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엘리트 교육
주말 저녁, 오한결은 부모님과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박장대소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힐끔힐끔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직 동생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수는 주말에도 연습하나 봐요?”
아버지가 캔맥주를 들이켠 뒤 말했다.
“아, 한결이가 주말마다 작업실에서 지내니 잘 모르는구나. 한수는 주말 상관없이 늦게까지 공연 연습하잖니.”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이야. 공연도 좋지만 몸도 생각해야지.”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오한결이 애써 밝게 말했다.
“동생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어쨌든 보기 좋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부모님도 어느새 예능에 집중하며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모님과 오한결은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벽시계를 보니 저녁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동생이 발레 연습에 매진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주말에도 늦게까지 연습하는지 미처 몰랐다. 물론 아주 잘된 일이다. 평소 산만하던 동생에게 그렇게 집중할 수 있는 뭔가가 생겼다는 건.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가족으로서 동생의 늦은 귀가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찍 잠을 청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밀린 독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책상에 앉은 오한결은 스탠드를 켜고 한쪽 구석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몰입의 순간에 빠져들었다.
일반적인 독서는 텍스트의 정보가 뇌에 입력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게 뉴런의 연결망이 형성된다. 하지만 오한결의 독서는 그것과 다른 과정을 거친다. 보통의 독서로 형성된 뉴런의 연결망이 일반 도로라면 오한결의 머릿속에 형성된 연결망은 독일의 아우토반처럼 최고 속도가 보장되는 고속도로였다.
그렇게 거침없이 정보를 처리해나가고 있을 때, 오한결의 귀로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철컥. 띠리리.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오한결이 책을 덮고 거실로 나갔다.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발끝을 세우고 들어오던 동생이 오한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형 집에 있었구나. 뭐해, 아직 안 자고?”
오한결이 동생의 피곤함에 찌든 얼굴을 안쓰럽게 보며 물었다.
“늦었네. 공연 준비는 잘 돼가?”
동생이 가방을 거실 구석에 툭 던져놓고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말도 마. 열심히 하면 뭐해, 점점 불안해지는걸.”
덩그러니 바닥에 놓인 동생 가방을 주우며 오한결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진홍이가 안무 짜는데 무척 힘들어해. 걔도 처음이라 그런 듯.”
“그래?”
일전에 노진홍에게 그의 경험을 토대로 ‘빌리 엘리어트’처럼 성장 스토리를 구성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분명 자신 있는 모습이었는데, 진홍이가 실제로 안무를 짜려니 경험 부족 등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오한결은 깊은 고민 끝에 인터넷을 켰다.
발레 안무와 무용론에 대한 수많은 논문을 내려받고 관련 책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노진홍의 고민을 내가 끝내줘야겠네.’
* * *
국립예술교육원 무용과 연습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발레복을 입은 노진홍이 땀을 흘리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밖에서 노진홍의 수없이 반복하는 점프와 섬세한 회전 동작을 지켜보던 오한결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노진홍이 환하게 웃으며 오한결을 반겼다.
“오한결 작가님!”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무슨 소리예요.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뵙고 싶긴 했어요. 이렇게 번거롭게 학교까지 오셔서 어떡해요.”
“국립예술교육원은 나도 꽤 익숙한 곳이라서, 괜찮아.”
노진홍이 화들짝 놀랐다.
“우리 학교 선배님이셨어요? 대박!”
난감한 표정의 오한결이 흥분한 노진홍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손님으로 와봤어.”
“아……. 제가 실수한 거 아니죠?”
“아니야.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노진홍이 싱긋 웃고는 오한결이 앉을 수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노진홍이 따뜻한 커피를 건네자 오한결이 조심스레 받으며 말했다.
“한수 말로는 요즘 엄청 열심히 한다며?”
노진홍이 한숨을 푹 쉬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부끄럽네요. 단원들은 자기 몫을 잘 해내고 있는데, 정작 안무와 연출을 맡은 제가 이렇게 무능력하니까요.”
오한결이 고개를 돌려 노진홍을 바라봤다.
“왜? 잘 안 풀려?”
“막상 안무를 짜려니까 진도를 못 나가겠어요. 말로 설명하긴 쉬워요. 무용을 사랑했던 청년이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최고의 무용가가 되는 과정이잖아요. 거기에 희망과 절망이 적절하게 배치되고 결국 클라이맥스에서 그토록 원했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게……. 제 안무는 그 상황을 너무 억지로 짜 맞춘 느낌이 들어요. 기름에 섞인 물처럼 겉돈다고 할까요? 창작자인 제가 안무에 마음이 울리지 않는데,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겠죠. 중고등학교 학예회 수준으로 전락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두려워요.”
“보여 줄 수 있어?”
노진홍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지금요?”
“어.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어.”
잠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노진홍이 결심한 듯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연습실 중간에 자리 잡은 노진홍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섬세하게 선을 그리며 몸을 움직이는 노진홍.
오한결은 그의 춤을 보면서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기대와 희망으로 시작한 그의 춤동작은 이내 거친 몸동작으로 변해 도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 심리를 나타냈다.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낸 그는 가볍게 뛰어올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강렬한 바이올린 선율에 몸을 맡긴 노진홍은 최선을 다해 연기를 선보였다.
이윽고 안무가 끝나고 숨을 헐떡이며 물을 들이켠 노진홍이 자신 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부끄럽네요.”
“나는 좋았는데. 진심도 느껴지고.”
노진홍이 말없이 오한결을 쳐다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애써 위로해주실 필요 없어요. 감사해요.”
“보완할 점은 있지만, 자신감을 가질 만해.”
“모르겠어요. 왜 저는 확신할 수 없죠? 제 안무가 이상하다는 증거 아닐까요?”
“음……. 이건 어떨까. 확신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이 있는데.”
“그게 뭔데요?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해보고 싶어요.”
“무용 이론을 공부해 본 적이 있어?”
“……이론이요? 학교 수업 시간에 잠깐……. 하지만 무용가에겐 이론보단 실기가 더 중요하잖아요. 교수님도 무용가는 도서관보다 연습실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오한결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노진홍 학생이 틀렸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지금처럼 자기 확신이 부족할 땐 이론으로 자신의 안무를 점검해 볼 필요는 있어. 전문가들의 이론이 확신을 심어줄 수가 있거든.”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지.”
“도서관에 가야 하나……. 전 책 읽는 건 딱 질색이거든요.”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무용 이론을 완벽 마스터했거든.”
“네? 농담이시죠?”
“아니. 진담인데.”
오한결이 빈 커피잔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커피 한 잔 더 주면, 내가 말해줄 수도 있는데.”
“!!”
잔을 받아든 노진홍이 벌떡 일어났다.
“이번엔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듬뿍!”
잠시 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켠 오한결이 말했다.
“지금까지 엘리트 무용 교육을 받았을 거야.”
“네, 맞아요.”
“하지만 왜 내가 춤을 추는지 고민할 시간은 있었어? 아마도 지금까지 정해진 안무를 얼마나 완벽하게 추느냐가 목표였을 거야. 그 안무를 평가받으며 지금에 이르렀을 거고. 그렇게 오랫동안 경쟁에 시달리고 평가를 받다 보면, 창작 안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할 수 있어. 그래서 지금처럼 본인 안무에 대해 확신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기존 틀에서 벗어난 도전이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거지.”
노진홍은 오한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오한결 작가의 말이 맞았다. 항상 정해진 동작이 있었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나게 구현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수준이 결정됐다. 춤을 사랑해서 췄던 시절은 기억도 안 날 만큼 짧았고 어느 순간부턴 기계처럼 몸을 만들고 춤을 췄다. 엄청난 연습량은 완벽한 춤을 추기 위한 기계가 되는 과정이었다.
“……맞아요. 창작 안무에 대한 경험이 적었죠.”
“다행히 노진홍 학생 안무는 괜찮았어. 익숙하지 않아서 불안한 걸 거야.”
“아……. 그럼 제 안무가 형편없지 않다는 얘기네요.”
오한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하지만 보완은 필요해. 그것 역시 노진홍 학생의 과제겠지.”
노진홍은 말없이 고민에 빠졌다.
오한결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노진홍 학생의 작품은 창작 뮤지컬이잖아. 거기서 발레 안무는 전통적 형식에서 탈피해 대중의 기호에 맞게 각색된 거고. 그렇다면 현대무용 안무 이론에 대해 배워볼 필요가 있어.”
“도리스 험프리 말이에요?”
“‘도리스 험프리’를 알아? 현대무용 안무론을 집필한 유명한 안무가잖아.”
노진홍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까 말했잖아요. 학교 수업에서 이론을 배웠다고. 근데 제가 이론 수업을 엄청 싫어해서 사실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어요. 완전 시험용 지식이죠. 밤새 외웠지만 시험 본 후 완벽하게 사라지는 휘발성 지식. 하하.”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도리스 험프리의 이론은 꽤 유용할 거야. 음악과 춤, 그리고 안무에 대해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 현실에 적용할 만한 구체적인 안무 이론을 집대성했어.”
“……그렇군요.”
노진홍의 모습은 마치 수업 시간에 억지로 발표를 해야 하는 학생처럼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좀 더 현실적인 얘기를 해봐야겠네.’
오한결은 자신감을 상실한 노진홍을 보며 물었다.
“노진홍 학생에겐 ‘춤’이란 뭐야?”
당황한 노진홍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춤, 춤? 춤이요? 음. 그런 거 있잖아요. 음악을 듣고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하하하.”
오한결이 크게 웃자, 노진홍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 근데 좀 당황스러운 대답이긴 하네. 이러니까 자신의 안무에 확신을 못 하는 거지. 안무가는 자신의 춤을 대중 앞에서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로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결국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은 안무가가 그만큼 자신의 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아, 맞아요.”
잠시 고민하던 오한결이 말했다.
“이론을 알려주기 전에, 노진홍 학생에게 춤이란 뭔지 알아야겠는걸?”
노진홍이 어깨를 으쓱했다.
“리포트라도 써내야 하나요? 하하.”
“노진홍 학생이 어디서 발레를 처음 배웠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민하던 노진홍이 슬쩍 미소지으며 말했다.
“집 근처 발레 학원이었어요. 아파트 단지에 있던 아주 작은 동네 학원이요.”
“가볼까? 확인하고 싶은 게 있거든.”
“네? 갑자기요?”
오한결의 단호한 눈빛을 마주한 노진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봐요. 10년 만이네요.”
꼬르르.
오한결이 배를 문지르며 민망하듯 속삭였다.
“갑자기 배가 고프네. 하하……. 사실 24시간째 공복이거든.”
“엥? 간헐적 단식하세요? 다이어트를 독하게 하시네.”
“아니, 밥 먹기 귀찮아서 안 먹었어.”
노진홍이 씩 웃었다.
“일어나시죠! 제가 맛집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오, 맛집! 그런데 많이 걸어야 해? 너무 배고파서 걸을 힘도 없네.”
“아니요. 학식 먹으려고요. 여기 되게 유명해요. 뷔페처럼 나오거든요.”
“오! 뷔페! 얼른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