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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91화 (91/202)

제91화 파도

오한결이 골목길에 접어들자, 노을이 건물 옥탑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한결 작가님! 빨리 오세요!”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을 공개하는 날이었다. 그동안 오한결이 수차례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으나, 세 사람은 자신들이 직접 마무리 짓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었다.

오한결은 걱정보단 작품이 무척 기대되었다. 노을과 최무열의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서정익 작가의 예술적 판단이 더해지면 분명 수준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옥탑 작업실에 도착하자, 노을과 최무열이 오한결을 격하게 반겼다.

두 사람 눈 밑에 짙게 깔린 다크써클에 오한결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밤을 새운 건 아니지?”

“어? 어떻게 알았어요? 멀쩡한 척 노력 중인데. 하하.”

오한결이 손가락으로 두 사람의 충혈된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나, 피곤하다고!”

나머지 한 명이 보이지 않자, 오한결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서정익 작가는?”

“작업실에 있어요. 우리도 자리 옮길까요?”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작품 형체가 보였다. 서정익 작가는 그 앞에 쭈그려 앉고는 조심스레 작품 하단을 손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서정익 작가가 뒤돌아보았다.

“오셨네요. 오 분만 늦게 오시지. 뭐, 다 끝나긴 했어요.”

오한결은 서정익 작가에게 반갑다고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작품을 자세히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긴장된 마음에 서로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검은 천이 보여주는 형상은 가시 돋친 거대한 동물 같았다.

두툼한 몸통과 그 위로 뾰족한 가시 같은 형체가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단에 전기 배선이 늘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조명을 설치한 듯 보였다.

오한결이 팔짱을 끼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왜 작품을 천으로 가린 거지? 뭐, 서프라이즈인 건가?”

오한결이 혼란스러워하자, 노을은 이런 상황이 재밌는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오예, 이제 다음 단계! 무열아 불 꺼라!”

탈칵!

스위치 소리가 들리고 작업실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묵직한 어둠이 작업실을 가득 채우자, 서정익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갑니다!”

기합 소리와 함께, 서정익 작가가 천을 훌러덩 벗겨냈다. 드디어 비밀에 싸인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춤을 추듯 일렁이는 거대한 파도의 형상에 오한결이 눈을 떼지 못하고 소리쳤다.

“파도잖아!”

오한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작품을 유심히 관찰했다.

철썩철썩. 파도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거센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의 형상이 작업실 한가운데에서 그 생동감을 발하고 있었다. 작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한결은 마치 바닷가에 홀로 서 있는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압도적 묘사력을 자랑하는 작품이었다.

시각적 자극에도 불구하고 파도 소리가 귓가에 스며드는 것 같았고 멀리서 갈매기 울음소리까지 들렸다. 심지어 짠 바다 내음이 느껴져 이미 입속엔 침이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정적인 파도의 형상에서 이런 역동성을 만들어 내다니…….

그건 소재의 기가 막힌 활용 덕분일 것이다.

타이어를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작품에 이어 붙였다. 그 조각 하나하나는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작품 표면에 생동감을 부여했고 조각들이 모인 날카로운 덩어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물결의 역동적 파도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화룡점정은 조명이었다.

서정익 작가는 다양한 조명을 활용해 작품에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 냈다. 형형색색 조명의 변화무쌍한 모습은 바다가 바람을 만나 쉼 없이 파도를 만들어 내는 자연 모습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함이 바로 이 작품 안에 담겨 있었다.

오한결은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말했다.

“훌륭해. 아주 마음에 들어.”

그 말을 듣고서야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노을이 땀이 흥건한 자신의 손을 옷에 문대며 말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다행히 의견 일치가 잘 돼서 크게 싸우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기 싸움은 있었죠. 호호.”

오한결이 긴장이 풀린 노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런 완벽한 작업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겠지. 그나저나 나는 작품 설명을 듣고 싶은데. 누가 해줄래?”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노을을 바라봤다.

“누나가 해. 우리 리더잖아.”

“어머, 내가……? 어떻게 그래……. 두 사람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잖아…….”

서정익 작가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작품만큼은 노을 씨가 리더 맞아요. 모든 과정을 조정하고 이끌었잖아요. 그리고 누구보다 작품에 애정도 넘치고요.”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눈시울을 붉힌 노을이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자신보다 배경이 좋은 두 예술가 사이에서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할 땐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결과적으로 작품도 훌륭하게 잘 나왔다. 그런 그녀의 노력을 인정해주는 서정익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내가 해볼게.”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는 최선을 다한 노을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노을은 두 사람의 응원의 눈빛을 의식하며 말을 이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우선시 한 건 ‘지역적 특성’이었어요. 더불어 작품의 공공성과 사회적 가치도 염두에 뒀고요. 또한, 삼각지 화랑거리가 갖는 역사성에도 주목했죠. 지역이 갖는 과거 예술적 영광과 예술에 대한 순수성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추상적 형태가 필요했고 고민 끝에 ‘파도 형상’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화랑거리의 역사성과 문화적 상징성을 파도로 표현했다는 거군.”

“맞아요. 그리고 파도는 바다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무한정 생성되잖아요. 저희는 과거와 현재도 파도처럼 연속성을 갖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하는 요소로 파도를 생각했고요.”

논리적으로 작품을 설명하는 노을에 오한결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리고?”

“그리고 조명으로 확장성을 줬어요. 지중해의 맑고 푸른 바다에서 생성된 파도도 있지만, 한없이 깊고 검은 바다를 배경으로 일렁이는 파도도 있죠. 조명은 세상의 다양한 파도의 형상을 만들어주고 있어요. 마치 옷을 갈아입듯이요.”

작품 설명 후 잠시 머뭇거리던 노을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저는 정말로 한 게 없어요. 조각을 전공한 무열이가 파도의 형상을 멋지게 만들었고, 조명 예술에 일가견 있는 서정익 자가가 작품에 예술성을 더했어요. 저는…… 두 사람이 하는 작업에 붙어서 보조했을 뿐이에요.”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죠. 무열 씨와 저는 각자의 역할을 했을 뿐이에요, 무엇보다 조각과 조명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절묘하게 어울리게끔 노을 씨가 조정을 잘 해줬기 때문에 작품이 완성될 수 있었어요. 노을 씨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이었다고 봐요. 지휘자의 능력에 따라 음악 수준이 달라지잖아요. 우리는 노을 씨가 훌륭한 지휘자였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서정익 작가의 따뜻한 위로에 노을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줬다.

오한결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저 세 사람은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서로에게 의지했겠는가? 공공미술에 경험이 없던 초보 예술가들이 삼각지 화랑거리의 대표작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수 없는 도전과 뒤따르는 깊은 좌절을 이겨내고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오한결은 작품에 만족했다.

삼각지 화랑거리 부흥의 첫 작품을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아주 멋지게 만들어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모두 수고했어. 완벽해서 내가 손 볼 데가 없네!”

오한결의 그 한마디에,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배고프겠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치킨이요!”

오한결이 서정익 작가를 쳐다봤다.

“치킨? 왜 좀 더 비싼 거 먹지?”

노을이 서정익 작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정익 작가님은 야식으로 먹은 치킨을 잊지 못하나 봐요. 이제야 치킨의 진정한 맛을 알게 됐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치느님을 모르고 살 수도 있나……?”

쑥스러운 듯 서정익 작가가 머리를 긁적였다.

“……난 친구가 없었으니까. 혼자 먹으면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안 먹었지 뭐.”

코끝이 찡해진 노을이 말했다.

“……어서 치킨 먹으러 가시죠.”

* * *

경기도 외곽.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 아래 오한결 가족이 텐트 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어느덧 캠핑에 익숙해진 그들은 말없이 각자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했다.

캠핑 의자에 힘없이 앉은 동생을 발견한 오한결이 시원한 캔맥주를 건네며 말했다.

“피곤한가 보네. 공연 준비는 잘 돼가?”

그 말에 뭔가가 생각난 동생이 눈을 번쩍 뜨고는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공연 팸플릿!”

“공연 날짜가 잡혔구나. 어디 보자.”

공연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비상(飛上)」

「연내대학교 연극동아리 ‘놀자’의 발레 창작 뮤지컬」

「안무가 노진홍 발레리노」

「공연장소 대학로 ‘플라워소극장’」

팸플릿에 실린 단원들의 사진을 보던 오한결에게 동생이 물었다.

“형은 무슨 마법사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했기에 진홍이 안무 스타일이 확 바뀌었지?”

이제야 동생의 질문을 이해한 오한결이 피식 웃었다.

“그래? 마음에 들어?”

“물론! 공연 얼마 안 남기고 안무가 바뀌어서 좀 그랬지만. 그래도 단원들 모두 새로운 안무를 마음에 들어 해. 그래서 군말 없이 다시 연습했지. 헤헤.”

“내 마법이 통했나 보네.”

“뭐야! 잘난 척은. 칫.”

동생이 주머니를 더 뒤지더니, 여러 장의 공연 티켓을 내밀었다.

“형 친구들도 초대해줘.”

“초대장은 됐어. 티켓 구매할게. 공짜 티켓은 네 친구들한테 사용해라.”

잠시 고민하던 동생이 티켓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고 미소지었다.

“그럼 그럴까? 하하하.”

아버지가 보글보글 끓는 찌개 냄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내가 된장찌개 끓였는데, 기가 막히게 잘 됐다. 하하.”

동생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투정 부렸다.

“난 된장찌개 싫은데. 김치찌개로 하라니까!”

“이놈아. 네가 어린애야? 내가 네 나이 때 장가를 갔어. 이놈아.”

“아니던데. 아빠 20대 후반에 갔잖아. 나는 이제 갓 21살인데.”

“…….”

대화를 엿듣던 어머니가 빵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기를 치려면 그럴듯하게 쳐야지. 그리고 요즘 그런 말 하면 ‘꼰대’소리 들어요. 조심 또 조심!”

오한결이 동생을 쳐다봤다.

“식사 차리는 것 좀 도와. 피곤한 건 알겠는데. 여기선 일 안 하면 밥 안 준다.”

동생이 의자 밑에 숨겨놓은 접시를 꺼내고 소리쳤다.

“짜잔! 형이 스크린 설치한다고 자리 비웠을 때, 잔뜩 구워놨지. 어때? 먹고 싶지?”

“오! 역시 고기 마니아. 언제 이런걸?”

어머니가 동생 손에서 접시를 낚아채더니 잔소리를 했다.

“고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니? 채소를 많이 먹어야 건강하지. 오늘은 된장찌개 위주로 먹어라.”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냅둬. 돌도 씹어 먹을 나인데. 고기도 먹어야지.”

“적당히 먹어야죠! 이렇게 먹었다가는 당신처럼 뱃살만 불룩 튀어나온다고요.”

아버지가 톡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건 등산을 안 해서 생긴 거라니까. 이제 슬슬 산에 갈 준비를 해야지.”

“그놈의 등산……. 에휴. 못 말려. 그 위험한 운동을 도대체 왜 하는 건지.”

아버지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다시는 혼자 안 갈 테니까. 우리 장성한 두 아들이랑 주말에 산에 오르면 돼.”

그 말에 오한결과 오한수가 동시에 외쳤다.

“아버지! 그건 좀!”

“아빠!!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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