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원반던지기
획-!
붉은색 원반이 저택 정원을 가로지르자, 복실이가 날렵한 동작으로 쫓아갔다.
“옳지, 점프!”
뒷다리에 힘을 준 복실이가 펄쩍 뛰어올라 입으로 원반을 낚아채자, 신수진 이사장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꺄악~ 우리 복실이 멋져!”
파라솔 그늘에 편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수진이는 아직도 천진난만하구려.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단 말이야.”
향긋한 커피를 홀짝 들이켠 이현미 관장이 복실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복실이 덕분이죠. 평소 발걸음이 뜸했는데 복실이 보겠다고 주말마다 오잖아요.”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수진이 어릴 때 맨날 혼자였잖아. 부모가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고. 그때 강아지를 입양할 걸 그랬어. 저렇게 좋아하는데.”
이현미 관장이 회장을 향해 눈을 흘겼다.
“말 잘했어요! 그런데 털 날린다고, 동물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한 사람이 대체 누굴까요? 아, 이 큰 집을 삭막하게 만든 사람이겠죠. 내가 식물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그 사람이요.”
“…….”
신태진 회장이 할 말을 잃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사이 신수진 이사장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파라솔로 다가왔다. 복실이도 혓바닥을 내민 채 그녀를 졸졸 따라왔다. 신수진 이사장이 의자에 앉자 복실이도 그 옆에 궁둥이를 철썩 붙이고 주저앉았다.
물을 벌컥 들이켠 신수진 이사장이 묘하게 무거운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두 분 싸우셨어요?”
이현미 미술관장이 하소연하듯, 좀 전에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침착하게 얘기를 듣던 신수진 이사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엄마, 나 학교 다닐 때 공부하기 바빠서 애완동물 기를 시간도 없었어요. 난 하나도 아쉬울 게 없는데? 전 지금 복실이로 만족합니다. 호호.”
기회를 포착한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그렇지? 뭐든지 다 때가 있는 법이지.”
이현미 관장이 미소를 머금고 소리쳤다.
“그래요! 내가 강아지 기르고 싶어서, 딸 핑계 좀 댔어요. 그냥 넘어가지 그걸 콕 집어요?”
머쓱해진 신태진 이사장이 붉은색 원반을 쳐다보며 말을 돌렸다.
“근데 이건 사냥개들이 하는 훈련 아니니?”
신수진 이사장이 꺄르르 웃으며 복실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그런 훈련의 일종이긴 한데, 프리스비라고 원반던지기 놀이라고 보면 돼요. 복실이처럼 아직 어리거나 소형견들을 잘 못 한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까 아주 잘하던데요. 솔직히 놀랐어요.”
“복실이가 믹스견이잖니. 아마도 사냥개의 피가 흐르는 게 아닐까?”
그 말에 신수진 이사장이 복실이를 유심히 쳐다봤다.
축 처진 눈매와 동글동글한 주둥이가 귀엽게 톡 튀어나와 있었다.
혓바닥을 내밀고 혹시 먹을 것을 주려나 싶은 표정의 복실이.
신수진 이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토종 믹스견 같은데요? 순한 조상들로만 섞인.”
왈 왈 왈.
신수진 이사장의 말에 거침없이 대답하는 복실이를 보고 가족 모두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흥겨운 분위기가 나자 복실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를 연신 흔들며 주위를 맴돌았다.
이렇게 세 사람은 오랜만에 오후의 따스한 햇볕 아래, 한가하고 평화로운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저택 주변을 감싸는 단풍나무들은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고 은은히 불어오는 바람은 새콤한 가을 낙엽 냄새를 퍼트렸다.
“곧 겨울이 오겠어요.”
덜컥!
그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원으로 양승호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태진 회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 주말에 웬일인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게야?”
회장 부부와 신수진 이사장의 이목이 쏠리자, 양 비서가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인터넷 기사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
양 비서가 서둘러 가방에서 태블릿 피씨를 꺼내 신태진 회장에게 건넸다. 그 모습을 본 이현미 미술관장과 신수진 이사장도 재빨리 휴대폰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오한결 작가, 문체부 장관과 봉사로 맺어진 인연」
「문체부 장관 ‘오한결은 뜻이 맞는 아끼는 후배’」
「이상민 장관이 아낀다는 후배는 누구?」
「문체부 장관 이상민, 숨겨진 미담 곳곳에서 쏟아져.」
수십 개가 넘는 기사가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양 비서가 눈치를 살피며 보고했다.
“이상민 장관은 오한결 작가와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유기견 보호소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이곳은 오한결 작가의 어머니가 봉사활동하는 곳 아닌가?”
“어머, 복실이를 입양한 곳이군요. 회장님이 남몰래 후원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신수진 이사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분히 의도적이네요. 장관은 오한결 작가와의 친분을 세상에 알렸어요. 그리고 유기견 보호에 앞장서는 이미지를 얻었고요. 정치적으로 아주 잘 짜인 시나리오예요.”
양 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동안 회장님이 지원하신 후원금만 해도 얼만데, 이렇게 날로 먹으려 하다니……. 너무 속상합니다.”
“돈이 문제가 아닐세!”
회장이 호통쳤다.
“내게 그 돈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중요한 건 장관의 행태야. 지난번에 내게 도발한 것도 그렇고, 이번엔 내가 후원하는 곳에 가서 이런 이벤트를 진행했네. 분명히 오한결 작가를 포섭하기 위해서 내 흔적을 지우는 작업을 했던 것 같아.”
신수진 이사장이 기사를 빠르게 읽으며 말했다.
“이상민 장관이 꽤 머리를 잘 쓰는군요. 원래 이런 인물이었나? 서글서글하고 꽤 털털해 보였는데. 도대체 무슨 꿍꿍인 거죠?”
회장이 눈이 아픈지 태블릿 피씨를 양 비서에게 건네며 말했다.
“정치를 하고 싶은 모양이야. 하긴 그동안 조용히 일만 했으니 언론의 관심 밖 인물이 되어버렸지. 인지도가 형편없으니 추후에 공천이라도 받으려면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오한결 작가가 필요했을 거야.”
회장의 설명에도 신수진 이사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에게 밉보여서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럴까요? 보통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기를 쓰던데.”
“현직 장관이잖니. 그게 자신을 지켜줄 거로 생각하겠지. 그리고 오한결을 얻으면 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믿는 거 같아. 아마도 나를 경쟁상대로 생각할 수도.”
“그래도…….”
“어허, 한낱 장사치인 내가 어찌 국정을 운영하는 장관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조용히 지켜보는 수밖에.”
“음……. 맞아요, 아버지.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괜히 역효과만 날 수 있어요.”
양 비서가 답답한 듯 인상을 팍 구겼다.
“그래도 이렇게 두 눈 뜨고 당할 수 없어요. 제가 대책을 마련해보겠습니다. 명일그룹이 움직이면 언론과 정치권에 장관의 민낯을 알릴 수 있어요.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양 비서님!”
신수진 이사장이 양 비서를 바로 쳐다보자, 그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네, 이사장님…….”
“그게 바로 장관이 바라는 겁니다. 회장님을 움직이는 거. 그럼 언론은 더 장관을 주목하겠죠. 그러니까 회장님은 그대로 계셔야 합니다. 필요하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문화재단은 오한결 작가 일정을 관리하고 활동을 후원해주는 곳이에요. 제겐 명분이 있어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자, 이현미 미술관장이 머플러를 둘렀다.
“전 생각이 달라요.”
모두의 시선이 이현미 관장에게 쏠리자, 그녀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다들 오한결 작가를 너무 모르는 것 같네요. 이미 오한결 작가는 이상민 장관을 받아들였어요. 장관이 하는 모든 행동에 어떠한 거부 표시를 하고 있지 않잖아요. 기사 속 사진에서 오한결 작가가 지은 미소는 정말 진심인 것 같거든요. 어쩌면 현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현미 관장의 말에 모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에 휩싸였다.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한결 작가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워낙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니까. 그리고 항상 기대 이상의 결과로 자신을 증명했으니까요.”
신태진 회장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한결 작가는 예술뿐만 아니라 세상살이도 고수였던 건가.”
신수진 이사장이 벌떡 일어섰다.
“아무튼! 필요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관을 제지할 겁니다. 그게 뭐든 나중에 알게 되겠죠. 추워요, 그만 집에 들어가죠. 오늘은 제가 저녁 식사를 준비할게요. 양 비서님도 드시고 가실 거죠?”
양 비서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래도 될까요?”
복실이가 꼬리를 흔들며 대신 대답했다.
왈 왈 왈.
* * *
데이비드 오 자택 서재.
벽면을 따라 놓인 책장에 온갖 외국어로 적힌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마호가니 책상에 앉은 데이비드 오는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독서에 심취해 있었다.
웅 웅 웅.
불현듯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고개를 들었다.
“네. 데이비드입니다.”
[이봐, 데이비드 날 잊은 건 아니지?]
목소리를 듣고 잠시 고민하던 데이비드 오가 곧 정체를 알아차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앤드류! 정말 자네인가?”
[하하하. 다행이네. 나를 잊지 않아서.]
“나의 친구 앤드류를 어찌 잊겠나. 서운한 말 그만하게. 하하.”
[한국 생활은 어떤가? 뉴욕이 그립지 않아?]
“꿈 같은 시간을 보낸 뉴욕이 어찌 그립지 않을까? 하지만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나름 보람이 크다네. 교수 생활도 꽤 만족스러워.”
[그래, 국립예술교육원 교수라니! 자네의 선택이 백번 옳았네. 최근 뉴욕에서 활동하는 신인 작가 중 그 학교 출신이 꽤 많다고 하더군. 정말 신기해. 그 작은 나라에 인재들이 그렇게 많다니 말이야.]
데이비드 오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훌륭한 교육 기관에서 훌륭한 학생을 배출하는 건 당연한 거지. 나도 그런 점에서 우리 학교가 무척 자랑스럽네.”
[아! 그…… 오한결 작가도 그 학교 출신인 거지?]
앤드류의 질문에 데이비드 오가 충격에 휩싸인 채 미간에 짙은 주름을 잡았다.
‘오한결 작가의 충고를 잊고 있었구나.’
예술은 학력과 출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심코 던지는 자신의 말 속에 뼛속까지 학력에 대한 우월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끄럽고, 한편으론 죄책감마저 들었다. 오한결 작가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실망할까?
잠시 숨을 고른 데이비드 오 교수가 대답했다.
“아니, 오한결 작가는 우리 학교 출신이 아니라네.”
[오 그래? 상관없네. 그게 무슨 대수인가? 난 개인적으로 진짜 예술가는 기성 교육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고유하고 독특한 창의성을 망쳐버릴 수 있거든.]
앤드류의 대답에 더 부끄러움을 느낀 데이비드 오.
그러고 보니 뉴욕에 있을 땐 자신도 독특한 예술관을 가진 작가들의 백그라운드를 물어보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의 작품에 매료되어 친분을 맺었으니까.
근데 한국에 오자마자 데이비드 오는 학교를 따지기 시작했다. 선후배들과 자연스레 어울렸고 그들의 아첨에 익숙해져 버렸다.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렸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부끄러움에 침묵하는 데이비드 오를 대신해 앤드류가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뉴욕 일정이 확정돼서 연락했네. 올겨울 오한결 작가와 올 수 있겠나?]
정신을 차린 데이비드 오 교수가 대답했다.
“물론이네. 이미 오한결 작가에게 말을 해놨어.”
[그 대단한 친구를 드디어 보는군. 명일 문화재단에서 모든 일정을 관리하지? 우리 쪽 에이전시가 정확한 일정을 문화재단에 통보하면 되겠지?]
“그렇게 해주게. 문화재단에 모든 행정 업무를 일임하고 있으니.”
킥킥킥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우리 같은 예술가는 행정 업무에 영 소질이 없지. 하던 대로 작품이나 만들면 되지, 뭐.]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교수 생활을 하면서 행정을 많이 배웠네. 나를 너무 무시하지 말게나.”
[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