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은밀한 전략가
정부세종청사 문체부 장관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이상민 장관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오한결 작가의 프랑스 퍼포먼스 영상이었다.
오한결이 대형 붓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그리고 있다.
화선지를 물들이는 먹이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결과물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예술 작품이었다.
동양화, 특히 한국화의 정수를 전 세계에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기적에 가깝다. 아니, 기적이다.’
샌드위치를 씹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이상민 장관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한국 보좌관이 커피를 들고 장관실로 들어왔다.
“장관님, 제대로 된 식사를 하셔야죠. 몸 상하십니다.”
아이스커피를 낚아챈 장관이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샌드위치가 뭐 어때서. 맛나기만 하구먼. 자네는 식사했나?”
장관이 밥도 안 먹고 업무에 열중하는데, 보좌관이 어떻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겠는가. 눈칫밥 15년 차인 문한국 보좌관은 해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일이 많아서요. 시키신 일도 많고…….”
“역시 열정이 넘치는군. 자네 없으면 일이 진행이 안 돼. 하하.”
“하하…….”
다시 뚫어지게 영상을 시청하는 장관에게 문한국 보좌관이 슬쩍 물었다.
“10번은 넘게 보신 것 같은데, 안 지겨우세요?”
이상민 장관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지겹다니? 자네는 이 영상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 같군. 앞으로 닥칠 기적을 예견하고 있는 걸세.”
“기적이요? 누구한테요?”
이상민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한국 보좌관을 내려다봤다.
“물론 문화 예술계라고 말해야겠지.”
“아…….”
고개를 끄덕이던 문한국 보좌관은 장관의 말뜻을 곱씹어 봤다. 그 기적이란 장관의 앞날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오한결 작가 뒷조사를 시킨 거겠지.
소파 상석에 앉아 등을 기댄 이상민 장관이 말했다.
“어서 앉게나. 내게 보고할 게 있을 텐데.”
문한국 보좌관이 두꺼운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장관님 말씀대로, 오한결 작가 뒤에 명일그룹이 있었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자신을 노출하지 않은 채 오한결 작가를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상민 장관이 말했다.
“공모전 당선도 신태진 회장 입김이 작용했을 거로 보이나?”
“민간단체 사업이다 보니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문화재단 이사장이 신태진 회장의 따님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연관돼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수진 이사장과도 연관이 돼 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오한결 작가가 개인전을 한 아리미술관 관장으로 신태진 회장 아내, 이현미 씨가 부임했다고 합니다.”
이상민 장관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두 손을 움켜쥐었다.
“온 가족이 오한결 작가를 후원하고 있다는 얘기군.”
서류를 뒤적이는 이상민 장관을 바라보며 문한국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공모전 심사 과정에서 데이비드 오 교수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이상민 장관이 고개를 들고 한쪽 눈썹이 삐쭉 올렸다.
“그럴 리가……. 데이비드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정확한 건가?”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하지만 신빙성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같이 심사를 봤던 한국대 김보름 교수가 심사의 부당성을 은근히 흘리고 있거든요. 처음부터 오한결 작가를 내정한 거 아니냐고.”
‘김보름 교수라…….’
국내외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빅쓰리 작가 중 한 명. 항상 짙은 화장과 코가 얼얼한 독한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국내 명문 한국대 교수.
이상민 장관은 김보름 교수의 실력만큼은 인정하지만, 그녀가 주변 사람들을 주무르고 휘두르는 방식에는 난색을 표했다. 애초에 지배욕이 상당한 여자였으니까. 그녀는 대외적으로 이상민 장관을 지지하지만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를 무서운 원로 예술가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상민 장관이 입을 열었다.
“김보름 교수 주장이라면 일단 판단을 보류해야 해. 거짓말도 예술로 승화시키는 무서운 인물이니까.”
문한국 보좌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김보름 교수 소문이 안 좋긴 해도 데이비드 오 교수보다 낫지 않나요? 그분은 가끔 행사 때문에 전화하면 대놓고 장관님께 적대감을 드러내던데요. 데이비드 오 교수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오 교수만큼 예술에 정직한 사람은 없네. 그건 내가 보증하지. 그가 공모전 심사를 맡았다면 분명 공정하게 진행했을 거야.”
데이비드 오 교수와 미묘하게 거리를 두는 장관이지만 언제나 그가 거론될 때면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문한국 보좌관은 장관의 이런 이중적 태도에 몹시 불만이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문 보좌관, 핵심은 말이야. 오한결 작가가 공모전에 어떻게 당선됐느냐가 아니야. 그를 보라고. 막강한 후원자가 있든 없든 그 정도 실력이면 무조건 당선됐을 거야. 어쩌면 이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거겠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한국 보좌관이 물었다.
“그럼 뭐가 문제죠?”
“명일그룹 일가의 역할! 무명 예술가를 세상에 등장시킨 이유. 궁금하지 않은가?”
“아……. 역시 뭔가가 있었군요. 오한결 작가를 뒷조사하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흥미로운 거라도 있었나?”
“사실, 너무 아무것도 없어서 놀랐어요. 그 명성에 비해 배경은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이상민 장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자세히 말해보게.”
“동양예술대 서양학과 졸업. 성적은 중하위 수준. 졸업 이후 뚜렷한 활동 없이 오로지 공모전에 도전한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마저도 모두 예선 탈락이었고요. 근데 갑자기 명일문화재단 공모전에 덜컥 당선된 거죠. 솔직히 사기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지방대 출신에 형편없는 실력자가 갑자기 명일문화재단 공모전 당선이 됐다……. 그리고 명일그룹 일가의 적극적인 후원이 뒤따르고 있다…….”
문한국 보좌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냄새가 납니다. 음……. 신태진 회장이 꾸민 일 아닐까요? 예술 신동을 그동안 숨겨뒀다가 문화재단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낸 거죠. 보세요, 오한결과 명일문화재단은 언제나 매스컴에 함께 거론되고 있어요. 명일문화재단은 명일그룹과 같다고 보면 되고요. 딱 사이즈 나오지 않나요? 돈 한 푼 안들이고 명일그룹 홍보 대사로 이용해 먹고 있어요.”
이상민 장관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오, 추리 좀 하는데. 문록홈즈 수준이야.”
문한국 보좌관이 부끄러워했다.
“제가 추리 소설 좀 읽습니다. 하하하.”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이상민 장관이 물었다.
“이것만 확인해보면 될 걸세. 오한결 작가 등장 이후, 명일그룹 주가 변동!”
잠시 서류를 뒤지던 문한국 보조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찾았습니다! 20~30% 상승폭을 보이고 있네요. 물론 최근 신제품이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20% 이상은 오한결 작가 때문이 아닐까요? 아닌가, 10% 정도인가……. 뭐, 왔다 갔다 합니다.”
이상민 장관이 말없이 문한국 보좌관을 노려보자 그가 말을 흐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영문학과 출신이라 회사 경영에 무지합니다.”
“영어도 못하는 것 같던데.”
“…….”
이상민 장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는 주식 사지 말게. 그리 아는 게 없어서야.”
“헉! 진작 말씀해주시죠! 그럼 이렇게까지 바닥을…….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물렸구먼.”
잠시 불편한 정적이 흐른 뒤 이상민 장관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방금 오한결 작가가 명일그룹 주가를 요동치게 만들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나? 당연히 오한결 작가를 우리 편으로 만들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그와 함께 미래를 그려보는 거야.”
“명일그룹 일가, 특히 신태진 회장이 장애물이 되겠군요.”
“맞아. 자네도 포럼에서 봤지 않은가? 오한결 뺏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 나와 가까워지는 걸 두려워하는 거지.”
“그럼 힘들겠네요. 신태진 회장이 마음먹으면 장관님 정도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으니까요.”
“야!”
정신을 퍼뜩 차린 문한국 보좌관이 고개를 바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금 실성을 했나 봐요.”
이상민 장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현직 장관으로 있는 한, 아무리 신태진 회장이라 해도 나를 쉽게 건들 수 없을 거야. 임기 내 오한결 작가와 친해져서, 모든 미디어에 내 이름으로 도배될 수 있도록 해야 해. 그래야 내년 총선에 우리가 여의도로 갈 수 있단 말이지.”
문한국 보좌관이 눈을 반짝였다.
“우리요?”
“자네, 이렇게 세종시에 평생 눌러앉을 텐가? 난 자네와 함께 가고 싶은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문한국 보좌관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의원님!”
“우하하하. 아직 아닐세.”
“네, 의원님. 하하하하.”
“아직 아니라고!!”
“……죄송합니다.”
잠시 숨을 고른 이상민 장관이 말했다.
“그럴듯한 이슈를 찾아보게. 오한결 작가와 내가 미디어에 함께 나올만한 걸로.”
문한국 보좌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기견 보호소 봉사 활동은 어떠세요?”
“봉사?”
“오한결 작가 어머니께서 유기견 보호소 봉사활동을 꽤 오랫동안 하고 계십니다. 최근에 오한결 작가도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요.”
“오호라. 그거 좋겠구먼. 봉사 이미지만큼 홍보에 좋은 것도 없으니까.”
장관의 눈치를 살피며 문한국 보좌관이 말했다.
“특이한 점은 신태진 회장이 그 유기견 보호소 운영자금 전액을 후원하고 있답니다.”
“뭐? 신태진 회장이 안 끼는 곳이 없구먼! 그럼…… 내가 그곳에 찾아간다면 신태진 회장을 홍보해 주는 꼴이 되지 않은가?”
문한국 보좌관이 눈을 크게 뜨고 장관을 쳐다봤다.
“아닐 겁니다. 신태진 회장 후원은 모두 비공개로 이뤄지고 있답니다. 언론에 노출되는 걸 무척 꺼리는 눈치입니다.”
“그렇다면 서둘러야겠네. 나중에 후원 사실이 알려지면, 세상의 시선은 모두 신태진 회장에게 쏠릴 테니까. 그 전에 내가 기회를 잡아야지!”
문한국 보좌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게 현수막을 하나 만들겠습니다. ‘이상민 문체부 장관! 오한결 작가와 유기견 보호소 현지답사 및 봉사활동.’ 그리고 기자 회견장도 만들고요. 유기견 보호소의 열악한 환경을 감정적으로 호소하고 실질적 개선 방안을 발표하는 겁니다.”
“그건 너무 억지 같은데. 문체부가 유기견 보호소 담당 부처도 아니잖아?”
“이미지를 만드는 거죠. 사회 이슈에 관심 많은 문체부 장관! 정치에 입문할 거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겁니다.”
문한국 보좌관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연극 톤으로 말을 이었다.
“글쎄요, 전 오늘 순수하게 봉사활동 하러 왔을 뿐입니다.”
이상민 장관이 박수를 보냈다.
“은밀하게 정치적 야욕을 비추면서도 표면적으론 순수한 봉사활동으로 보이게 만든다. 맞아, 그게 바로 정치인 이미지야! 문 보좌관 실력이 나오는구먼.”
문한국 보좌관이 흐뭇한 표정으로 답했다.
“오한결 작가가 언제 유기견 보호소에 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기자들도 동행해야겠지?”
“친한 기자들이 많으니 맡겨만 주세요, 장관님!”
이상민 장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우, 배고파! 뜨끈한 설렁탕 한 그릇 땡기는데, 같이 가겠나?”
“넵! 제가 맛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수육 맛집으로 안내하게. 내가 쏘겠네.”
“헉! 욕쟁이 할머니 집으로 가시죠! 거기 수육이 일품입니다!”