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89화 (89/202)

제89화 퓰리처상 사진전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주룩주룩 비가 쏟아졌다.

모던아트미술관 앞에서 파란 우산을 들고 서성이는 양승호 비서. 그가 긴장된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풀잎 씨 여기에요!”

저 멀리 붉은 우산을 쓴 이풀잎이 양승호 비서를 발견하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이풀잎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딱 맞춰서 왔어요. 저 지각 아닙니다, 헤헤.”

양승호 비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비에 젖은 이풀잎의 신발을 쳐다봤다.

“어떡해요. 비가 와서 신발이 젖었네요.”

“괜찮아요. 비 오는 날이니까 그럴 수 있죠.”

“그래도……. 왜 하필 오늘 비가 오는지.”

“난 좋은데요? 꽤 분위기 있고.”

번쩍! 우르르 쾅!

굵은 빛줄기가 회색 하늘을 가르자, 뒤이어 천둥이 치고 대지가 진동했다.

“어머! 빨리 들어가죠. 벼락 맞겠어요. 호호.”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자 붉은색 대형 광고판이 눈길을 끌었다.

「퓰리처상 특별 사진전」

양승호 비서가 입장권을 끊고 쭈뼛대며 말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해서 왔는데 괜찮겠어요?”

팸플릿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이풀잎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왜요? 저는 완전 좋은데요. 꼭 한번 와보고 싶었거든요.”

양승호 비서 얼굴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다행이네요. 주제가 무거워서 싫어하실 줄 알았거든요.”

기자들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은 신문 저널리즘과 문화적 업적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기여를 많이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때문에 사회를 고발하는 무거운 주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장권을 낚아챈 이풀잎이 말했다.

“따라오시죠!”

전시장 내부는 대체로 어두웠고 분위기는 몹시 차분했다.

미로 같이 생긴 벽면을 따라 연도별로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대부분 흑백 사진이었고 하나 같이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입을 무겁게 다문 관람객들이 사진에 집중하며 생각에 잠겼다.

유독 한 사진에 관람객들이 모여 있자 양승호 비서와 이풀잎도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양승호 비서가 사진을 단번에 알아봤다.

“소녀의 절규네요. 퓰리처 사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이죠.”

연기가 자욱한 배경으로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뛰쳐나갔고 무장한 군인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유독 한 소녀가 눈에 띄었는데, 나체의 소녀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울부짖고 있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양승호 비서가 말을 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이에요. 전쟁은 어른뿐만 아니라 죄 없는 아이에게도 무척 잔혹하다는 걸, 사진 한 장으로 증명해냈죠.”

고개를 끄덕이던 이풀잎이 사진 하단에 적힌 안내문을 읽었다.

“1972년 6월 8일. 9살 소녀 판티낌푹……. 어머, 너무 어린아이잖아요. 어떡해.”

“폭격으로 마을은 불에 탔고 아이들은 겨우 도망치고 있는 거죠.”

한참을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두 사람은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자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풀잎이 양승호 비서를 보면서 미소지었다.

“퓰리처 사진에 대해 많이 아시나 봐요? 멋진데요.”

얼굴이 붉어진 양승호 비서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게 제가 시사에 관심이 많아서요. 개인적으로 공부도 했고요. 헤헤.”

“역시 명일그룹 비서실은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닌가 봐요. 그림만 좀 더 잘 그리면 아주 완벽할 듯. 호호.”

양승호 비서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과찬입니다. 하하.”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소곤대자, 혼자 오신 아저씨가 엄청 눈치를 주며 양승호 비서 곁을 스쳐 지나갔다.

“에헴-!”

무안해진 두 사람은 히죽 웃으며 아저씨와 거리를 두고 사진을 구경했다.

조용히 작품을 구경하던 두 사람은 사진 한 장 앞에서 말을 잃고 말았다.

「무너진 다리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 (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1951년 퓰리처상 수상작.」

「1950년 AP통신 기자 맥스 데스퍼 촬영.」

퓰리처 수상작 중 6.25 전쟁의 참상을 담은 작품이었다.

“양 비서님, 이 사진은 도대체 뭐죠?”

양승호 비서가 사진 설명을 꼼꼼히 읽고 답했다.

“중공군 피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난민들이에요.”

“너무 무섭고 끔찍해요.”

폭파된 철교의 모습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끔찍하고 처절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철교의 끔찍한 외형도 문제지만 더 충격적인 사실은 수많은 피난민이 무너진 철교 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모습이었다.

자칫 발을 헛디디거나 철교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수많은 난민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이 안쓰러워요. 솔직히 전쟁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잖아요. 훈련받은 군인도 아니고. 노인과 아이들의 모습도 더러 보여요.”

양승호 비서가 안쓰럽게 바라봤다.

“괜찮아요?”

“……솔직히 충격받았어요. 한국전쟁의 참상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본 건 처음이에요.”

“그럴 수 있어요. 전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렇게 사진으로 직접 본 거잖아요. 아무렇지 않은 게 이상한 거죠.”

“고마워요. 이해해줘서.”

잠시 감정을 추스른 이풀잎이 말했다.

“가시죠. 아직도 볼 게 많이 남았어요.”

씩씩한 걸음으로 다음 작품을 향해 걸어가는 이풀잎.

양승호 비서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재빨리 그녀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작품을 살피던 두 사람이 낯익은 사진 앞에 멈춰 섰다.

“어, 이 사진은 그거 아니에요?”

“맞아요. 한국인 퓰리처상 수상자, 김경훈 기자 사진이에요.”

“와, 양 비서님은 바로 아시네요. 설명 좀. 헤헤.”

킁킁, 목을 가볍게 푼 양승호 비서가 상냥하게 말했다.

“2019년 퓰리처상 ‘브레이킹 뉴스’ 부문에서 수상한 사진이에요. 최루탄을 피하는 온두라스 출신의 모녀를 찍은 건데, 전 세계가 이 장면에 충격을 받았죠.”

국경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 앞에 사람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모여 있다.

갑자기 최루탄이 터지자 한 어머니가 양손에 아이들을 꼭 잡고 필사적으로 대피하고 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움에 허둥대는 모습이다.

사진 기자는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대규모 이민자 행렬인 카라반을 취재하며 사진을 찍었다.

위원회는 심사평으로 ‘이민자들의 절박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다.’고 말했다.

양승호 비서가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저길 보세요. 아이들 어머니가 입고 있는 옷을요.”

풀잎이 탄성을 질렀다.

“어머! ‘겨울왕국’ 엘사 티셔츠네요.”

“여기서 의문이 생기죠. 저들에게 최루탄을 썼어야 했나? 과연 어떤 위협을 느꼈기에 그런 과격한 조치를 했을까? 입을 옷이 없어서 아이 옷을 빌려 입은 어머니를 향해서요.”

“그러게요. 무장 군인도 아니고, 건장한 남성들도 아닌데.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좀 너무 했다 싶네요.”

작품을 모두 관람한 두 사람은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전시장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자, 로비 조명이 유난히 눈부셔 보였다. 창밖에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렸다.

한참을 서 있어서 그런지 이풀잎이 두 다리를 차례로 굽히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엄청 집중해서 봤어요. 양 비서님의 해박한 지식 덕분에 너무 유익하고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쑥스러운지 양승호 비서가 뒤통수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무거운 주제라서 걱정했는데, 즐거웠다니 다행이네요.”

출입구 근처로 다가가자, 열린 문틈 사이로 수분 가득한 공기가 느껴졌다.

“풀잎 씨, 배고프시죠. 식사 가실까요?”

“좋아요!”

“혹시,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시면…….”

“오늘 딱 어울리는 음식이 있어요. 동동주와 파전!”

양승호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뭘 좀 아시는군요! 비 오는 날엔 파전이죠! 가시죠! 제가 잘 아는 식당 있어요. 거기 파전 엄청 유명하거든요.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사람들로 붐비는 파전집 구석 테이블에 이풀잎과 양승호 비서가 마주 앉았다.

비가 오는 날이라 그런지 가게 안이 손님들로 가득했고 종업원들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주문한 파전이 나오자 이풀잎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파전을 맛보았다.

“이야, 기가 막히네요.”

“제가 말했죠. 맛집이라고. 하하.”

동동주와 함께 파전을 즐기던 두 사람은 어느새 배가 찼는지,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이풀잎이 물었다.

“그나저나 회장님과 한결는 엄청 친한 거 같은데. 원래 알던 사이였나요?”

“아니요. 회장님께서 오한결 작가 작품에 반해서 먼저 다가가셨어요.”

“아……. 한결이도 참 대단하네. 그래도 너무 좋네요. 친구가 그런 멋진 후원자를 만났으니까요. 이제 그 누구도 한결이를 건들지 못하겠죠. 회장님이 딱 버티고 있으니까요. 하하.”

잠시 머뭇거리던 양승호 비서가 말했다.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이풀잎이 고개를 갸웃하자, 양승호 비서가 어색한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경쟁자가 생겼거든요.”

“경쟁자요? 후원자가 또 나타난 건가요?”

“정확히 말하면 후원자는 아니고요. 오한결 작가의 명성을 원하는 사람이죠.”

“헉……. 그게 누군데요?”

양승호 비서가 몸을 앞으로 숙이고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상민 문체부 장관이요.”

놀란 이풀잎이 크게 말했다.

“네? 문체부 장관이요?”

양승호 비서가 자신도 모르게 검지를 이풀잎 입술에 갔다 대고 말했다.

“조용!”

이풀잎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자, 놀란 양 비서가 얼른 손가락을 치우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왜 내 손가락이 거기에…….”

“우하하하.”

이풀잎이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잘못이죠. 너무 떠벌렸네요. 그나저나 왜 문체부 장관이 한결에게 접근한 거죠?”

양승호 비서가 이상민 장관과 관련된 기사들을 보여줬다. 유기견 보호소를 배경으로 이상민 장관과 오한결이 방긋 웃는 사진이 바로 보였다.

“오한결 작가와 봉사활동을 같이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세상이 주목하잖아요. 장관은 그걸 노린 거죠.”

이풀잎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요? 어차피 둘 다 유명한 사람들 아닌가요?”

“문체부 장관은 고위직 공무원이지만, 지금까지 두드러진 활동이 전혀 없었죠. 이풀잎 씨는 이상민 장관에 대해 들어봤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이풀잎이 대답했다.

“그러네요. 저는 오늘 장관 얼굴 처음 봤어요. 아……. 맞네요. 오한결과 친해지면 장관으로서는 이득이 많겠네요. 지금처럼 언론에 얼굴이 도배될 테고.”

“문제는 여기 유기견 보호소는 신태진 회장님께서 남몰래 거액을 후원하고 계신 곳이라는 거죠. 그런데 단 하루 만에 유기견 보호소 이슈를 이상민 장관이 차지해버렸어요.”

이풀잎이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양승호 비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상민 장관은 오한결 작가를 이용해 인지도를 쌓고 다음 공천을 받을 계획이에요.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오한결 작가의 명성을 이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고요.”

“아……. 근데 한결이하고 친해지는 것만으로 그게 가능해요?”

“다름 아닌 오한결 작가니까요.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천재 예술가 아닙니까.”

잠시 고민하던 이풀잎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이가 손해 본다는 증거가 없잖아요? 장관이 한결이 덕분에 국회의원 되면 한결이를 후원할 수도 있고요. 왜 한결이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 그렇게 볼 수도 있네요.”

동동주를 들이켠 이풀잎이 환하게 웃었다.

“양 비서님하고 있으니까. 너무 즐거워요. 우리 자주 만나요.”

“아, 정말요! 정말 자주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즐거운 데이트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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