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크리스마스트리
홍미숙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을 손에 쥐고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덧 색이 바랜 나뭇잎을 떨군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고, 화랑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옷은 두꺼워져 있었다.
“이제 제법 추워요. 겨울이 왔나 봐요.”
홍철수 사장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바깥 분위기를 살폈다.
“올해는 한결 학생 덕분에 재밌는 일이 많았어.”
“그러게요. 그 수줍음 많던 학생이 당당하고 멋진 예술가가 되다니.”
“신기하고 불가해한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즐거웠어.”
“맞아요. 어쨌든 좋았잖아요. 그럼 됐죠!”
때마침 아트화랑 문이 벌컥 열리고 김일중 사장이 거대한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아이고, 무거워라.”
홍철수 사장이 얼른 다가가 상자를 받쳐 들자, 묵중한 무게가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 사장, 이게 뭔가?”
“트리요.”
홍철수 사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트리가 뭐야?”
“형님! 크리스마스 트리요!”
홍미숙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부탁했어요. 올해는 가게에 크리스마스 장식해보려고요.”
홍철수가 본인 키보다 큰 박스를 살피며 말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챙기진 않았잖아. 그리고 이거 너무 큰 거 아니야?”
“예전과 다르죠. 아트화랑을 자주 찾는 우리 친구들이 생겼잖아요. 우리도 보답을 해야죠.”
오한결과 친구들을 떠올린 홍철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맞아. 잘했다, 미숙아.”
김일중 사장이 능숙하게 크리스마스트리를 조립하고 벽면에 세우는 동안, 홍미숙이 탕비실에서 장식품이 가득 담긴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미리 다양한 장식품을 준비해봤어요. 예쁘죠?”
상자 속에서 형형색색의 알전구를 발견한 홍철수 사장이 말했다.
“아, 전기도 연결해야 하는구나. 멀티탭이 어디 있더라…….”
홍철수 사장이 창고로 사라지자, 홍미숙이 멀뚱멀뚱 서 있는 김일중 사장에게 트리 장식을 건넸다.
“오빠도 실력 발휘 좀 해봐요.”
“나 이거 잘해. 기대해도 좋아.”
“정말요? 오빠네 집에 트리 장식한 거 못 봤는데.”
김일중 사장이 알전구를 트리에 걸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벽화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 때, 카페 인테리어도 같이 했었거든. 그때 트리 설치도 많이 했었어.”
“아……. 뭔가 애잔하네.”
“근데 이젠 다르지. 오한결 작가 덕분에 요즘 수입이 꽤 안정적이거든. 지방에서도 벽화 의뢰 많이 들어오고 있어.”
“그럼 화신벽화 사무실에도 트리 장식해봐요. 분위기가 확 달라질 거예요.”
“그럴까? 예쁘겠네. 하하.”
잠시 뒤, 트리 장식 설치가 마무리되자, 홍미숙이 한 걸음 떨어져서 말했다.
“이제 전구만 켜면 예쁘겠다. 오빠는 왜 안 오지?”
“저기 때마침 오네.”
홍철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 손에 멀티탭을 들고 나타났다.
“와, 꾸며놓으니까 진짜 예쁘네. 꼭 오늘이 크리스마스 같다.”
테이블 구석에 쭈그려 앉은 홍철수가 멀티탭 전원을 연결하자 홍미숙이 기다렸다는 듯이 멀티탭 구멍에 전구선 코드를 꽂았다. 딸깍 소리와 함께 알록달록한 전구 빛이 진한 녹색의 트리 위에서 반짝거렸다.
“와, 멋진데.”
세 사람은 멀찍이 서서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흡족한 미소로 바라봤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아트화랑에서 조촐한 파티를 할까 해요?”
홍미숙이 나직이 말하자, 홍철수와 김일중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모두 초대하자고.”
우중충한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이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에 부딪혀 녹아 없어지는 눈을 바라보며 홍미숙이 말했다.
“어머, 눈이네.”
“꽤 많이 올 거 같은데.”
“크리스마스 때도 눈이 왔으면 좋겠다.”
* * *
노을의 옥탑 작업실 마당에 함박눈이 쌓이고 있다.
오한결과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많이 쌓인 눈을 쓰레받기 등 각종 도구를 이용해 진땀을 흘리며 치우고 있었다.
오랜만에 작업실을 함께 찾은 최하늘은 사람들에게 줄 따뜻한 차를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기진맥진해진 노을이 쓰레받기를 바닥에 내던지며 짜증을 냈다.
“와!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서정익 작가가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색 하늘 아래 함박눈이 빼곡히 내리고 있었다.
“눈이 오니까 세상이 고요해졌어요. 잘 들어봐요. 눈 쌓이는 소리를.”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최무열이 손바닥을 펴고 그 위로 쌓이는 눈을 살펴봤다.
“서정익 작가님은 섬세하시네. 어디 나도 소리를 들어볼까…….”
무안해진 노을이 새침한 표정으로 변명을 했다.
“뭐…… 나도 지금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뭐랄까, 고요 속에 내리는 하얀…… 쓰레기.”
“…….”
최하늘이 따끈한 차를 쟁반에 받쳐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춥죠? 따뜻한 차 좀 드시고 하세요. 아니면 내부로 들어갈래요? 제가 난로를 피워놨거든요.”
오한결이 잽싸게 머그컵을 낚아채고 대답했다.
“오늘은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며 마실래요. 아, 따뜻해.”
잠시 말없이 눈 내리는 풍경에 심취해 있는데,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서로 곁눈질로 쳐다보며 오한결을 주목하고 있었다.
눈치챈 오한결이 물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노을이 신태진 회장과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는 몹시 긴장한 얼굴로 오한결의 눈치를 살폈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오한결이 씰룩 웃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오히려 최하늘이 몹시 놀란 표정으로 오한결에게 물었다.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는…… 정말 엄청난 프로젝트예요. 그걸 거부했다고요?”
노을이 말을 보탰다.
“언니도 잘 아는구나. 내가 개인적으로 찾아봤는데, 진짜 대단한 프로젝트였어. 명일그룹이 한국을 세계 무역의 허브로 만들려고 꽤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것 같더라고. 완공되면 수많은 국제기구도 들어올 예정이래. 그런 멋진 건물 로비를 장식할 기회를 제안한 거잖아. 솔직히 이건 다시 태어나도 잡기 힘든 기회 아니겠어?”
사실 오한결도 신태진 회장의 제안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가로 명성을 더 떨친다 해도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명일그룹의 운명이 달린 프로젝트를 맡게 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회장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순수예술을 하는 작가야. 디자이너가 아니지.”
오한결은 서정익 작가를 바라봤다. 그라면 누구보다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서정익 작가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오한결 작가님은 비겁한 거 같아요.”
당황한 오한결이 말을 더듬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단호한 표정의 서정익 작가가 오한결을 노려봤다. 평소 상대방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던 서정익 작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한결 작가님도 기회라고 인정하잖아요. 하지만 거절할 명분을 찾고 그것을 합리화하고 있어요. 저는 신태진 회장님이 제안한 대형 스크린 프로젝트가 순수예술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
“이건 오한결 작가님 개인전과 다르지 않아요.”
잠시 고민하던 오한결이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은 재벌에 종속된 작가이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그 프로젝트를 맡으면 언론은 오한결과 명일그룹을 하나로 엮어 생각할 것이라고. 그렇게 된다면 오한결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순수성이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이다.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명일그룹보다 오한결 작가님 이름이 빛날 거예요. 모두 오한결 작가님의 작품만 바라볼 것이고, 솔직히…… 명일그룹 프로젝트인지 기억도 못할 거란 말이에요.”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서정익 작가의 단호함에 놀랐지만, 오한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동의할 수 없다는 표시를 했다.
“아니. 그건 억측이야. 절대 그럴 수 없어.”
“있어요! 단, 조건이 있겠죠.”
“뭐지?”
“전 세계 그 어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작품이어야 해요.”
“!!”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오한결 작가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정익 작가가 말한 조건을 그가 충족할 수 있느냐에 대한 확신을 누가 감히 하겠는가? 오한결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실상 그런 작품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그사이 꽤 많은 눈이 내려 옥탑 작업실 마당을 가득 채웠다.
모두의 머리 위로도 수북이 눈이 쌓여 있었다.
도발에 가까운 서정익 작가의 주장에 오한결은 고민이 많았다.
오한결은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를 쳐다봤다.
‘이 친구들과 함께라면…….’
‘나를 믿고 따르는 작가들과 함께라면…….’
“노을!”
노을이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작가님.”
“최무열!”
“네! 작가님.”
“내가 프로젝트 하길 원해? 두 사람도?”
“네!”
“네!”
오한결이 서정익 작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서정익 작가는 그런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서정익 작가가 주장한 완벽한 작품에는 동의할 수 없어. 작가는 완벽을 기준으로 작업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하나는 확신해.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나와 함께한다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럼 서정익 작가 말대로, 명일그룹보다 작품에 참여한 작가들이 더 유명해지겠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최하늘이 물었다.
“그래서요? 하신다는 말씀이시죠?”
최하늘의 말에 오한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한결의 짧은 한마디에,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서로를 얼싸안고 방방 뛰었고 최하늘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비명을 내질렀다.
어깨를 으쓱한 오한결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눈부터 다시 치우자고. 치운 만큼 다시 쌓였어.”
하지만 이미 눈 치우기를 포기한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눈을 모아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무열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 전공이 조각인데, 평범한 눈사람은 안 되지. 잘 봐!”
“오, 기대돼!”
세 사람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을 때, 오한결과 최하늘은 쓰레받기를 들고 작업실과 계단 입구 사이를 열심히 치우고 있었다.
눈을 치우던 오한결이 힘겹게 허리를 펴고 말했다.
“이렇게 길을 치워 줘야 아이들이 미끄러지지 않죠.”
최하늘이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은근 츤데레 스타일이세요. 호호.”
“네? 춘 되레? 그게 뭔가요?”
“……농담이시죠?”
“…….”
민망해진 오한결이 고개를 돌리자 세 사람이 만들고 있는 눈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최무열이 거침없이 눈 뭉치를 깎아내고 있지만 그 형체는 완벽 그 자체였다. 반복 훈련을 통해 습득한 그의 조각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노을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겨울왕국 엘사잖아!”
거의 작업을 마친 최무열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 왜 이러지. 인상이 자꾸 엇나가. 닮아 보이지 않잖아.”
엘사 얼굴을 유심히 보던 노을이 말했다.
“이 정도면 훌륭해. 내가 보기엔 거의 비슷한데.”
오한결이 슬쩍 다가가 최무열 손에 들린 작업용 칼을 뺏어 들었다.
“내가 마무리해 줄게.”
조각칼을 든 오한결이 엘사의 인상에 손을 보았다. 많은 수정은 없었다. 그저 몇 번의 손놀림만으로 엘사는 더욱 엘사 같아졌고, 급기야 완벽한 엘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와! 어떻게 하셨어요? 조각도 하세요?”
오한결이 조각칼을 최무열에게 건네고, 시린 손을 주머니에 쏘옥 집어넣었다.
“살짝 어긋난 표정에 균형을 맞춘 것뿐이야.”
“아, 그래도……. 그 살짝이 사실상 고수의 영역이잖아요.”
모두 최무열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완벽한 엘사 작품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잠시 뒤 오한결이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 들어가자. 이러다가 감기 들겠어.”
오한결의 한마디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난로가 있는 작업실로 들어가려는데, 서정익 작가가 소리쳤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여기에 조명을 설치하는 거예요. 제가 이 근처 어디서 조명 파는데 봤거든요. 제가 빨리 갔다 올게요.”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아무리 빨라도 30분은 걸리지 않을까? 골목이 외진 곳이라…….”
하지만 조명 생각에 기분이 상기된 서정익 작가에게 그런 말은 들리지 않았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요. 빨리 갔다 올게요.”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는 서정익을 보며 모두 한숨을 푸욱 쉬었다.
“아…… 추워 죽겠는데…….”
오한결이 웃으며 말했다.
“서정익 작가가 우리를 위해서 저러는 거니까. 기회를 주자고.”
다행히 지독히 내리던 눈이 그쳤고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엘사 조각이 자연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