하고. 근데 약간 안 닮았는데……. 하긴 우리 집안에 뛰어난 인물이 없으니, 생긴 게 무슨 상관이겠냐. 하하.”
“아……. 네.”
딸의 떨떠름한 대답에 이현미 관장이 눈치껏 처신하라며 신수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아! 어머니!”
큰 소리에 신태진 회장이 두 모녀를 쳐다보자,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히죽 웃어 보였다.
사실, 그림은 엉망이었다. 아직 초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못 그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명암 자체가 엉망이라 만화를 그린 건지 인물화를 그린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물의 인상이 몹시 엉망이었다. 눈 코 입은 제대로 그려지긴 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인물화는 그 모델과 얼마나 닮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신태진 회장의 그림 속 인물 중 가족과 닮은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복실이만 비슷했다. 똥그란 눈과 축 처진 귀, 살짝 맹해 보이는 주둥이는 복실이의 특징을 모두 나타내고 있었다.
칭찬 거리를 찾던 이현미 관장이 그림 속 복실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복실이가 저렇게 잘 생겼나. 회장님이 멋지게 그려주셨네.”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던 복실이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왈. 왈. 왈.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동물 그리기가 쉽지 않아. 관찰력이 뛰어나야 하거든. 우리 집 식구 얼굴은 내가 외우다시피 하니까 그럭저럭 그렸지만, 복실이 같은 동물은 잘못했다간 맹수로 보일 수 있거든. 이 순둥이가 그렇게 보이면 안 되잖아.”
“아……. 네.”
찰싹.
이현미 관장이 신수진 이사장의 반응에 불만을 품고 등을 찰지게 때렸다.
“아! 왜요!”
“내가 볼 땐 회장님 그림은 멋져. 네 눈에도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구나.”
“……진심이시죠?”
자신의 그림에 심취한 신태진 회장이 결심한 듯 아내와 딸을 바라봤다.
“내 그림을 모아서 전시회를 열어보는 건 어때?”
“!!”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든 신태진 회장이 말을 이었다.
“여보, 아리 미술관에 작은 전시실을 준비해 주세요. 난 욕심 없어. 작아도 돼.”
신태진 회장의 선을 넘는 발언에 이현미 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게 욕심이에요!!”
“엄마!”
신수진 이사장이 이현미 관장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멋진 그림이라며, 호호.”
“…….”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여전히 그림에 심취한 신태진 회장은 뿌듯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얼마나 멋진 그림인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동그라미도 못 그리던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이렇게 훌륭하게 그려냈다.
신태진 회장은 진심으로 자신만의 멋진 전시회를 생각하고 있었다…….
* * *
신수진 이사장이 문화재단을 찾아온 데이비드 오 교수와 오한결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요즘 부쩍 두 분이 친해진 것 같아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차분히 커피를 마시고 대답했다.
“함께 작업하기로 했으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거겠죠.”
“다음에 저도 끼워주세요. 약간 샘이 나네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신수진 이사장이 히죽 웃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최하늘이 이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 앉아요. 하늘 씨.”
최하늘이 오한결 맞은편에 앉자, 신수진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님이 뉴욕 일정을 알려주시러 오셨어요.”
뉴욕 일정이라는 말에 최하늘이 깜짝 놀랐다. 오한결 작가의 해외 스케줄은 문화재단 소관이고, 자신이 담당자였기 때문이다. 일 처리가 늦어 데이비드 오 교수가 직접 나선 걸까?
최하늘의 미묘한 심경 변화를 눈치챈 데이비드 오 교수가 차분히 설명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최하늘 씨. 오늘 말씀드리는 뉴욕 일정은 제 개인 일정입니다. 다만, 그쪽에서 오한결 작가를 초대하고 싶다는 의견을 보내와서요. 그래서 이사장님하고 상의하는 중입니다. 추후 문화재단에서 추진하는 뉴욕 일정이 있다면 별도로 진행하셔도 되고요.”
긴장이 풀리자 최하늘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나왔다.
“아! 그랬군요. 난 또…….”
“그래도 이번 일정은 우리 문화재단이 관리하겠습니다. 오한결 작가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신수진 이사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명함을 하나를 최하늘에게 건넸다.
“뉴욕대 교수 앤드류입니다. 이 친구가 뉴욕 일정을 담당하고 있어요. 오한결 작가를 초대한 장본인이기도 하고요.”
명함을 이리저리 살피며 최하늘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해볼게요.”
신수진 이사장이 오한결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한결 작가님은 뉴욕에 가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짧게 대답한 오한결은 회귀 전 뉴욕에 대한 추억에 빠져들었다.
자신을 실패한 예술가로 여겼던 그때, 오한결은 가족을 포함한 모든 걸 버리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뉴욕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일한 끝에 식당을 개업했고 경제적 안정을 찾기도 했다. 그렇게 순탄하길 바랐던 삶에 교통사고라는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었다. 불운으로 끝날 것 같던 뉴욕 생활에 천재적 능력이라는 기적을 얻게 됐고 말년에는 작가로서 화려한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곳을 다시 가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20대 때 자포자기로 떠났던 뉴욕을 회귀 후 성공한 예술가로서 방문한다면.
“오한결 작가님?”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긴 오한결에게 신수진 이사장이 물었다.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나요?”
다시 여유를 찾은 오한결이 방긋 웃었다.
“뉴욕 일정이 기대돼서요. 이번에도 최하늘 씨와 같이 가나요?”
신수진 이사장이 데이비드 오 교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도 되겠죠? 우리 직원이 동행해도요?”
“물론이죠. 그건 제가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최하늘은 쑥스럽게 웃으면서도 오한결의 안색을 계속 살폈다. 뉴욕에 가본 적이 없다 말하지만, 뉴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미묘하게 바뀌는 분위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혹시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도…….’
* * *
혜화역에 내린 오한결이 두리번거리며 부모님을 찾고 있었다.
지난 <햄릿> 연극에 이어 동생의 두 번째 공연인 ‘발레 뮤지컬’을 보러왔다.
멀리서 오한결을 알아본 부모님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한결아, 이거 받아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꽃다발을 하나씩 오한결에게 건넸다.
“이건 오한수 꺼, 이건 노진홍 학생 꺼.”
오한결이 두 개의 꽃다발을 받아 들고 대답했다.
“아……. 제가 사려고 했는데. 먼저 사셨네요.”
“누가 사면 어떠니? 그리고 엄마가 너보단 꽃 보는 눈이 더 높아.”
“하하. 그렇긴 하죠. 공연장으로 가시죠. 시간 다 돼가요.”
지난 <햄릿> 공연과 마찬가지로 이번 공연장소도 <플라워소극장>이었다. 혜화역에서 좀 걷다가 골목길 사이로 빠지자, 붉은색 극장 간판이 보였다. 그 아래에 천진난만한 글씨체로 ‘연내대학교 연극동아리 ‘놀자’의 발레 뮤지컬 공연 <비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부모님과 공연장에 들어서자, 구석에 낯익은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들을 알아본 오한결이 부모님께 소개했다.
“여기는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 그리고 문화재단 직원 최하늘 씨.”
모두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으며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모두 귀한 발걸음해 줘서 고마워요. 즐거운 시간됐으면 좋겠네요.”
사람들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공연시간에 다다르자 관객들로 좌석이 꽉 차 있었다.
“지난번 연극과 다르게 이번엔 꽤 인기가 많구나.”
아버지가 관객석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와 다르죠. 이번엔 노진홍이라는 발레리노가 함께 하잖아요. 저 앞에 앉은 몇 명은 유명한 뮤지컬 기획자들 같은데요. 아마도 소문이 났나 봐요.”
“그래? 노진홍 학생이 꽤 유명한가 보구나.”
“아무래도 국립예술교육원 출신이니까요. 거긴 딱 정원이 10명이거든요. 대한민국 전국 10등 이내란 얘기죠. 모든 무용 전공생들이 어쨌든 다 지원한다고 하니까요.”
“한결이는 모르는 게 없구나.”
“인터넷에 나와요…….”
잠시 뒤, 공연 시작과 동시에 소극장이 암전됐다.
숨 막힐 듯한 적막감을 깨고 단순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서서히 조명이 밝아지고 배우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대 위를 살피던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아들 오한수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됐다.
교복을 입은 오한수가 동네 발레 교습소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발레를 배우고 싶은 수줍은 남학생.
하지만 마음과 달리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장면이 전환되고, 인자하신 교습소 원장님을 만나 기초 동작부터 차근히 배우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아 좌절하던 학생은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발레교습소 원장은 그에게 춤을 즐기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조언한다.
무리지어 움직이던 오한수와 극단 단원들이 빠른 박자에 맞춰 춤을 춘다.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춤사위.
하지만 흥이 있다.
그들은 춤을 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무척 행복하다.
다시 암전된 무대.
무대에 불이 들어오자, 주인공은 노진홍으로 바뀌어 있었다.
완벽한 점프와 함께 이어지는 손과 발의 우아한 움직임.
전문 발레리노의 예술적 춤동작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무용을 보고 있는데, 왜 이렇게 숨 막히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걸까?
무대 배경이 낮과 밤으로 수시로 바뀌는 와중에 무대 중앙에 선 노진홍은 끊임없이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 완벽한 춤추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노진홍.
발목을 붙잡고 악을 쓰고 있다.
공연장을 무겁게 짓누르는 배경음악이 흘러나오자, 관객들도 덩달아 긴장하고 있다.
다시 장면이 전환되고.
병실에 누운 노진홍이 잠들어 있다. 꿈속에서 교복을 입은 천진난만한 오한수가 나타나 노진홍과 함께 춤을 춘다.
춤을 정말로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과 마주한 노진홍.
오한수의 투박한 춤사위에 피식 웃음 짓고 함께 춤을 추는데.
어느새 웃음을 되찾은 노진홍은 오래전에 잊었던 춤의 재미를 한껏 느낀다. 기술적 완성도 따위 필요 없다. 그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즐기면 그만이다.
다시 암전 후 무대 배경이 바뀌었다.
전 세계 발레인들의 꿈의 무대인 러시아국제발레 콩쿠르.
노진홍은 까다로운 심사위원들 앞에서 즐겁게 춤을 춘다. 춤추는 즐거움과 음악의 아름다움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게 되자, 몸이 알아서 반응한다.
그렇게 클라이막스가 찾아오고.
행복을 발산하며 춤추는 노진홍 곁으로 오한수를 포함한 연극 단원들이 모여들었다.
깃털보다 가벼운 몸짓으로 노진홍이 점프를 하자, 연극을 보던 관객들이 노진홍의 감정에 동화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뿐하게 착지한 노진홍이 관객을 향해 미소 짓자, 관객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그의 ‘비상’을 눈앞에서 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