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90화 (90/202)

제90화 얼음 마녀

“하늘 씨, 내년도 공연, 전시 일정 정리한 거 가지고 있어?”

이나영 팀장이 ‘특별 전시’ 기획 보고서를 심드렁하게 넘기며 물었다.

“팀장님, 일정은 보고서 마지막에 첨부로 붙여 놨어요.”

“오케이. 확인할게!”

띠리링. 띠리링.

조용한 사무실에 전화 소리가 연신 울려댔지만, 일에 치인 최하늘은 도통 전화를 받을 짬이 나지 않았다. 이나영 팀장이 빼꼼 고개를 빼 들고 상황을 파악하더니 말했다.

“하늘 씨, 내가 받을게!”

“감사합니다!”

“네, 명일문화재단 이나영 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화체육관광부 이상민 장관님 보좌관 문한국이라고 합니다.]

문체부라는 말에 이나영 팀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늘 장관님께서 문화재단을 방문하려고 하는데요. 신수진 이사장님 계신가요?]

“아……. 이사장님 지금 안 계신데요. 일정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때마침 신수진 이사장이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사무실 앞을 지나갔다. 그걸 포착한 이나영 팀장이 재빨리 일어섰다.

“잠시만요!”

이나영 팀장이 전화기 보류 버튼을 누르고 재빨리 신수진 이사장을 향해 달려갔다.

“이사장님! 잠시만요!”

신수진 이사장이 걸음을 멈추고 이나영 팀장을 빤히 쳐다봤다.

“무슨 일이죠? 팀장님.”

“문체부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오늘 장관님이 직접 문화재단에 방문하겠다고 하네요.”

때마침 아버지를 통해 장관의 계획을 알게 된 신수진 이사장은 내심 그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신수진 이사장이 유쾌하게 말했다.

“오라고 하세요. 오늘 특별한 일정은 없으니까요.”

“넵!”

꾸벅 고개를 숙인 이나영 팀장이 자리로 돌아와 수화기를 들었다.

“오늘 방문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네, 감사합니다. 이따 오후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나영 팀장이 찜찜한 기분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10년이 넘는 근무 기간 동안 문체부에서 직접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최하늘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물었다.

“문체부 장관이 왜 오는 거죠? 필요하면 공문 보내면 될 텐데.”

“그러게. 이례적이네. 보통은 이사장님을 청사로 부를 텐데, 직접 오시다니. 설마…….”

“왜요……?

최하늘이 불안한 표정으로 이나영 팀장을 바라보자, 팀장이 뭔가 알아낸 듯한 얼굴로 말했다.

“최근 정부에서 예술 위탁 사업 많이 하던데. 그거 때문에 그런가? 헉! 그래, 그거네!”

최하늘이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뭉치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안 돼요. 지금도 업무 과부하예요. 더는…….”

“어쩌겠어. 직장인의 슬픈 운명이지. 최하늘 씨 업무 엄청 많아지겠다. 어떡해?”

“네? 저만요?”

순간 자신에게도 일이 몰아칠 것을 예감한 이나영 팀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엄청 바쁜 척하며 보고서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몇 시간 뒤.

문화재단 건물 앞에 이상민 장관과 문한국 보좌관이 도착했다.

이상민 장관이 문화재단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이야, 명일그룹 산하 기관이라 그런지, 건물도 으리으리하구먼.”

“다른 문화재단과 비교할 수가 없죠. 재정이 넘쳐 흐르니까요. 한국 문화산업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오한결 작가를 발굴한 곳이기도 하고.”

“네, 얼핏 전속 작가처럼 보이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어떠한 계약 관계에 묶여 있지 않더라고요. 협력 관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상민 장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한결 작가가 불러오는 모든 영광을 문화재단이 독식하게 놔둘 순 없지. 오늘 그걸 알려줘야겠어.”

* * *

이상민 장관이 문화재단 로비에 들어가자, 신수진 이사장과 직원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장관님.”

“아이고, 신수진 이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일전에 문화 행사에서 잠깐 뵌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론 인연이 없었네요.”

이상민 장관이 내민 손을 잡고 신수진 이사장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장관님.”

이상민 장관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래요. 어쩌면 제가 그걸 기다렸는지도 모르죠. 기다리다 지쳐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무려 두 시간이 넘게 걸리더군요. 이놈의 교통 체증. 참 성가시죠.”

이상민 장관의 가시 돋친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신수진 이사장이 악수하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이런, 그랬군요. 전임 장관님들은 많이 바쁘셔서 이상민 장관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제가 오해를 했군요.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끄응-!

순간 불쾌한 표정을 짓는 이상민 장관을 향해 문한국 보좌관이 자신의 입을 손가락으로 찢으며 웃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스마일!

기 싸움에서 밀린 이상민 장관이 이번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사무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한결 작가가 문화재단에 자주 온다고 하던데. 설마 오한결 작가 책상도 있는 건가요? 가끔 작가를 직원처럼 이용하는 곳이 있더라고요.”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이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이나영 팀장이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장관님. 그럴 리가요. 여긴 직원들 책상만 있습니다.”

“아이구,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한 말입니다. 워낙 문화재단이 오한결 작가를 각별히 생각하니까요.”

신수진 이사장이 보란 듯이 이나영 팀장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아하! 우리가 놓친 게 있었네요. 오늘 중으로 오한결 작가한테 연락해서 필요하면 책상 하나 마련해준다고 하세요. 워낙 자주 오니까, 그 정도 대접은 해줘야겠죠.”

순간, 신수진 이사장과 이상민 장관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주변을 감싸는 차가운 냉기에 모두 닭살이 돋았으나,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장관님, 이사장실로 가실까요?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싶네요.”

“그럽시다. 이사장님.”

두 사람이 사라지자, 이나영 팀장은 한숨을 푹 쉬며 한탄했다.

“우씨. 숨 막혀 죽는 줄. 장관님이 맺힌 게 있나 보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아……. 계속 모르고 싶다.”

최하늘이 몰래 휴대폰을 꺼내 방금 있었던 일을 오한결에게 문자로 보냈다.

「오한결: 이상민 장관 너무 귀엽네요.」

「최하늘: 네? 제가 상황을 설명했잖아요. 심상치 않아요.」

「오한결: 냅둬요. 이상민 장관이 얼음 마녀 상대로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내기할래요? 장관 vs 얼음 마녀?」

최하늘은 오한결의 이런 태도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전화를 걸어 좀 전에 자신이 느꼈던 그 긴장감에 대해 토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최하늘: 전…….」

「오한결: ?」

「최하늘: 얼음 마녀에 한 표 던질게요.」

「오한결: 굿 초이스!」

* * *

“역시 명일문화재단 이사장실은 대기업 회장실 못지않군요. 아차, 대기업이 세운 문화재단이니까 같은 말인가요? 하하하.”

이상민 장관의 도발에도 신수진 이사장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문한국 보좌관을 바라봤다.

“들었죠? 장관실 좀 꾸며주세요. 저렇게 서운해하시잖아요?”

문한국 보좌관은 붉어진 장관의 얼굴을 보고는 기가 죽은 채 열심히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신수진 이사장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장관님, 우리 솔직해지죠. 오한결 작가 때문에 오셨나요?”

문한국 보좌관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지만, 이상민 장관은 담담하게 신수진 이사장을 쳐다봤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죠.”

“오한결 작가와 우리 문화재단은 어떤 계약을 맺지 않았어요. 오한결 작가와 뭔가를 하고 싶다면, 작가와 직접 얘기하면 될 일이죠. 문화재단에 이렇게 직접 오실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상민 장관이 거만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당연하죠. 이미 오한결 작가와 자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신수진 이사장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래요? 근데 여긴 왜 오신 거죠?”

“알려드리려고요. 이제 오한결 작가 뒤에 제가 있을 거거든요.”

“!!”

“국가가 후원하는 작가, 오한결.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작가 오한결.’ 이런 타이틀에 어울리려면 민간단체가 아닌 정부 부처에서 후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일종의 ‘국가대표’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그 태극마크를 달아 줄 거거든요.”

“예술은 올림픽 경기가 아닙니다. 장관님.”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이죠. 안 그런가요?”

* * *

EBC 방송국 회의실.

오한결과 최하늘의 맞은편에 김명호 피디와 국장이 앉아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오한결을 보고만 있어도 국장은 웃음이 절로 났다.

오한결은 그런 국장의 모습에 호기심을 보였다.

“국장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럼요! 오한결 작가님이 누굽니까! 이미 한국 예술계를 평정하고 콧대 높은 프랑스에 예술이 뭔지 가르쳐준 작가 아닙니까!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작가님께서 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주신다니, 어찌 기쁘지 않겠어요?”

‘그 섭외자가 바로 나다!’라는 듯이 김명호 피디가 허리를 곧게 펴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국장이 김명호 피디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나의 후배! 네가 결국 해낼 줄 알았다.”

더 자신감이 붙은 김명호 피디가 프로그램 안내문을 나눠주며 말했다.

“특별 편성이고, 파일럿 형태 프로그램입니다. 처음부터 정규 방송으로 편성하면 더 좋겠지만, 아쉽게도 올해 말까지 모든 일정이 꽉 차 있어서요. 이번 달 말부터 주 1회 총 3편 방송이 나갈 예정입니다.”

국장이 끼어들었다.

“오한결 작가님 걱정하지 마세요. 정규 편성 무조건입니다.”

“아! 선배! 좀 끼어들지 마세요. 얘기 중이잖아요.”

“…….”

흥분을 가라앉힌 김명호 피디가 말을 이었다.

“세 작품 그리는 거로 생각하시면 되고요. 그림 재료들은 저희가 최상품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음, 혹시 어떤 작품 그릴지 정하셨나요? 아니면 저희가 정해드릴 수 있어요. 우리 쪽 구성작가가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다양한 그림 스타일을 자료 조사해 놨거든요. 언제든 오한결 작가님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말이죠.”

최하늘이 말했다.

“작가님, 문화재단도 그림 정보 보내드릴게요. 저희도 꽤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거든요.”

오한결 작가가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모두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이미 그리고 싶은 작품이 있거든요.”

“오! 그렇습니까. 그게 뭔지 알려주시겠어요?”

“글쎄요, 워낙 제가 아끼는 작품이라. 방송 때 보여드리면 안 될까요?”

김명호 피디가 국장의 눈치를 살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피디인 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방송 준비를 해야 하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국장이 오한결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한 가지만 말씀해주세요. 프랑스 파리 보자르에서 보여준 작품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까?”

“물론이죠. 오히려 더 관심을 받을 거라 확신합니다.”

“나이스!”

오한결의 단호한 대답에 국장은 잠시나마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다. EBC 역사상 최초로 시청률 60%를 웃돌고, 자신들이 만든 방송이 해외 모든 언론을 장악하는 멋진 상상이 이어졌다.

그동안 인기와 영광을 누리던 다른 공중파 방송국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는데, 이제는 자신도 그런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단 말이지!

국장은 확신했다.

오한결은 시청률 보장 수표다!

설령 그의 작품 시연이 망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국내외 언론이 EBC를 주목할 것이다. 이래저래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아니라는 얘기지.

그리고 저렇게 작품을 미리 공개하지 않는 건, 분명 엄청난 작품을 깜짝 선보이려는 오한결 작가의 얄팍한 술수 아니겠는가? 작가도 쇼 비즈니스 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한결의 전략도 나름 귀여워 보였다.

“좋습니다! 오한결 작가님의 작품은 생방송 때 공개하는 거로 하시죠!”

원하는 대답은 들은 오한결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회의를 마치고 오한결과 최하늘은 EBC 건물 밖으로 나왔다. 최하늘이 기다렸다는 듯이 오한결에게 물었다.

“불안해서 그런데요, 설마 준비 중인 작품이 대중성과 많이 어긋나나요? 그래서 미리 공개를 안 하신 건 아니죠?”

오한결이 계단을 내려가며 대답했다.

“뭐, 조금 파격적인 작품이긴 하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을 앙다문 최하늘이 오한결 옆에 바짝 붙었다.

“작가님, 저 너무 불안해요. 혹시 문제라도 생기면…….”

오한결이 멈춰 서서 최하늘을 바라봤다.

“문제요? 음……. 그럴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미리 걱정할 필요 있나요?”

최하늘이 한숨을 푹 쉬었다.

“……도대체 무슨 문제까지 예상하시는데요?”

“아마도, 최악의 경우 한국 예술계에서 쫓겨날 수도 있겠죠.”

“작가님!!”

“최하늘 씨, 부탁이 있어요. 이 이야기는 문화재단에도 비밀로 해주세요.”

“!!”

최하늘은 무심히 계단을 내려가는 오한결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떡하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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