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93화 (93/202)

제93화 글로벌 무역센터

오한결이 작품을 보여 달라는 신호를 보내자,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재빨리 작품 가장자리로 발걸음을 옮기고는 서로를 향해 빙긋 웃었다. 아찔한 긴장감이 그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그들은 작품을 감싸고 있던 검은 천을 천천히 벗겨냈다.

“와-!”

“멋지다-!”

슬로우모션처럼 검은 천이 스르르 땅에 떨어지자, 베일에 싸인 작품 실체가 사람들 눈앞에서 천천히 드러나고 있었다.

‘파도’

거센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가 삼각지 화랑거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작품을 본 신태진 회장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했다.

“대단하군요! 그동안 거리에서 수많은 조각상을 봤지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은 처음 봅니다. 또 오한결 작가님이 해내셨군요.”

“이번엔 저 친구들이 해낸 겁니다.”

오한결이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어느새 저렇게 성장했는지 모르겠어요. 화랑거리 부활의 첫 시작을 저 아이들이 훌륭하게 해냈답니다.”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돌려 오한결을 바라봤다.

“화랑거리 부활이라……. 꽤 흥미로운 말이군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오한결 작가님!”

작품을 구경 갔던 이상민 장관이 기자들을 대거 이끌고 다시 나타났다. 비즈니스용 미소를 장착한 이상민 장관이 오한결 곁에 서서 환하게 웃었다.

“인물이 훤칠한 작가님 옆에 서니, 제가 오징어가 되는군요. 하하.”

“하하하.”

기자들이 박장대소하자, 살짝 삐진 이상민 장관이 말을 이었다.

“잘 찍어주세요. 여러분들만 믿습니다.”

찰칵. 찰칵. 찰칵.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메라 플래시가 무자비하게 터졌다.

“문명일보 기자입니다. 작품에 관해 한마디 해주시겠습니까?”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밀자, 오한결이 노을과 최하늘, 서정익 작가를 불렀다.

“여기 세 사람이 만든 작품입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제가 아닙니다.”

반신반의하던 어떤 기자가 수줍게 서 있는 세 사람을 유심히 관찰했다. 잠시 뒤 뭔가를 깨닫고 소리를 질렀다.

“어! 거기 맨 오른쪽에 계신 분……. 서정익 작가님 아닙니까?”

서정익 작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문명일보 기자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말이 되는군요. 무명작가의 솜씨로 보기에 너무 훌륭했는데 서정익 작가가 있었군요.”

아직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무섭고 두려운 서정익 작가는 심호흡을 하고 대답했다.

“그게……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여기 노을, 최무열 두 작가님과 함께 만든 작품입니다. 음…… 그러니까, 우리 세 사람은 각자 맡은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으며……. 뭐랄까…… 사실, 두 사람의 역할이 더 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영광은 반드시 세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져야 합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노을과 최무열에게 향했다.

번쩍. 번쩍.

갑자기 이목이 쏠리자 노을과 최무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그레해졌다. 오한결이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너희들이 해낸 거잖아. 좀 더 당당해도 돼.”

그 말에 노을과 최무열은 잠깐 서로 눈을 바라보더니 살짝 미소 짓고는 바로 자세를 고쳤다. 어깨를 펴고 가슴을 내민 그들의 모습은 오늘 행사의 주인공다웠다.

문명일보 기자가 마이크를 내밀며 물었다.

“그럼, 누가 작품 설명을 해줄 건가요?”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잠시 대화하더니, 최무열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이론을 잘 아는 최무열이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최무열이 손으로 파도를 그리며 말했다.

“이렇게 유연한 곡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도의 모습. 그게 바로 삼각지 화랑거리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기자가 손을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네요. 왜 파도가 삼각지 화랑거리를 상징하는지. 음…… 솔직히 말할게요. 저는 파도 작품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삼각지 화랑거리 같이 조용하고 정적인 곳에 역동적인 작품이라니요. 사전 조사가 미흡한 것 같네요.”

“내가 설명해 보겠소!”

결연한 표정의 홍철수 사장이 불쑥 손을 들었다. 기자들의 시선이 홍철수 사장에게 쏠리자 그의 표정은 더욱 단단해졌다.

“모르면 안 보이는 법이죠. 삼각지 화랑거리의 역사를 알면 이 작품이 제대로 보일 겁니다. 제가 도와드리지요.”

질문한 기자를 노려보며 화랑 사장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40년을 이곳에서 장사를 했어요. 화랑거리 역사의 산증인이지. 저 파도 작품을 보는 순간 눈물이 멈추지 않더군요. 그만큼 화랑거리의 본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에요.”

“나도 한마디 하겠어요!”

화랑 사장들은 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전혀 떨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삼각지 화랑거리 전성기와 세월 앞에 사그라진 명성에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오한결이 자신들의 마음을 헤아려 완성한 별의 그림 <그리움, 다시 시작>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화랑 거리 사장들의 말을 받아 적었다. 몇몇 기자들은 가장 빨리 특집 기사를 내보내고 싶은 마음에 그 자리에서 기사 초안을 완성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오한결이 신태진 회장과 이상민 장관에게 말을 걸었다.

“두 분 덕분에 오늘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게 됐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이상민 장관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왜 오한결 작가가 장관님을 초대했는지 알 것 같군요. 홍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된 것 같습니다.”

칭찬을 들은 이상민 장관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하하.”

신태진 회장은 웃고 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맹목적인 호의는 상대방의 발목을 잡는 위험한 덫이 될 것이다.

아무리 오한결이라 하더라도, 이상민 장관의 노골적인 덫에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오한결 작가의 표정은 사뭇 평온하기만 하다.

마치 모든 걸 초월한 사람처럼…….

* * *

명일그룹 본사 엘리베이터 안.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초조한 듯 서로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최무열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회장님이 왜 초대한 거지? 우리가 뭘 잘못했지……?”

“무슨 엉뚱한 소리야! 난 당당한데!”

노을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최무열을 노려보자, 서정익 작가가 중재에 나섰다.

“내가 볼 땐 느낌이 좋아요. 기다려 봐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양승호 비서가 반듯한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신태진 회장이 반갑게 맞아줬다.

“손님들이 오셨군요. 양 비서, 따뜻한 차 좀 부탁해요.”

세 사람은 화려한 회장실 분위기에 압도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미술품과 고가의 장식물이 눈에 들어오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황홀함을 느꼈다.

잠시 뒤, 세 사람은 클림트의 <키스> 애니메이션 앞에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노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아름다워요.”

어느덧 신태진 회장도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씁쓸해 보였다.

“그런가요. 오한결 작가의 반응은 시큰둥했죠. 원작과 다른 느낌이라나…….”

두 남녀의 키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노을이 대답했다.

“원작이 뭐가 중요해요. 이 그림은 사랑을 아는 사람이 그렸어요. 그 마음이 온전히 느껴지거든요. 클림트가 살아온다면 이 그림에서 진정한 사랑을 느꼈을 거예요.”

노을의 말에 자신감을 되찾은 신태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아요! 원작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림을 재현한 제작자의 의도가 더 중요한 거겠죠. 사랑! 정확해요!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무척 영광이군요.”

두 사람의 대화에 최무열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뭐지 두 사람……. 무슨 연극 찍나?”

최무열의 말을 들은 서정익 작가가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쉬-!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기분이 무척 좋아진 신태진 회장이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제 화랑거리 ‘파도’ 작품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오한결 작가 친구들이라 그런지 실력이 꽤 좋더군요. 화랑거리의 과거와 미래를 대변해주는 멋진 작품이었어요.”

최무열이 무척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

“부족한 실력을 알아봐 주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노을이 눈을 흘기며 최무열을 바라봤다.

“오한결 작가님 얘기 못 들었어? 우린 자부심을 가져도 돼.”

서정익 작가도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요. 애써 우리를 낮출 필요 없어요.”

“하하하.”

세 사람의 대화를 듣던 신태진 회장이 크게 웃자, 모두 얼음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분위기를 파악한 신태진 회장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든 작가를 매우 존경한답니다. 어제 존경할 수 있는 작가가 세 명 늘어났고요.”

기쁨의 눈빛을 주고받는 세 사람을 바라보던 신태진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부탁 하나 할까 합니다.”

신태진 회장이 양승호 비서를 호출하자, 양 비서가 커다란 파일철을 가져왔다.

긴장한 표정의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천천히 서류를 넘겨봤다.

“이게 뭔가요? 건물 사진인데요.”

노을이 사진이 인쇄된 종이를 들이밀며 물었다.

도넛 모양의 거대한 건물. 메탈 소재로 외관을 둘러 그 특색을 더했다. 다소 주변 풍경과 이질적으로 보일 만큼 몹시 개성 넘치는 건물 외관이었다.

양승호 비서가 반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명일그룹에서 새로 지은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 건물입니다. 현존하는 전 세계 무역 센터 중 최대 규모이며, 앞으로 각국의 정상 회담과 국제적 이슈를 다루는 주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신태진 회장이 말을 더했다.

“‘명일 글로벌 무역센터’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를 하나로 엮는 허브가 될 것입니다.”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침을 꿀꺽 삼키며 건물 사진을 바라봤다. 이제 명일그룹은 세계정세를 이끄는 주역으로 활동할 모양이구나. 신태진 회장의 얼굴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근데 왜 자신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 설마?

“눈치챘나요? 하하하. 여러분께 무역센터 로비 디자인을 맡길까 합니다.”

“으악!!”

몹시 놀란 노을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아니……. 왜요? 별로인가요?”

“못해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해요!”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신태진 회장이 양 비서에게 추가 설명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무역센터 로비 디자인은 미디어아트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로비 삼면을 거대한 스크린으로 둘러싸고 고화질 영상을 출력하여 방문객들에게 기분 좋은 ‘충격’을 주고자 합니다. 스크린 크기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할 겁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뭐든지 세계 최초라는 수식이 붙을 것입니다.”

말을 아끼던 서정익 작가가 말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제 ‘파도’ 작품을 보고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명일그룹에서 지은 무역센터지만, 세계적인 명소가 될 건물 아닙니까. 근데 정말로 저희가 세계적인 건물 로비 디자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명일그룹이 그렇게 무모하다고 생각지 않는데요.”

“역시 서정익 작가님은 예리하시군요. 좋아요. 솔직하게 말하죠.”

신태진 회장이 자리를 고쳐 앉고는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오한결 작가가 개인전에서 선보인 우주 시리즈를 보고 영감을 얻었습니다. 스크린으로 전면을 감싼 전시장에서 우주 영상이 나오는데, 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무척 섬세한 그림과 연출로 압도적인 가상현실을 구현한 거죠. 저는 아직도 가끔 꿈을 꾸면 그때의 그 반짝이는 우주의 별을 보곤 합니다.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 한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됐죠. 그래서 그때의 그 황홀한 가상현실을 이번에 무역센터 건물에 적용하고자 욕심을 부려봤습니다.”

“……그건, 오한결 작가님 작품이었어요. 우리는 단지 보조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도 오한결 작가님과 함께 하시면 됩니다.”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을까? 오한결 작가라면 그게 무엇이든 완벽하게 프로젝트를 해낼 것이다. 벌써부터 밤새 작업할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노을이 매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와!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하다니. 꿈만 같아. 무열아, 이거 보이지? 지금 손 떨리는 거?”

“누나! 난 눈물 날 것 같아.”

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서정익 작가도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을 받았다.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오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지금 이 모든 게 꿈이라고 말해도 선뜻 반박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한결 작가가 프로젝트를 거절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설득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해줄 수 있겠죠?”

회장의 말에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머리를 망치로 거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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