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야외 공연장
서울 변두리 아파트 단지 상가 앞에 도착한 오한결과 노진홍.
고개를 드니 색이 바랜 학원 간판이 눈에 띄었다.
「꿈과 희망 발레 학원」
노진홍이 미소짓는 오한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름 재밌죠? 조금 유치하기도 하고요. 어렸을 땐 몰랐는데. 하하…….”
“멋진데. 기분 좋아지는 이름이야.”
상가 2층에 도착하자, 불투명한 유리문 뒤로 얼핏 발레 교습 장면이 비췄다.
상냥한 목소리의 강사가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스트레칭을 가르치고 있었다.
노진홍이 문을 열자, 땡그랑 종소리가 학원 내부로 은근히 퍼져나갔다. 풍성한 머리에 짙은 화장을 한 고령의 여성이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진홍이 아니냐? 이게 얼마 만이야!”
마상순 원장이 노진홍을 거칠게 끌어안으며 회상에 젖었다.
“꼬맹이 때 얼굴이 그대로 있구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노진홍이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운 좋게 아직 발레를 하고 있어요. 이제 대학생이고요.”
마상순 원장이 노진홍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어머나! 꾸준히 발레를 했구나. 어릴 적부터 발레를 좋아해서 그럴 줄 알았다. 발레는 취미로 하는 거야? 아니면 전공을 하는 거니?”
“국립예술교육원 발레 전공이요.”
“!!”
마상순 원장이 눈만 껌뻑거리며 노진홍을 바라봤다.
“천재들만 간다는 그 학교를? 세계적인 클래스를 자랑하는 거기를?”
오한결은 마상순 원장 반응에 꽤 흥미를 느꼈다. 노진홍 학생의 실력이 어렸을 때 어땠기에 저런 반응이 나올까? 원장의 반응은 믿을 수 없다는 뉘앙스이자, 더 나아가 기적이 이뤄졌다는 감탄이었다. 확실히 진홍이는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영재는 아니었나 보다.
노진홍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상순 원장이 소리를 질렀다.
“네가 해냈구나! 자랑스럽다. 진홍아!”
노진홍이 오한결을 소개하자, 그제야 마상순 원장은 오한결을 알아보고 기뻐서 펄쩍 뛰었다. 그녀는 오한결에게 사인을 받은 뒤 가보로 남겨 놓겠다는 말과 함께 사진까지 여러 장 찍었다.
“노진홍 학생은 어렸을 어땠나요?”
마상순 원장이 단체 채팅방에 오한결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대답했다.
“귀여웠죠. 춤을 사랑하는 아이였어요. 음악만 나오면 배우지도 않은 발레 동작을 어찌나 잘 흉내 내던지. 수업이 의미가 없었어요. 혼자 놀다 가는 수준이었죠.”
얼굴이 붉어진 노진홍이 대답했다.
“아, 그랬죠……. 그래도 솔직히 재능은 없었어요.”
마상순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분명 체계적인 학습이 어려울 정도로 산만하긴 했어. 진홍이에겐 발레란 일종의 놀이였어. 그렇지?”
“잘 기억이…….”
오한결이 노진홍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한 재능을 보였네. 무용가로서 최고의 재능 말이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는 노진홍을 향해 오한결이 말을 이었다.
“음악에 반응하는 그 본능이야말로 분명한 재능이야. 진홍이는 기교를 익히기 전부터 자신의 근육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흥겨운 몸짓을 만들어 냈던 거야.”
오한결의 말대로, 이사도라 던컨도 몸짓을 통해 영혼과 감정을 발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몸짓이야말로 춤의 본질이자 언어이고 육체와 함께 표현된 기쁨이라는 것이다.
마상순 원장이 고개를 획 돌려 오한결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쩜 그렇게 잘 아세요? 그림만 그리시는 게 아니었구나. 어쩐지 귀태가 좔좔 흐르는 게 완벽한 예술가 그 자체입니다. 호호.”
슬쩍 미소 지은 오한결이 노진홍에게 물었다.
“무용가는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해. 내가 추고 있는 춤은 무엇일까? 내가 사는 이 세계에서 그 춤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나의 춤……. 어떤 가치…….”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마상순 원장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갑자기 이 분위기는 무엇?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 귀여운 아이들 소개해줄게요.”
마상순 원장이 강의실 문을 열자, 강사와 아이들이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멍하니 바라봤다.
“김 쌤, 여기 내 애제자. 노진홍. 국립예술교육원에서 발레 전공하고 있어요.”
“우와!”
김 쌤과 아이들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여러분들도 우리 학원 열심히 다니면 얼마든지 국립예술교육원에 갈 수 있어요! 꼭 부모님께 말씀드려요. 오래 다닐수록 좋다고!”
“네! 원장 선생님.”
원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노진홍이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오한결 작가님도 발레 배워볼래요?”
원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 발레에 대해 잘 아시던데. 할 줄 몰라요?”
“아……. 전 이론 위주로…….”
“아하! 김 쌤, 귀한 손님에게 잠깐 발레 동작 좀 알려줄래요?”
엉겁결에 바닥에 깔린 매트에 주저앉은 오한결. 그 옆자리에 노진홍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앉았다.
김 쌤이 두 사람 앞에 서서 말했다.
“발레 매트운동 해볼게요. 유연성과 신체 밸런스를 길러주는 운동이에요. 자, 우선 허리를 곱게 펴고 배를 쑤욱 집어넣으세요.”
몸을 활처럼 굽혔다가 연체동물처럼 허리를 펴는 노진홍의 완벽한 동작과 다르게, 오한결이 뻣뻣한 상체를 바닥에서 겨우 일으키자 근력이 부족한 탓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마상순 원장이 오한결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오한결 작가님은 기초체력이 약하네요. 오늘 끝나고 우리 학원 등록부터 합시다. 제가 디스카운트 해드릴게요.”
“…….”
“자, 계속할게요. 무릎을 뒤로 펴고, 다리를 곧게 뻗습니다. 좋아요. 어깨는 살짝 내리고 목을 주욱 빼세요, 턱은 집어넣으시고요. 좋아요.”
김 쌤이 오한결 등에 손을 올렸다.
“척추기립근에 힘을 주고 몸을 바로 세우세요. 그래야 안 다칩니다.”
오한결은 여전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배와 허릿심이 부족한 탓에 김 쌤의 지시에 따라 상체를 세우기도 벅차 보였다.
노진홍은 모든 동작을 완벽히 소화한 뒤 추가로 발끝을 세워 완벽한 스트레칭 자세를 만들었다. 한쪽 다리를 벌리자, 그의 튼실한 하체 근육이 도드라졌고 상체 옆구리가 유연하게 늘어났다. 고관절의 근육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수준급 동작을 완성했다.
마상순 원장과 김 쌤, 아이들은 노진홍 자세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곧이어 오한결이 철퍼덕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오한결의 상태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잠깐의 수업을 마치고 오한결과 노진홍은 아이들의 수업을 구경했는데, 그 사이 원장은 오한결에게 학원 등록을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두 사람은 약속 있다는 핑계를 대고서 학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몸 관리하셔야겠어요. 이번 기회에 발레 배울래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생각 좀 해보고. 내가 요즘 바빠서…….”
“…….”
잠시 말없이 길을 걷던 노진홍이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하신 춤의 가치요. 솔직히 너무 추상적이어서 잘 모르겠어요. 춤이 좋아서 췄고 명문대를 가고 싶어서 갔는데, 제 춤에 억지로 상징을 부여해야 할까요?”
“춤의 가치가 추상적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춤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 내가 믿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하다 보면 그 의미를 알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무용수가 되기 위해 무슨 자격이 있는 걸까요? 왠지 그냥 춤만 잘 춰선 안 될 것 같아서요.”
“자격보다는 관찰력이 더 중요한 거야. 진홍 학생은 춤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 그러니 이미 무용수로서 자격은 갖춘 셈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오한결의 말에 노진홍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다행이네요. 저는 춤을 추는 게 너무 좋아요. 하지만 좀 더 무용수로서 면모를 갖추려면 이제 관찰력을 길러야겠군요.”
“그래, 그러니까 이제 잘 관찰해야 해.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상이 무엇인지, 그걸 예술적 언어로 표현했을 때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을지 말이야. 그러면 자연스럽게 진홍 학생의 춤에 변화가 나타날 거야.”
노진홍은 학원에서 봤던 아이들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을 떠올렸다. 모든 게 재밌고 신기할 나이에 받아들이는 예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노진홍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히 길을 걸어가는 어른들이 눈에 띄었다.
춤을 추며 즐거워하던 아이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풍경에 노진홍의 생각이 깊어졌다.
오한결이 회색 도시의 차가운 풍경을 보며 끙끙거리며 말했다.
“근데…… 어디 쉴 곳 없을까? 몸이 너무 아파. 근육통인가…….”
“아……. 따라오세요. 이 동네는 제가 잘 알아요.”
노진홍이 데려간 곳은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호수공원이었다.
늦은 오후의 온화한 햇살이 잔잔한 호수 표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편한 복장의 동네 주민들이 호수공원 주변을 돌며 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와, 이런 곳이 있었네.”
도심 속 자연 풍경에 오한결이 넋을 놓고 바라봤다.
“여길 다시 오다니. 하하. 작가님 덕분에 오늘 추억 여행한 것 같아요.”
오한결이 공원 구석에 있는 야외 공연장을 가리켰다.
“저기 가볼까? 좀 앉을 수 있겠는걸.”
오한결과 노진홍은 공연장 객석에 앉아 서서히 붉은 태양 빛에 잠식해가는 무대를 바라봤다.
가만히 석양을 바라보던 노진홍은 그 사이 생각을 정리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춤을 추는 이유는 간단해요. 그러고 싶으니까. 그게 제 꿈이니까. 지금으로선 제 춤의 가치는 단원들과 멋진 작품을 완성하고 관객에게 선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재능 없는 한 무용가가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요.”
노진홍의 목소리에서 이전과 다른 어떤 확신이 느껴졌다. 막연하게 춤을 통한 성공이 아닌 자신의 삶을 들려주고 싶은 한 예술가의 깊은 고민이 들리는 것 같았다.
“좋았어. 이제 주제에 대해 좀 더 고민해보자.”
오한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안무가는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해. 그러면 무대는 살아 숨 쉬게 돼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안무가는 그 주제에 확신해야 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믿어야겠지.”
“확신……. 맞아요. 저는 그게 부족했던 것 같아요.”
노진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알겠어요. 그 모든 건 제 마음의 문제였어요.”
오한결이 물끄러미 노진홍을 바라보자, 노진홍은 쑥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실은 우리 단원들에게 정말 미안했거든요. 제 모든 걸 다 동원해서 안무를 짰고, 단원들은 정말 열심히 연습해줬어요. 그런데도 정작 제가 더 불안해하고 확신이 없었죠. 심지어 제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노진홍은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춤을 사랑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오직 테크닉만 남았기 때문에 그랬던 거였네요. 이제 알겠어요. 지금까지 춤에 대해 너무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그랬다. 노진홍은 예술을 향한 진정성은 넘쳤으나 춤의 가치에 대해서는 고민할 틈도, 여력도 없었다. 그러니 주제에 대한 충분한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으리라.
깨달음을 얻은 노진홍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가뿐해 보였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무대 중앙에 선 노진홍.
그가 가슴 벅찬 표정으로 붉은 태양을 삼킨 호수를 바라봤다.
잠시 뒤, 두 손을 우아하게 휘저으며 한쪽 다리를 뻗는 자세를 취했다.
강렬한 붉은 태양이 노진홍을 삼켜버릴 듯했으나 그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야외 공연장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무대 위에 서 있는 노진홍을 보고는 관객석으로 서서히 몰려들고 있다.
점점 동작이 커지는 노진홍.
더는 주변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 자리한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곡을 연주하고 있다.
어느새 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
무대 위 노진홍은 우아하고 격렬한 동작을 이어가고 있다.
그것은 그가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발레 뮤지컬 안무였다.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진심이 느껴지는 노진홍의 춤동작.
관객들도 덩달아 벅찬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한결은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프랑스 거리예술가 클로에를 생각했다. 파리 센강의 배경으로 멋진 현대 무용을 선보인 진정한 예술가.
그 멋진 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오한결은 노진홍이 멋진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아가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