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치킨과 맥주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되셨군요. 아니지, 이제 세계적인 작가인가요?”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가 오한결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빠른가요? 속도 조절 좀 할까요?”
오한결의 여유로운 대답에 박수호 기자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이제는 그 말이 진심으로 들리는군요.”
“사실을 말한 거니까요. 전 한 번도 농담한 적이 없어요.”
오한결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가 박수호 기자를 얼어붙게 했다. 그간 오한결의 심상찮은 예술적 행보만 봐도 그 말이 증명된 셈이니까.
국내 제일 예술잡지 기자로 십수 년을 일하면서 수많은 유명 예술가를 만나왔지만, 오한결처럼 완전무결한 예술가는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오한결 작가를 천재로 인정한 것이.
오한결의 예술적 성공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자라면 당연히 그랬겠지, 라고 생각해버리기 시작한 게 도대체 언제부터였던 걸까?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고 박수호 기자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미리 보내드린 질문지는 읽어보셨나요?”
“그럼요. 인상 깊은 질문이 있던데요.”
호기심을 느낀 박수호 기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요? 어떤 거였죠?”
“초특급 신인 작가의 삶이란 어떤 건가요? 라는 질문이요.”
“하하하. 초특급이라는 단어는 제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겁니다. 작가님은 유명세를 엄청 빨리 얻었잖아요. 당연히 많은 변화가 있었겠죠?”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경제적인 안정으로 가족과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거든요. 아, 소중한 친구들을 잊을 뻔했군요.”
박수호 기자가 탐탁스럽지 않은 답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전부인가요? 그 정도 재능이면 온종일 작품 생각만 하실 거 같은데……. 경제적 안정과 가족 행복을 작품보다 먼저 말씀하시는군요.”
“제가 이번 생에서 추구한 게 바로 그거니까요. 그렇다고 예술이 삶의 부차적 목표는 아닙니다. 재능을 소유한 자는 따라야 할 의무가 있죠. 세상 사람들에게 예술이 뭔지 보여줘야 하는 의무라고 할까요.”
“의무라……. 구체적으로 무슨?”
오한결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EBC 방송에 출연합니다.”
“아! 예술 교육에 뜻이 있는 거군요. 그림 해설? 아니면 토론?”
“아니요. 작품을 직접 시연합니다. 아시죠? ‘밥 아저씨의 그림을 그립시다’. 비슷한 방송 포맷으로 할 거예요.”
허리를 반듯이 편 박수호 기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참 쉽죠?’ 그거요?”
“네.”
“와우!! 언제 방송됩니까?”
“다음 주 주말에요. 생방송으로.”
“생방송!!”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느끼며 박수호 기자가 오한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할 이벤트를 준비했구나. 공중파 방송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실력을 온 세상에 증명하려고 하는구나!
흥분한 박수호 기자를 보며 오한결은 크게 하품하며 말했다.
“모든 사람이 저를 욕을 해도, 기자님은 그러지 마세요.”
“네? 그게 무슨…….”
“방송 후 사람들의 온갖 비난이 예상되거든요.”
“농담이시죠?”
“아뇨. 지금까지 제가 농담한 적 있나요?”
“아니요……. 이런!! 뭔가가 있군요.”
호기심이 가득한 기자의 질문에 오한결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 * *
반짝이는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그 아래 푸른 별빛을 담은 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제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한강 공원 주변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돗자리를 펴놓고 치킨과 맥주를 먹고 있었다.
닭 다리를 한 손에 쥔 오한결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너무 춥잖아요! 이런 날씨에 왜 야외에서 치맥을 하자고…….”
비장한 표정의 이상민 장관이 꿀꺽꿀꺽 맥주를 들이켜고 대답했다.
“그래요? 저는 괜찮은데. 작가님은 추우시군요! 다른 직장인들처럼 퇴근 후 치맥을 하고 싶어 부른 건데…….”
오돌오돌 떨고 있는 이상민 장관을 보며 오한결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 엄청 추워 보이시는데요……. 그리고 저는 프리랜서라 출퇴근이 없어요.”
“아…….”
이를 악문 이상민 장관이 마음속으로 문한국 보좌관에게 쌍욕을 하고 있었다.
문 보좌관, 이 자식을 그냥!
문 보좌관은 젊은 작가와 친해지는 방법으로 퇴근 후 한강공원에서의 치맥을 추천했다. SNS에서 퇴근 후 워라밸로 ‘한강 공원 치맥 인증’이 유행이라면서……. 근데, 그거…… 최근 자료는 맞는 걸까?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오한결 작가는 퇴근하지 않는 프리랜서였고 날씨도 체감상 마이너스에 이를 정도로 매서웠다. 차가운 맥주를 잡은 손이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 다리를 뜯으며 오한결이 물었다.
“요즘 명일그룹하고 대립각을 세운다는 소문이 있던데, 뒷감당 되겠어요?”
푸-!
이상민 장관의 입에서 닭고기 파편이 무자비하게 튀어나왔다.
“너무 적나라한 질문 아닙니까?”
“궁금하니까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이상민 장관이 대답했다.
“위험하죠. 하지만 오한결 작가님과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하하. 그런 의미로 다음 달에 열리는 국제 문화융성 세미나가 있는데, 저와 함께 참석하시겠습니까?”
“역시 부탁의 달인이시군요.”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하하.”
“이번에도 기자들이 많이 오나요?”
“그럼요. 기회는 잡아야죠.”
닭 다리 하나를 깨끗이 발라 먹은 오한결이 말했다.
“그럼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세요. 내일 삼각지 화랑거리에 조각상을 공개할 겁니다. 장관님이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겠어요?”
이상민 장관의 눈이 커졌다. 오한결의 부탁이다. 조건 해야 한다!
“물론이죠!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오한결 작가님의 작품인가요?”
“아니요. 제가 아끼는 동생들이 만들었습니다.”
“좋습니다! 무조건 스케줄 비우고 달려가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오한결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다음 주에 사고를 치려고 합니다. 그때도 저를 지지해 주신다면 우리의 우정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볼게요.”
이상민 장관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사고요?”
“네. 대형사고요.”
시름이 깊어진 이상민 장관이 고개를 돌려 오한결의 바라봤다. 무표정한 오한결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볼 뿐, 더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 * *
오후 2시에 가까워지자 한산했던 삼각지 화랑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트화랑에 모여 수다를 떨던 화랑 사장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밖으로 나왔고, 밤새워서 작품을 설치한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퀭한 얼굴로 작품 주변에 구경꾼들이 오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작품을 저렇게 꽁꽁 싸매놓으니까, 더 궁금하네.”
“우리끼리 조촐하게 하는 행사인데, 너무 신비주의 컨셉 아닌가?”
화랑 사장들의 쑥덕거림에 홍철수 사장이 반박했다.
“오한결 작가가 행사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했네. 좀 더 기다려 보게.”
홍미숙이 오빠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이미 SNS에 오늘 행사 소식이 퍼졌더라고요. 제발 많이 와야 할 텐데.”
대략 30분이 지나자,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내리더니 삼각지 화랑거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사람들을 발견한 홍미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저기 봐요. 내 말이 맞죠!”
감동의 눈빛을 발산하던 화랑 사장이 말했다.
“미숙 씨 말이 맞네그려. 최근 화랑 거리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나 싶어. 아, 눈물 나…….”
때마침 화랑거리 골목에서 오한결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휴대폰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화랑 사장들 옆으로 다가선 오한결이 히죽 웃었다.
“제가 인기가 좀 많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홍철수와 화랑 사장들은 오한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정!
오한결이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곧 행사를 시작할 시간이군요.”
화랑 거리에 가득 찬 사람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홍철수 사장이 말했다.
“지금 해도 되지 않을까? 올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은데.”
“아니죠. 이번 행사를 빛낼 VIP들이 안 왔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이미 사람들이 많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인파가 삼각지 화랑거리를 가득 채웠다. 이미 도로까지 점거한 구경꾼들로 인해 출동한 경찰관들이 화랑거리 일대 거리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서로 엉겨 붙어 낑낑대던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누군가를 위해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움직임을 감지한 홍미숙이 발끝으로 서서 고개를 빼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왔나?”
이 시간을 기다린 오한결이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태진 회장님이 왔나 보군요.”
사람들은 주요 경제 뉴스에서나 봤던 대기업 회장이 등장하자, 너무 신기하고 놀란 나머지 신태진 회장 주변으로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신태진 회장이 가까이 다가오자, 오한결이 짓궂게 말했다.
“사람들이 회장님을 별로 안 좋아하나 봅니다.”
“하하하. 늙은이에 대한 배려겠지요.”
오한결이 명일그룹 회장을 상대로 격 없이 대화하자, 화랑 사장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봤다.
신태진 회장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검은 천으로 가린 작품을 바라봤다.
“저거군요. 작품이 몹시 궁금합니다.”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한 오한결이 대답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추위로 코끝이 벌게진 신태진 회장이 물었다.
“누가 오나요?”
오한결이 대답하려는 순간,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경찰로 인해 통제된 도로를 가로질러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놀란 신태진 회장이 말을 더듬었다.
“저 사람……. 아니 저놈은?”
“맞아요. 이상민 장관.”
무리 중 가장 앞서 걷던 이상민 장관이 오한결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 뒤를 따르던 20명이 넘는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이상민 장관이 오한결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자, 장관의 전담 사진 기자가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사진기를 들이대며 말했다.
“오예! 장관님 포즈 아주 좋습니다. 작가님도…… 좀 웃으세요. 스마일.”
찰칵. 찰칵. 찰칵.
그 모습이 꼴사납다고 생각한 신태진 회장은 심술 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무척 감동한 홍철수 사장이 오한결에게 속삭였다.
“높으신 양반들이 이렇게 와주니까 이번 행사는 대성공하겠어! 세상에 저렇게 많은 기자들이 우리 화랑거리를 찍고 있잖아.”
오한결이 이상민 장관을 곁에 두려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현직 장관이 갖는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 그리고 최근 언론을 통해 자신을 홍보하기 시작한 이상민 장관이라면 분명 수많은 기자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글로벌 기업을 경영하는 신태진 회장은 막대한 돈과 권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 언론 노출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상민 장관이 오한결 옆에 나란히 서서 미공개 작품을 바라봤다.
카메라 기자는 내일 뉴스 메인에 걸릴 멋진 사진을 건지기 위해 두 사람을 상대로 수십 번 셔터를 눌러댔다.
찰칵, 찰칵. 찰칵!
때가 됐음을 확신한 오한결이 노을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작품 공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